윤동주 시인과 함께, 너에게 나를 보낸다 21
달밤의 거리
광풍(狂風)이 휘날리는
북국(北國)의 거리
도시(都市)의 진주(眞珠)
전등(電燈) 밑을 헤엄치는
조그만 인어(人魚) 나,
달과 전등에 비쳐
한 몸에 둘 셋의 그림자,
커졌다 작아졌다.
괴롬의 거리
회색(灰色) 빛 밤거리를
걷고 있는 이 마음
선풍(旋風)이 일고 있네
외로우면서도
한 갈피 두 갈피
피어나는 마음의 그림자,
푸른 공상이
높아졌다 낮아졌다.
_ (1935.1.18. 윤동주 19세)
이 시는 1935년 1월 18일 습작한 시로, 윤동주가 은진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시절에 남긴 작품으로, 연희전문 시절에 남긴 <간판 없는 거리>와 일본 유학 때 남긴 <흐르는 거리>와 함께 소위 '밤거리 3부작'으로 불리는 시다. 이 시를 통해 내면에 간직한 푸른 공상인 화자의 꿈과 괴롭게 느껴지는 회색빛 밤거리라는 현실이 대비되는 모습을 통해 화자의 내적 고뇌가 투영된 시다.
이 시는 고종사촌 친구(형?)이자 같은 은진중학교 동기생인 송몽규가 <술가락>이라는 작품으로 1935년 1월 1일 자 동아일보 신춘문예 콩트 부분에 당선이 된 이후 지은 작품이다. 또한 윤동주는 이 시점부터 자신의 습작노트에 쓴 작품들의 창작연월일을 기록하기 시작했는데, 이와 같은 사실은 송몽규의 신춘문예 당선에 큰 자극을 받은 이후 본격적으로 자신의 문학에 대한 꿈이 구체적으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한편 창작연월일이 1934년 12월 24일로 기록된 윤동주의 3편의 작품 역시 송몽규의 당선 이후 날짜를 기재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작품 속의 거리는 어느 거리일까. 직접 본 거리일까. 상상 속의 거리일까. 어수선한 밖의 상황이 그려지고 있다. 의식을 움츠러들게도 하고 내뻗게도 한다. 뚜렷한 의식에의 눈뜸이 엿보인다.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니라 스스로 안일한 자세를 버리고 거리의 광풍 속으로 뛰어드는 기개와 투지가 넘쳐나 보인다. 이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현실의 모진 구석을 아프게 체험하고 괴로움에 동참을 해야만 한다. 그것을 깨달은 의식에의 눈뜸이 이 시를 있게 했을 것이다. 도대체 안정이 없고 불투명한 생존의 환경 속에서 심리적인 불안은 고조된다. 종잡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꿈과 희망이 쉽게 성취될 것 같지 않다. 환경의 자극과 충격을 받아 마음이 갈피를 못 잡게 스산해진다. 거리는 삶의 현장이다. 비정한 바람이 분다. 때때로 마음의 동요가 일어남도 당연하다. 거리의 현실은 곧 자신의 현실이다. 푸른 공상이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음이 불안한 때문이다. 안과 밖의 관계, 그 관계가 퍽이나 심화되어 있다. 나 또한 요즘 안과 밖에 대하며 많은 생각을 한다. 정말 무서운 것은 내 안의 적이다. 내 안의 적은 보이지 않아서 더욱 무섭다.
'달밤의 거리 / 괴롬의 거리', '한 몸에 둘 셋의 그림자 / 한 갈피 두 갈피 피어나는 마음의 그림자' 등 대구법이 많이 사용된 시다.
'푸른 공상'은 '부푼 꿈'을 시각화한 표현이다.
* 원문표기
- '조그만' -> '쪽으만'
- '달과 전등' -> '달과뎐등'
- '커졌다 작아졌다.' -> '커젓다 적어젓다'
- '괴롬' -> '궤롬'
- '걷고 있는' -> 것고있는'
- '선풍이 일고 있네' -> '선풍이닐고 있네.'
- '외로우면서도' -> '웨로우면서도.'
- '피어나는' -> '피여나는'
- '높아졌다 낮아졌다.' -> '높아젓다 나자젓다.'
*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이 시작노트에 쓴 시들은 대부분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거리에서>는 갑자기 1년 이상 전에 쓰인 시라고 적혀 있다. 왜 느닷없이 1년 전의 작품을 이렇게 가져와서 여기에 기록한 것일까? 나로서는 아직까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혹시 다음 작품 <공상>을 스려고 하니 옛날 작품이 생각나서 다시 소환한 것은 아닐까. 혼자 생각을 해본다.
대한민국 정부는 규암 김약연에게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했다. 그의 어록비가 천안 독립기념관에 세워졌다. 명동학교에서 김약연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김약연에게 배운 소년들은 그 시간들을 의미 있게 살리고 자신을 갈고닦아 명동학교 응원가에 쓰여 있듯 "후일 전공"을 세운다. 윤동주 시인과 명동학교에서 육 년을 함께 공부한 문익환(1918~1994) 목사는 <태초와 종말의 만남>에서 명동마을과 김약연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북간도에서 동만의 대통령이라고 불린 김약연 목사님이 자리 잡고 계시던 명동이 바로 윤동주와 내가 자란 고향이다. 나는 그 명동소학교에서 동주와 육 년을 한 반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명동에서 삼십 리 떨어진 곳 용정에 있는 은진중학교에서 삼 년을 같이 공부했다. 우리는 교실과 강당과 운동장에서 태극기를 펄럭이며 '동해 물과 백두산이...., '를 소리 높여 불렀다. 일본 사람들에게 돈을 안 준다고 동경 유학 시절에 전차를 타지 않고 꼭 걸어 다녔고, 기차를 안 탄다고 용정에서 평양까지 자전거를 타고 갔다 온 백발이 성성한 명희조 선생에게서 국사 강의를 들으며 우리는 민족애를 불태웠던 것이다. 하지만 동주의 민족애가 움튼 곳은 명동이었다. 국경일, 국치일마다 태극기를 걸어놓고 고요히 민족애를 설파하시던 김약연 교장의 넋이 어떻게 동주의 시에 살아나지 않았겠는가! 어떤 작품이던 조선 독립이라는 말로 결론을 내지 않으면 점수를 안 주던 이기창 선생의 얽은 모습이 어찌 잊히랴!
그런데, 아, 조선 독립이란 말로 결론을 내지 않으면 점수를 주지 않았다는 이기창 선생의 얼굴이 제주 4.3을 이끌었던 유격대 제2대 사령관 이덕구와 겹쳐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https://youtu.be/IQBS2mTGg7k?si=GhNVEtt2X0Lw-ZkZ
https://youtu.be/dOvjBYgf5Mc?si=GyTf9ZYvLOYvDDIk
https://youtu.be/0N_Ns13f7go?si=so8xfp74Y8uC8_PB
https://youtu.be/ny6niv4fv-g?si=s3cgEX1AUAjXf4w2
https://youtu.be/eE0mW0TLJ6M?si=8RI62iuqkifxInWd
https://youtu.be/gE397R8FA9Y?si=nnvofVrPSYEJI8C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