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순례 01 04화

잘 떠나기 위하여

by 강산



생몰 연도만 보아도 보인다



신경림 1935.4.6 ~ 2024.5.22

농무, 가난한 사랑노래, 남한강


이강임 1940.2.5 ~ 1971.9.30

부(夫) : 신경림

자(子) : 병진, 옥진, 병규


아, 아이들 엄마는

너무나 빨리 떠나가셨구나


나도 이제는

잘 떠나기 위하여

잘 준비를 하여야 하겠구나!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142116.html?fbclid=IwZXh0bgNhZW0CMTEAAR2PSsvs1wRWvBdja02Cy0u_5aCr5HVci7cTolc6JuG_tzm9lFyo9OjLANI_aem_Acb1QV3dywZtx6yl4gbbwzYe-XHmeytOjHGdqmGPDlafnYobqYdqMkPnpkBDIA3jpHurIhEsTeH8Byl74RcMBaEp#cb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141990.html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141567.html



■ 시인 이재무가 쓰는 '신경림'


01 거제와 구례에서 연하리 상입장까지


시인 신경림은 1935년 4월 6일 충북 충주군(지금의 중원군) 노은면 연하리 상입장 470번지에서 4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주 신씨들이 전남 구례와 경남 거제에서 충주군 노은면 보련골로 이주해 터 잡고 집성촌을 이루며 산 지 무려 이백여 년 만에 그가 태어난 것이다. (훗날 그는 이것을 근거로, 그의 문우나 후배, 제자들과 방담을 나눌 때 아주 신씨는 애당초 지방색이 있을 수가 없었다고 말하고는 하였다).


당시 전남 구례에서 터를 옮겨온 아주 신씨들은 대부분 직계들로서 연하리 보련골에, 일부 방계가 연하리 상입장(장터 윗동네)에 무리 지어 살게 되었는데, 그의 가계는 아주 신씨들 가운데 직계 아닌 방계로서 연하리 상입장에 자리잡은 십여 호 가운데 하나였다.


그의 가계의 승계는 일반 가계의 승계와는 좀 다른 특이한 면이 있었다.

조부가 증조부에게 양자로, 증조부가 고조부에게 양자로, 고조부께서는 구례 지방에서 양자로 들어와 가계를 승계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그의 가계는 양자에서 양자로 대를 이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던 것이 그의 할아버지 대부터 명실공히 순수 혈통만으로 대를 잇게 되었다. 그러므로 시인 신경림은 그 순수 혈통의 3대째를 잇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조부와 그 형제분들은 본래가 학자들이었는데 그들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거개가 다 개화주의자들이었다. 일찍이 그들은 한글 전용을 주창하였고 농촌계몽운동을 벌이는 등 개화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대단하였다(여담 같지만 훗날에 시인 신경림이 시작(詩作)과 여타의 수려한 산문에서 모국어에 대한 남다른 애착과 노력을 보여 준 것은 어쩌면 이러한 그의 가계사의 유전학적 영향과도 무관치는 않을 것이다).

또한, 당시 아주 신씨 집안의 향학열은 인근 타성바지들의 부러움과 시샘을 눈 따갑게 받을 정도로 그 열기가 자못 뜨겁고 유난스러웠다고 한다.


예컨대 시인 신경림의 집안 어른들 가운데에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사람만도 여럿 되었고, 국내의 유수 대학이나 전문대 정도는 한 집에 한두 명 이상 가가호호 거의 대개가 다니고 있을 정도였다고 하니, 이만한 학구열은 사실이지 요즘 세상에도 보기가 드문 예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학구열이 여느 타성바지에 비해 뜨겁고 유난스러웠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인즉, 그것은 아마도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아주 신씨들 특유의 학문적 가풍의 내력 탓이기도 했지만, 당시 전남 구례와 경남 일원 등지에서 이주해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씨들에게는 타관 객지나 진배 없는 충주에서의 신산스런 삶 속에서, 타성바지로부터 행여 있을 수 있는 괄시나 냉대를 받지 않겠다는 어떤 심리적 압박감 내지는 오기에 가까운 의지가 유형무형으로 작용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어디서 듣도 보도 못했던 타성바지가 이주해 옴으로써 토박이들은 토박이들대로의 위기의식 비슷한 것이 작용하여 텃세와 가시 같은 눈총을 보냈을 것이고, 아주 신씨들은 아주 신씨들대로 여간한 신고를 하지 않고서는 객지에서 자신들의 삶의 뿌리를 내린다는 것이 생각처럼 그렇게 수월치만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아주 신씨들은 본토박이들에 비해 더욱 극성을 부려야 살 수 있게 되었을 것이고, 학구열 또한 그들이 부려 댄 극성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어떻게든 간에 아주 신씨들은 그들 특유의 바지런함과 극성에 가까운 학구열 덕택으로 본토박이들에게서 이렇다 할 해코지나 무시를 당하지 않고서도 넉넉히 뿌리를 내려 갈 수 있었다.

구례와 경남 일원에서 이주해 온 그들의 살림살이는 세월의 물살이 장단 완급으로 흐르면서 점차 눈에 띄게 불어나갔다.

그만큼의 결실이 있기까지 그들이 바친 신산의 노고와 근면이 결코 적지 않았음은 물론이었다.


그의 부친(申泰夏)에서는 충주농업학교를 나와 농사를 짓는 한편 면서기, 농협서기 등을 지내다가 후에 동생 신태은(申泰銀,신경림의 삼촌으로 그는 6·25 발발시 시류에 휩쓸려 희생을 당한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이었고 신경림의 나이 열다섯 살이었다고 한다.

당시 소년 신경림은 그의 삼촌의 억울한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았고, 후에 그때 겪은 아픈 경험을 살려 시「폐광」으로 옮겨 놓는다)과 함께 광산에서 덕대(광산의 하청업자), 연상(분광주) 등으로 일했으며, 금방앗간과 금분석간도 경영하였다. 그러다가 신경림의 나이가 열아홉에 이를 즈음에는 논을 판 돈으로 약사와 함께 동업하여 약방을 경영하기도 하였으나 크게 실패하고 말았다.


그의 부친은 일보다는 술과 친구들을 더 좋아하였고(그의 부친은 병이 들어서도 사람을 좋아해서 누가 찾아오기라도 하면 불편한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안 돌아가는 입으로 세상의 온갖 얘기를 하고 싶어했다고 한다.

훗날 그는 세상사람들의 얘기를 들어 주는 작업에 몰두하게 될 때, 그 당시 아버지의 얘기 상대가 되어주지 못한 일이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다고 한다),

한때는 마작에도 손을 대는 바람에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다.


시인 신경림이 태어난 이듬해(1936년) 첫째 동생(현재 서울공대 졸업 후 워싱턴에서 사업 중)이 태어났고, 그 뒤 이 년, 삼 년 터울로 하여 둘째(현재 충주고를 졸업한 뒤 남해화학 근무), 셋째 (현재 홍익대와 미국 조지아 대학원 졸업 후 영국 뉴캐슬리 대학 동양학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재직) 등이 태어나기 시작하였다.

어느새 신경림은 4남 2녀의 장남이 되어 있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집안일 보다는 바깥으로 더 출입이 잦으신 아버지가 위태롭게 보였다. 반면에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산처럼 믿음직스러웠고 신뢰가 갔다.

그의 모친은 곡산 연씨로 충북 괴산군 도안면에서 태어나셨는테, 그 당시 외조부께서는 군내에서도 손꼽히는 부자였다.

그러나 독립운동 자금을 대어주다가 몰락하여 뒤에 서울로 쫓기듯 이사를 가게 되는 불행을 겪게 되었다. 본디 상당한 재력가이신데다가 학식과 덕망을 고루 갖춘 외조부의 훈육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모친께서는 일찍이 한학에 밝으셨고 실천궁행에도 빈틈과 소홀함을 보이지 않으셨다고 한다.

요컨대 그의 부친께서는 다소 즉흥적이고 격정적인 면모가 있으셨던 것에 비해 그의 모친께서는 사리가 분명하셨고 이지적이셨으며, 인정 또한 후하여 인근에서 칭송이 자자하셨다 한다.


어릴 적 신경림은 자연, 매사에 맺고 끊는 것에 관대하셨던 부친에게서보다는 의지와 정감을 속옷과 겉옷으로 적절히 껴입으셨던 모친에게 더 기대어 듣고 보고 배웠다고 한다. 이것으로 보아, 훗날의 신경림의 체질화된 내면의 양면성, 즉 떠돌이 기질의 두루마기 속에 감춰져 있는 냉철한 과학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은 아마도 짐작건대 이러한 그의 부친과 모친의 천품을 선험으로 물려받은 데서 온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신경림에게 음우의 영향을 끼친 분으로는 그의 부모 외에 또 한사람이 있었다.

그의 고향에서는 팔방미인으로 널리 재명을 빛낸 분으로, 그와는 가까운 친척뻘 되는 당숙이었다.

피리를 잘 분다 해서 '신퉁수'로도 불리었던 그의 당숙께서는 목불식정의 일자무식자였으나, '신언서판' 이라는 또 다른 별명에 값을 할 만큼 인물이 좋고 말재간 또한 천의무봉의 솜씨였는지라, 그분 주위에는 언제나 된장 주머니가 매달린 저수지 속 소쿠리에 새우떼가 모여들듯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람들이 들끓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기분에 따라 웃겼다, 울렸다 하는 말솜씨가 가히 금메달감이라 한때는 읍내 악단 단장까지 지낼 정도였다.


또한 그분은 인간문화재로 불리었던 제3의 별명이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연극에도 소질을 보이었고, 소리에도 능했다.

여기에 그는 그 방면의 재질 있는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노름 또한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수준급으로서 건달기가 다분한 타고난 쟁이로서의 낭만주의자였다.

그분은 이러한 기질 탓으로 직업도 다양했다. 한때는 전국을 누비는 장돌뱅이였다가 그것이 시들해질 만해서는 뱃사공 노릇과 뗏목도 탔고, 그것 또한 정들만 해지면 광산으로 들어가 광부로 일하는 등 어느 한곳에 진득하니 안주하질 못했다.

역마살이 끼었는지 그는 툭하면 떠났고, 떠났는가 싶으면 금세 돌아오고는 하였다.


피의 내림 탓이었을까?

어린 신경림에게는 어른들의 골 깊은 한숨과는 달리 그런 당숙이 안돼 보이기는커녕 민들레 풀씨처럼 자유로이 세상을 유영하는 삶이 부러울 뿐이었다.

다만 납득하기 어려웠던 것은 그렇게 많이 직업을 옮겨다니고, 재주 또한 출중했던 그분께서 평생을 가난의 족쇄에 묶여 허덕이며 사는 모습이었다.


아무튼 어린 신경림은 예(藝)에 능하고 재담이 우렁이 넣고 끓인 장국맛 같던 당숙이 좋았다.

어른들 틈에 끼어 귀를 세워 엿들었던 그분의 세상 이야기를, 가슴 깊숙이 달아 놓은 그만의 이야깃주머니에 꽁꽁 다져 챙겨 놓고는 행여나 이야기가 발이 달려 있어서 달아날까 봐 노심초사 몇 번이고 조바심으로 열린 앞가슴의 옷섶을

여미었던 기억은, 지금에 와서 떠올려도 낙숫물 소리처럼 생생하기만 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린 가슴에 어른을 담고 앉아 그가 불어 주는 애조 띤 피리소리를 들으며, 볼의 습자지를 촉촉이 적셔 오는 눈물 줄기를 조용히 훔쳐내고는 하였다.

피리의 음향에는 날개가 달려 있었는데, 어린 신경림은 그 날개에 자신의 몸피 작은 몸을 얹어 마을 밖 먼 길을 떠나고는 하였다.


어찌 들으면 청승맞고 또 어찌 들으면 한스럽던 그 울음의 마디마디에는, 지금에 와서 생각건대 다름 아닌 당숙의 신산스러웠던 삶의 이력과 역정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



02 노은국민학교에 입학하다.


조국이 일제의 사슬에서 벗어나기 이 년 전인 1943년, 신경림은 여덟 살의 나이로 노은면의 노은국민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때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본격적인 대륙침략의 계기를 열었던 일본이 중일전쟁과 마침내 태평양전쟁(1941년)을 일으키며 침략의 야욕을 확대시켜나가면서, 철저한 파쇼 군국주의 체제로 한반도를 유린시켰던 시기였다. 말하자면 그 시기의 한반도는 민족 구성원 전체가 파쇼 군국주의 체제의 희생물이 되어 광란 속에 휩싸여 들어갔던 말 그대로 광기의 시절이었다. 그 세월 속에서 많은 지식인들은 절망과 탄식을 넘어 자의로 타의로 굴절되어 갔으며 또 변절하여 갔다.


파쇼 군국체제의 광기 번뜩이는 약탈과 수난이 그가 살고 있는 노은면이라 해서 비켜 갈 리 만무했다.

그곳 또한 엄연히 군국체제 본국, 즉 내지의 식민지로서의 하나의 행정 구역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곳 노은면이야말로 군수공업 원료인 광물의 산지였던 까닭으로 다른 그 어느 곳보다도 더 많은 수탈 대상 지역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어지러운 혼돈과 무질서의 세월, 암담한 조국의 현실이 어린 신경림에게는 뼈가 시리게 인식되지는 않았다. 아직 세상물정을 제대로 이해하기엔 그의 나이가 턱없이 모자란 탓이었다.


어렸을 때 내게 가장 인상이 깊었던 일들은 대개 광산에 관계되는 것들이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집 뒤 언덕길을 지나가던 밤 대거리들의 칸델라 불빛, 장날이면 으레 싸전 뒤 밤나무 아래서 벌어지던 광부들의 싸움질, 콩을 팔러 집으로 찾아오던 광부의 아낙네들의 억센 사투리, 어머니를 따라가 들여다본 단칸 움막 속의 흐린 십 촉 전등, 금방앗간에서 흘러와 냇물바닥에 깔리던 복대기흙. 행정상으로는 같은 마을이었으나, 광산은 우리 집에서 2킬로쯤 산 속으로 더 들어가서 있었다.


나는 가끔 동무들과 어울려 광산엘 갔고, 버력 더미를 기어올라가 시커먼 금점굴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때 온몸에 감기던 공포와 전율을 나는 지금껏 잊지 못하고 있다. 갱구 가까이의 언덕에는 빨간 양철지붕을 한 이층집 광산사무실이 있었는데, 사무실 뒤는 일인(日人) 기사들의 관사였고, 그 한 기사의 아내는 우리 학교의 교사였다. 키가 작달막하고 은테 안경을 쓴 그 여교사는 매우 상냥했다.


여선생 앞에서 미리 주눅이 들어 주뼛대는 우리들에게 번번이 요깡이니 미루꾸니 하는 귀한 과자들을 나누어주었다. 나는 여선생에게 과자 얻어먹은 얘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일로 삼촌에게 매를 맞은 일이 있기 때문이다. 왜 이 상냥한 여선생과 일인 기사들을 삼촌은 반드시 죽일 놈들이라는 말로 부르는지 어린 내게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마음 속에서 광산이라는 것이 그토록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기실 삼촌으로 해서였다. 전쟁 말기에 삼촌은 광산에서 광부로 일했는데, 그 얼마 뒤에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이어 광산은 폐쇄됐다. 해방이 되면서 광산은 전성기를 이루었다. 북으로부터 피난민, 만주 등지로부터의 귀환동포로 광산은 빈민의 소도시로 팽창되었다. 다닥다닥 붙은 움막들이 몇백 채에 술집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진종일 청승스러운 유행가 가락이 끊이지 않았다.


이때부터 우리 집은 본격적으로 광산과 맺어지기 시작했다. 삼촌은 자본주를 끌어들여 덕대로서 분광(分鑛)의 경영에 참가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아버지마저 연상(鉛商)이 되어 광산에 손을 대게 되었다. 광산과 우리 집과의 관계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 화약상, 금방앗간, 금분석 등으로 깊이 빠져 들어갔다. 명절이 오면 이십여 명의 광부들이 우리집에 모여 돼지를 잡고 순대를 삶으며 웅성대던 모습이 아직도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 중 '내 시의 뒷이야기'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학교에 다니는 것이 어린 신경림은 즐거웠다. 그곳에 가면 새로 사귄 동무들이 있었고 수선화처럼 청초한 여선생님이 있었다. 신경림은 어깨에서 허리로 비껴맨 책보 속 필통 안에서 덜컹대는 몽당연필에 발장단을 맞추며 등하교에 열중하였다. 까까머리 동무들과 함께 해찰하면서 반공중으로 한 획 한 획을 흘림체로 흘리듯 나는 기러기떼에 사정없이 돌팔매질을 하기도 하고, 남의 집 채마밭에 들어가 무서리도 일삼으며 지내기도 했던 어린 신경림은, 간혹 어느 날에는 그런 동무들로부터 일부러 뒤쳐져 저 혼자만이 공상의 언덕에 올라 몸과 마음을 문이기도 하였다.


공상의 팔 할은 바람에 정처없이 날아다니는 검불처럼 목계 강가를 배회하는 거였다. 목계야말로 어린 신경림의 마음 속에 깊게 자리잡은 이상향의 마을이었다. 간혹 당숙들과 삼촌들이 주고받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어깨너머로 훔쳐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들의 말이 과장이 아니라면 그곳은 이 지금껏 가장 아름다운 낙원임에 틀림없었다.


또한 그곳에 사는 사람들 역시도 가장 선하고 고운 사람들임에 의심이 있을 수 없었다. 언제든 기회만 주어진다면 그곳엘 꼭 가고 말리라. 어린 신경림은 충치로 썩어 가는 어금니를 질끈 깨물고는 하였다. 죄 아닌 선(善)한 바람이 깊어서였을까. 그의 간절했던 소망과 기대가 예상보다 훨씬 빨리 이루어졌다. 학교에서 그곳으로 소풍을 갔던 것이다. 하긴 그곳말고는 걸어서 소풍을 갈 만한 곳도 달리 없었다.


어린 신경림은 자신의 소원이 뜻하지 않게 금세 이루어진 것이 무척 기뻤다. 생각 같아서는 두 손을 번쩍 들어올려 만세라도 불러 대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숫기 없는 그로서는 속으로만 그 기쁨을 맛볼 뿐이었다. 본래 잠이 많은 그였지만 소풍 전날은 설렘 탓으로 도통 달아나는 발 빠른 잠을 잡을 수가 없었다. 훗날 그는 그곳에서의 인상기를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어린 한 시절을 남한강 가에서 보낸 나로서는 남한강의 삶과 정서를 한 편의 시로 쓰고 싶은 욕망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이다. 한데 나는 남한강 하면 먼저 목계라는 한 강마을이 떠오르고, 목계 하면 남한강 전부의 모습이 떠오르니 이상한 일이다. 물론 목계는 남한강에서 더없이 중요한 나루로, 옛날 이곳에서는 해마다 정월에 강운과 강을 끼고 사는 사람들의 안녕을 비는 당제가 열렸으며, 그 무렵 사방 이백 리 안팎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줄다리기를 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고장이 남한강에서 유일하게 강장이 서던 나루라는 점이다. 서울에서 뱃길을 타고 소금배 나 장사배가 오면 으레 목계나루에서 짐을 부렸고, 이곳에서 소금이며 생선이며 하는 물건들은 달구지로 옮겨져 새재와 박달재를 넘어 충청도·강원도·경상도 각 지방으로 퍼졌으며, 소금배와 장사배는 달구지에 실려 온 내륙 산물들을 바꾸어 싣고 내려갔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강벌에 장이 섰으니 그것이 목계장이다. 이 장은 닷 새에 한 번씩 서는 것이 아니라 소금배가 닿는 아무 때나 섰으며, 하루로 끝나지 않고 한 번 서면 닷새씩 이레씩 갔으며, 장사꾼들은 장을 끌어 이문을 높이기 위해서 난장을 벌이고 씨름판을 벌였다. 물론 지나간 시대의 일로 지금은 모두 얘기로 만 남아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내가 목계에 특별히 집착한 것은 이런 이유들 때문만은 아니다.‥(중략)‥목계로 소풍을 갔을 때의 감동도 잊지 못한다. 강에 바짝 다가붙은 이층집들, 즐비한 가게, 차와 사람들을 실어 나르던 너벅배, 강가의 솔밭‥‥‥, 커서도 나는 종종 목계를 찾아갔었는데, 담배 수납철의 떠들썩하던 풍경도 여간 인상적이 아니었다. 집집마다 젓갈 장단에 노래가 끊이지 않았고, 담배를 바치고 돈을 주머니에 넣은 농사꾼들은 호기 있게 술 주정을 했다. 내겐 어쩐지 이것이 바로 한강의 삶의 모습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뽑은 나의 시와 이야기' 중에서


이상 그의 술회에서 보았듯 목계는 어린 신경림의 마음의 천에 아름답고 풍요로운 풍광으로, 나아가 사람들의 애환이 씨줄과 날줄로써 섬세히 수놓아진 마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그곳은 그가 장년이 된 이후에 떠올렸을 때도 마음의 강물 속으로 까닭 모를 설렘이 물결치는 그런 곳임을 알게 되었다. 소풍을 다녀온 이후 어린 신경림은 한동안 시도 때도 없이 불쑥 얼굴을 내밀곤 하는 목계의 모습에 시달려야 했다.


강둑을 따라 한여름날의 밤하늘에 핀 별꽃보다도 더 많이 지천으로 핀 풀꽃들의 가녀린 몸짓들이며, 태어나 처음 구경한 잘 다듬어진 이층집들이며, 눈요깃감만으로는 너무 벅찼던 가게, 그 이름만으로도 설렘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너벅배, 아침 조례 때의 전교 어린이들의 줄서기보다 더 나란히 줄지어 서 있던 소나무들의 행렬, 정선 쪽으로부터 뱃길을 타고 내려오는 소금배와 장사배, 그들이 불러 대는 강의 하류처럼 낮고 축축한 가락 등등.


그는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와 비쩍 마른 그의 앞가슴을 헤쳐대는, 집요한 목계에서의 유혹의 여러 모습들을 떨쳐 내려 크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댔지만, 이틀째 감지 않은 그의 머리에서 비듬만 떨어졌을 뿐 그 모습들과의 싸움에서 번번이 두 손을 드는 것은 그의 의지였다. 그만큼 목계에서 받은 인상은 강렬했다. 점차 어린 신경림은 부지불식간에 공책 한구석 여백을 이용하는 시간이 늘어갔다. 그의 뇌리에 각인된 목계의 풍광을 뜯어 내 공책의 여백 속으로 옮겨 놓는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훗날 우리 문학사에 그 이름자를 굵은 획으로 남길 시인의 시작(詩作)은 이렇게 시작이 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날처럼 몽당연필을 크레용삼아 목계에서의 단상을 치고 있는데 누군가 그의 어깨를 툭 쳐오는 것이었다. 화들짝 놀라 뒤돌아보니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어린 신경림의 손 끝에 눌려 있던 공책을 빼어 들었다. 너무도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서 당혹한 신경림이 어쩔 줄 몰라 마음을 죄며 그저 두려움에 떨고 있었는데, 아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선생님은 고함이나 호령 대신 만면에 샘물 같은 미소를 띠며, 은쟁반 같은 손으로 밤송이처럼 까슬까슬한 그의 머리를 몇 번이고 쓰다듬는 것이 아닌가.


"얘, 이것 정말 네가 쓴 거니?"

"네."

어린 신경림은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픈 심정이었다.

"야, 너 참 대단한 아이로구나! 제법 잘 쓴 시인데 그래."


선생님은 한 손으로는 계속 어린 신경림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시를 받쳐들고 몇 번이고 소리내어 다시 고쳐 읽고 있었다. 아이들의 부러움과 시샘이 섞인 시선이 신경림의 얼굴에 따갑게 꽂혀 왔다. 까닭 없이 가슴이 울렁거렸고 눈물 한 움큼이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목울대를 치밀어 왔다. 그는 작은 입을 더욱 앙다물고, 찔금 눈을 감아 버렸다. 이 일이 있고 난 이후 소리소문 없이 어린 신경림은 교내의 유일한 시인이 되었다.


간혹 짓궂은 아이들이 '이봐, 신 시인 어쩌고' 하면서 그를 놀려대기도 하였지만 그는 아이들의 악의 없는 그런 놀림이 그리 귀에 거슬리지만은 않았다. 막연히 어른이 되면 시인이 되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그는 더욱 악착같이 책을 잡았다. 시인이 되려면 상급학교에 진학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시인이라고 해서 반드시 높은 공부를 해야만 하는 법은 없었지만 그때는 꼭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어린 신경림은 재능을 인정받은 시 때문에 좌절감에 빠지게 되었다.


도에서 시행하는 어린이 글짓기 대회에 그도 다른 어린이들과 함께 작품을 출품했는데, 그만 그를 포함해 그를 아끼던 동무들과 선생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불운하게도 장원을 놓쳐 버린 것이었다.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누구도 그의 장원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그가 그간에 보여 준 시적 재능은 자타가 공인할 만큼 출중한 것이었다. 도교육위원회에서 심사 결과를 통보해 오기를 장원이 아무개라는 이름자는 밝히지 않고 장원이 노은국민학교 차지라고만 알려와 그 장원이 다름 아닌 신경림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막상 시상식날 도에서 보내온 봉투를 열어 보니 장원은 그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산지기집 아들이었다. 노은국민학교에서 가장 시 잘 쓰는 어린이 시인으로 통했던 신경림의 장원 낙방으로 동무들과 선생님이 받은 놀라움은 컸다.


이때 신경림이 받은 충격은 실로 적지 않았다. 모닥불이 끼얹혀진 듯 얼굴이 달아올랐고, 만취한 어른처럼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렇잖아도 길게만 느껴졌던 아침 조례 시간은 그날따라 더욱 길고 아득했고, 그만큼 고통의 길이도 길어졌다. 다시는 시를 쓰지 않으리라 그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단호한 결심은 고등학교에 들어가 장맛비에 흙담이 무너지듯 여지없이 깨지고 만다.


국민학교 시절 신경림과 주로 어울렸던 동무들은 하나같이 별볼일 없는 집의 아들들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그가 생래적으로 잘나고 똑똑해 뵈는, 또는 그런 것을 장기로 삼는 친구들과는 애당초 뜻이 맞지 않았던 성미 탓이었을 것이다. 그와 비교적 가까이 지냈던 친구들은 모두가 사는 게 고만고만한 집의 자식들로서, 이를테면 장터에서 아버지가 잡화점을 하는 강덕식과, 술집 아들 이상옥, 여인숙집 아들 허태순, 국수틀집 아들 김영수 등등이었다. 이들과의 교우는 장성하기까지 굴곡없이 이어지는데 이들 가운데 이상옥은 죽었고, 허태순과는 지금까지도 허물없이 만나 어제와 오늘을 넘나들며 술과 이야기를 즐기는 편이다.


신경림은 특히 이상옥과 허태순하고는 혈육처럼 가깝게 어울렸다. 굳이 이들과 더 친했던 이유를 들라 하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사정 때문이었다. 당시 신경림이 자란 곳은 농사에만 전적으로 생계를 의존하는 농촌이 아니었다. 가까운 곳에 금광이 있어 그곳에 생활의 일부를 투자할 수 있었던 그런 농촌이었다. 장이 서면 인근의 농민들로 붐볐지만 주로 큰 손님들은 금광 사람들이었다. 농사에 비해 벌이가 좋았던 그들은 그만큼 씀씀이도 헤펐다.


그런데 본래 그가 살던 동네는 장터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는 그의 마을에서 좀 떨어진 장터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유달리 호기심이 강했던 그는 장터가 자꾸만 그리워졌다. 그는 장날이면 어떻게든 핑계를 만들어 장터를 쏘다녔다. 쏘다니다 지치면 그는 거기에서 주막을 하는 친구 이상옥의 집에 가서 쉬곤 했다. 주막은 언제나 대만원으로 붐볐다. 그는 친구 이상옥과 함께 주막의 마루에 앉아 술꾼들이 순서 없이 털어놓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연애 이야기, 죽음에 관한 이야기, 빨치산 이야기 등속을 들을 수 있었다. 모두가 처음 듣는 흥미진진한 것들이었다.


어린 신경림이 친구 이상옥과 친할 수 있었던 이유로는 이것말고도 또 하나가 더 있었다. 어릴 적 신경림은 겁이 많았다. 그런 그가 하루는 이상옥과 사소한 말다툼 끝에 주먹질이 오가게 되었는데, 어린이 깡패로 소문난 이상옥에게 힘이 달린 신경림이 나중에는 일방적으로 맞게 되었다. 분한 마음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 그는 다음 날 이상옥을 불러 내 다시 싸움을 걸었다. 그러나 결과는 어제와 마찬가지였다. 그 다음 날 그는 또다시 이상옥을 찾아갔다. 그렇게 엿새째를 찾아가니 그만 이상옥은 질려서 걸음아 나 살려라 달아나기에 바빴다. 수수밭으로 도망가다 넘어진 이상옥은 신경림이 씩씩거리며 다가오자 그 앞에 무릎을 끓었다. 그리고는 두 손을 가슴께로 올려 빌고 빌었다. 어린 신경림의 쇠가죽처럼 질긴 투혼이 그만 이상옥을 무릎 꿇게 만든 것이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이상옥은 신경림의 말이라면 죽는 시늉을 하였고, 저 스스로 누구든 신경림에게 손찌검을 못 하도록 보호자를 자처하였다. 이렇게 해서 겁 많고 순박했던 신경림은 그들 또래에서 가장 힘이 세었던 깡패를 자신의 수족으로 부릴 수 있게 되었다. 또 절친했던 친구로 허태순이 있었는데 그 아이는 그의 어머니가 그를 낳은 후 개가를 해서인지 늘 우울과 우수를 얼굴에 달고 다녔다. 또한 같은 이유에서였겠지만 다른 또래들에 비해 제법 숙성한 티를 내고 다녔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는 허태순이 자신의 집 모퉁이에서 남몰래 훌쩍거리고 있는 것을 신경림이 보게 되었다. 그 모습을 본 신경림은 왠지 가슴 한구석에 슬픔의 물방울이 괴어오름을 느꼈다. 그날 이후로 그는 허태순에게만은 싫은 말 한마디 귀찮은 표정 하나 짓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둘은 누구보다 서로를 깊이 이해하는 사이로 발전해 갔다. 어릴 적 신경림을 논하는 자리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그와 방물장수가 맺은 인연이다.


장사 장사 황아장사

걸머진 게 무엇인가

아기네들 굴레다리

각시네들 낭자댕기

늙으신네 쌈지끈

선비네들 부채끈

도령네들 머리댕기


이 노래는 내 어렸을 적 동네에 황아장수가 들어오면 뒤따라 부르던 노래다. 이 무렵에는 일제 당국의 강제와 극심한 물자난으로 장도 폐지되고, 장터에 단 하나 남아 있는 잡화 가게는 배급표가 있어야만 드나들게 되어 있었다. 이런 판국인데도 용케 우리 동네에는 종종 찾아오는 황아장수가 있었다. 엄장이 큰 늙은이였는데, 그 엄장에 비해 황아짐은 장난감처럼 작았다. 그 안의 물건도 실로 보잘것없었다. 나무를 깎아 만든 목그릇이며 목숟갈, 청올치로 꼰 노끈, 나무열매나 풀잎을 재료로 한 가내 제조의 환약, 헌 한지를 누덕누덕 발라 만든 부채, 이런 것들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도대체 장사라는 사람을 볼 수 없는 세상이니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다. 동네에 들어서면 그는 으레 늙은 느티나무 아래 짐을 풀었다. 그리고 입담과 넉살로 아낙네들과 아이들을 불러모았다. 그가 물건을 팔아 가지고 가는 것은 돈이 아니라 보리쌀이나 좁쌀이나 콩이었다.


그는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해서야 짐을 챙겨 돌아가는 것이었는데, 우리들 아이들은 이때 으레 곳집 뒤까지 그를 따라갔다. 거기서 그는 뒤돌아서서 우리를 향해 소리치고는 했다. "야, 이놈들아! 그만들 가거라. 어둡는다." 그리고는 그 큰 키를 구부정하게 하고서, 더 이상 우리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걸어갔다. 곳집서부터 봉곳한 봉우리가 둘로 갈라진 고개까지는 한 오 리는 되었다. 해 는 바로 그 고개로 넘어가고 그 위 하늘에는 발갛게 놀이 서려 있었다. 고개까지는 곧은 한길이었다.


황아장수의 새카만 뒷모습은 좀체 사라지지 않은 채 빨간 놀을 배경으로 한길에 박혀 있었다. 까마귀가 몇 마리 둔중한 소리로 울면서 황아장수를 따라갈 뿐이었다.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중 '내 시의 뒷이야기'


어린 신경림은 방물장수가 좋아 그를 따라 삼사십 리 이웃장까지 따라다녔다. 그 일 때문에 부모님께 꽤나 꾸지람을 듣곤 했지만 좀처럼 그의 바람기를 잠재울 수가 없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그의 동네로 들어오는 여자 방물장수들이 그의 집 앞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 노독을 식히고 있으면 그들을 그의 집으로 안내해 왔다. 주로 문경이나 영주 쪽에서 참빗, 비누, 대나무 소쿠리 따위를 짊어지고 온 사람들이었다. 할머니나 어머니도 마음이 너그러우신 편이라 한번 집에 든 사람을 내치진 않았다.


그들은 밥값이나 잠자리값 대신에 자기들이 가지고 다니는 물건을 주기도 하고 세상에 떠도는 재미있는 얘기도 들려주었으며, 흥이 나면 노래도 부르곤 했다. 어린 신경림은 벌써 이렇게 해서 각 지방의 많은 민요를 접할 수가 있었고, 그의 핏속을 흐르는 떠돌이 기질의 싹을 틔워 나갈 수 있었다. ●



03 충주사범학교 시절


장터에 나가 장꾼들이 들려주는 세상의 온갖 흥미진진하고도 진기한 얘기에 심취하기도 하고, 동무들과 어울려 광산의 버력더미에 올라가

시커먼 금점굴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목계로 나가 정선 쪽에서 뗏목을 타고 오는 장사꾼들의 민요 가락을 듣는 동안, 어느새 신경림의 장딴지와 팔뚝은 가을날의 알밴 칡뿌리처럼 굵어져 갔고, 목소리도 변해 가는 등 신체적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노은국민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그해 봄, 충주사범 병설 중학교에 시험을 쳐 입학생 전체에서 7등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당시의 사범학교는 가난한 집 수재들이 꼭 들어가야만 하는 그런 학교였다. 가난한 집 자식들로서는 지긋지긋한 생활의 궁핍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곳이 바로 사범학교였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그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사회적으로 그 구조가 짜여져 있지만,

당시만 해도 교육을 통한 계층 상승은 가난한 집 자식들의 공통된 염원이자 꿈이었고, 그것은 또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기도 하였다. 일반 대학보다는 경제적 부담이 덜하였을 뿐 아니라 졸업과 동시에 교사로서의 취업이 보장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가난한 집의 수재들이 너도나도 모여든 곳이 다름 아닌 바로 당시의 사범학교였다.


그러나 우수한 성적으로 들어간 충주사범학교를 신경림은 끝내 졸업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것은 신경림을 포함해 전교에서 두 명만이 풍금을 칠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주지하다시피 당시 시범학교를 졸업하면 졸업과 동시에 국민학교로

발령을 받게 되었는데, 그때 풍금을 칠 줄 모른다면 치명적인 일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악기 다루는 일에 어두운 신경림은, 정말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해서 어렵게 다니던 사범학교를 끝내 졸업하지 못하고 말았다.


중학교 시절에 그는 해방과 6·25를 맞았다. 어수선한 해방 공간에서의

좌우익의 싸움과 정치적 소용돌이는 그의 마을에도 어김없이 밀려와 깊은 상처를 남겼다. 해방이 되면서 광산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지만 이제 그 광산을 차지한 이들은 그곳 본토박이들이 아니었다. 북에서 밀려온 서북 청년들이 본토박이들을 몰아 내고 설쳐대기 시작하였다. 또한 있어서는 안 될 동족상잔의 비극이 할퀴고 간 자취는 너무도 비극적인 것들뿐이었다.


해방과 함께 반짝 호황을 누리는가 싶었던 광산도 6·25를 맞아 폐쇄되었고, 그 와중에 광산에서 광부로 일하던 그의 삼촌이 보도연맹사건에 연루되어 젊은 나이로 죽게 되었다.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큰 슬픔이었지만 남은 목숨을 살리기 위해 부득불 그의 식구들은 피난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당시 보도연맹사건에 연루된 사람과 가족들은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환영을 못 받는, 말하자면 민족의 비극이 만든 조국의 미아였고 사생아였던 것이다. 그는 당시의 끔찍했던 상황을 훗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9·28 수복 후 우리는 너무 성급하게 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미처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 패잔병을 피해 또 한 번 몸을 숨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버지와 나는 광산 가까운 산 속에 숨어 며칠을 지냈다.

인민군 패잔병이 거의 도망쳤을 것으로 판단되는 어느 날, 한 대의 지프차가 광산에 들이닥쳤다. 태극기를 꽃은 헌병차였다.

여기저기서 숨어 있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실로 3개월여 만에 보는 태극기라고 자못 감개무량해 했다.


그러나 지프차 위의 헌병 소위는 주민들의 이런 환영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금을 찾기 위해 허겁지겁 이곳엘 달려온 것이었다.

몇 갱구를 뒤진 헌병 소위는 굴 속에 숨어 있던 광부 셋을 끌고 나왔다.

금을 찾아 내지 못한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빨갱이들이 금을 가지고 도망치려 했다."고 여럿 앞에서 이들을 심문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물론 부인했다. 도망치는 인민군 패 잔병의 행패를 피해 굴 속에 숨어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내게도 낮이 익은 삼촌의 친구들이었다.

헌병 소위는 더욱 약이 오른 듯했다. 마침내 참다못해 권총을 꺼내 셋 중의 하나를 쏘았다. 또 하나를 쏘았다.


뜻하지 않은 사태에 사람들은 모두 새파랗게 질렸다. 두 사람을 죽이고 나서 그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들이 빨갱이가 아니라고 보증할 수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서라.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앞을 다투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직 총을 맞지 않은 나머지 한 광부도 사람들에 섞여 도망치고 말았는데, 이때 이미 특별히 이 사람을 죽여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지, 헌병도 도망치는 그를 내버려두었다.


그 뒤 오랫동안 내 꿈자리는 언제나 뒤숭숭했다.

낙반으로 깔려 죽은 시체, 금 방앗 간을 뒤덮는 도깨비들, 굴속의 귀신들, 이런 것들이 밤마다 나를 괴롭혔다. 나는 광산이 무서워졌고,

그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게 되었다.

이 광산이 아주 폐광이 되고 만 것은 바로 그 얼마 뒤였다.

금의 생산량이 생산비를 따라잡지 못하게 되자 회사에서 스스로 문을 닫아 버리고 말았다. 광산 마을은 일시에 폐허가 되었다.

그리하여 내가 왜 나이가 들어 이곳을 찾아갔을 때는 제대로 서 있는 움막이라고는

불과 다섯 채를 넘지 못했다.


그때 한 움막 속에서 만난 사람은 내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는 우리 마을의 릴레이 선수요 마라톤 선수로서 운동대회만 닥치면

온 마을의 기대를 한 몸에 모으던 젊은이였었는데, 낙반사고로 전신불수가 되어 누워 있는 터였다. 가령 내게 글 쓸 기회가 주어지면 제일 먼저 광산에 관계되는 것을

쓰리라고 생각 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그것이 마치 내게는 의무처럼 느껴졌다.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중 '내 시의 뒷 이야기'


결국 그는 훗날에 이때의 의무를 이행하게 되었다. 이름하여「폐광(廢鑛)」이라는 시가 그것이다. 광기라고밖에 더 달리 표현할 길 없었던 그 전란의 세월 속에서도 소년 신경림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머니와 누이동생 외에 이성과 교제를 하게되었다. 전쟁의 포연 속에서도 꽃은 피었다 지는 것. 숫기 없는 그라고 해서 사춘기 시절의 로맨스 한 토막 없으란 법은 없었다. 비록 옷깃을 스치는 짧은 인연이긴 했어도 그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선명히 남아 있는 그 시절의 로맨스는 다음과 같이 시작이 되고 있었다.


6·25 동란이 발발하던 그 해 겨울을 나는 충북 영동에서 보냈다.

시내와의 사이를 철길이 가로막고 있는 산 아래 마을이었다.

우리를 포함한 같은 고향의 세 세대가 각각 방 한 칸씩에 세 들어 있는 집은 대들보가 굵고 기와가 푸른 고가(古家)였다.

넓은 앞뜰에는 사철나무가 흰눈을 이고 바람에 떨며 서 있었고, 뒤뜰에는 이름 모를 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를 뻗고 있었다.


이 집에는 다섯 명의 처녀가 있었다. 중학교 졸업반에서 내 나이 또래까지의 서로 비슷비슷한 나이의 처녀들이었다. 이 집 딸이 둘, 피난 온

사촌이 하나, 나머지 둘은 고종이었다. 이 다섯 명의 이른바 말만큼씩이나 한 처녀들이 늙은 어머니 한 분 만을 모시고 살고 있었다.

늙은 어머니의 설명에 따르면, 일본서 어느 명문 대학을 나온 이 집 주인은

그해 여름 감옥서 죽고, 하나뿐인 아들은 수복 후 군에 입대했다는 것이다.

이럴진대, 이 집에서는 청승맞고 구성진 냄새가 나야 옳았다.

한숨과 눈물이 온통 이 집을 에워싸고 있어야 제격이었다.


한데 도시 그러하지를 못했다. 눈을 뜨면 먼저 처녀들의 시끌시끌하고 밝은 웃음소리와 노랫소리가 들렸다. 우당탕 문을 밀치고 마루로 뛰어나와

수선을 떨기도 했다. 혹은 다섯 처녀가 한데 어울려 줄넘기에 신명이 나 있기도 했다.

이러한 처녀들이 어린 눈에도 철딱서니없는 계집애들로 보인 것은 당연했다.

당시 나는 중학교 3학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때까지 내가 겪은 일들이

나로 하여금 전쟁을 혐오하도록 만든데다가, 몇 권 읽은 반전적인 책들이 나를 마치 어른이 다 된 것 같은 착각을 갖게 했기 때문이다.

나는, 저런 철딱서니 없는 계집애들 때문에 전쟁은 점점 진흙탕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많은 젊은이들이 어처구니없이 죽어 가는 것이라고 마음 속으로 그녀들을 타매했다.


내가 같은 고향에서 함께 피난 온 친구와 거리에서 지까다비를 팔기 시작한 것은 1 월 중순경이었다. 많은 피난민들, 특히 다 떨어진 신을 새끼줄로 친친 동이고 절뚝거리는 국민방위군을 상대로 한몫 보자는 약삭빠른 상혼은 그 친구의 발상이었다.

이것이 제대로 히트를 했는지의 여부는 지금 기억에 없으나, 이 지까다비 장사를 계기로 나는 비로소 다섯 처녀와 말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중학교 졸업반의 두 처녀(당시는 중학교가 6년제였다)가 생활비 조달을 위해 양키 옷 장사를 하기로 한 것도 우리의 장사에서 암시를 얻은 것일뿐더러, 그녀들은 물건을 떼러 대전까지 가기 위해 우리에게서 지까다비를 사 신었다.

우리는 이 처녀들에게 단 한 푼의 이 문도 없는 본전으로 팔았다. 그러고 보니 그때까지 나와 그녀들 사이에 교통이 없었던 것은 내가 그녀들을 경멸해서가 아니라 그녀들이 나를 꼬마라고 깔보았기 때문인 듯하다.


그 뒤 그녀들은 내가 읽고 있는 책들을 보고는 경탄을 금하지 못했는데, 시장바닥에서 구한 암파문고(岩波文庫)의 책들을 나는 자랑스럽게 주머니에 꽂고 다녔고,

언제나 이 책들이 우리들 대화의 실마리가 되었다. 책을 중심으로 한 대화는 주로 졸업반의 이 집 처녀와 이루어졌다. 그 처녀는 특히 그림에 소양과 취미를 가지고 있었고, 아버지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명랑하고 활달했다.


그러나 실상 나의 관심은 이 집 막내딸인 3학년 짜리에게 쏠려 있었다.

나와 동갑인데다가 키가 크고 다리가 굵은 매우 건강한 소녀로서, 문학이니 예술이니 하는 따위와는 아예 거리가 먼 타입이었으나 긴 머리칼이며 밝은 웃음이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녀와 나는 한마디도 서로 말을 건네지 않았던 것 같다.

그 까닭이 어디에 있었는 지는 모르겠으나, 나와 그 다섯 처녀들의 사이는 그 이상 가까워지지 못한 채, 봄이 오기 전에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중 '내 시의 뒷이야기'


십 년 뒤 신경림은 가을의 어느 일요일, 새재를 넘어 상주에 가는 도중 우연히 그 여인을 만났다. 그러나 그는 끝내 아는 체를 하지 않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가 그 여인과 다시 재회한 것은 그 몇 해 뒤 상경해서 홍은동 막바지에 살게 되었을 때였다. 그러나 그 여인은 고생에 너무 찌들어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그 여인이 그에게 들려 준 그간에 살아온 신세타령을 다 듣고 난 신경림은 눈시울을 붉혔다. 이렇게 해서

씌어진 시가 「서대문구 홍은동 산1번지」였다. 이 작품은 발표하면서

시 제목이 「산1번지」로 바뀌었다.


충주사범학교 시절 그가 맺은 인연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당시 27세의 젊고 패기만만한 교사 정춘용 선생과의 귀한 만남이었다.

그 선생님이 신경림에게 끼친 영향은 실로 컸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인데다 일찍이 누구보다도 감각이 탁월했던 신경림에게 젊은 선생님의 해박한 지식과 세상에 대한 안목은 여러 모로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신경림의 담임이었고, 문예반 지도 교사이기도 했던 그분은 신경림한테서 남다른 시적 재능을 발견하고는 그에 대한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벗어나 같은 문학 동호인으로 만나 인생과 시에 대해 갑론을박하며 토론을 벌인 것도 신경림만이 누릴 수 있었던 특권이었다. 그분은 신경림에게 많은 좋은 서적을

소개해 주기도 하고, 손수 자신의 서가에 꽂힌 책을 꺼내 빌려 주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그분은 신경림에게 충주고등학교에 입학할 것을 권유하였다.

재주가 피기도 전에 시들 것을 염려한 충언이었다.

그러나 신경림은 왠지 내키지 않았다. 풍금을 칠 수 없어 더 이상 사범학교도 다니기 싫었지만, 충주고등학교에 들어가 높은 공부를

계속하기도 싫었다. 하지만 정춘용 선생님의 설득은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았다.

결국 강요에 가까운 선생님의 설득과 권유에 져 신경림은 충주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지만, 그것 때문에 그 선생님은 신경림의 부친으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만 했다. 정춘용 선생과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충주고등학교에까지 계속 이어지게 되는데, 그것은 그분께서

나중에 충주고등학교에 전근을 오셨기 때문이었다. ●



04 충주고등학교 시절, 불타는 시심(詩心)


충주고등학교에 입학한 신경림은 한동안 그곳 교내 건달패들에게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건달패들은 비록 체구는 작으나(그는 반에서 7번 이상을 넘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꼬장꼬장한 신경림이 여간 눈에 거슬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걸핏하면 시비를 걸어오고는 하였다.

그들의 갖은 엄포에도 신경림이 꿈쩍하지 않자 급기야 그들은 공갈 협박을 일삼아 왔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주눅들 신경림이 아니었다. 비록 가냘픈 몸매이긴 해도 날카로운 눈매가 예사롭지 않은데다 죽기살기의 오기 또한 만만치 않았던 그였다. 수적으로는 훨씬 유리한 그들이었지만 결국엔 그들은 신경림의 근성을 당해 내지 못하고 말았다.


학교생활이 시답지 않아서였을까? 신경림은 영 학교에 정을 붙일 수가 없었다.

자연 그는 학교 공부에 게을러졌다. 대신에 그는 목을 한쪽으로 꼬고,

호주머니 깊숙이 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슬슬 남한강 언저리를, 낮바람 밤바람을 동무 삼아 배회하는 문제아가 되었다. 그러나 이때

신경림의 문제성은 여느 문제아들의 문제성과는 질을 달리하는 방황이 들어 있었다.

문제아 신경림의 방황은 훗날 우리 문학사를 살찌울 밑거름으로서의

실존적 역사적 고민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바야흐로 시에 있어서의 신경림의 시대는 이렇게 발원이 되고 있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내 고장에 흩어져 있는 많은 얘기와 노래를 들으면서 자랐다.

시를 쓰게 되면서 이 얘기와 노래를 시로 만들어 보자는 것이 내 꿈이었다.

얘기와 노래를 수용하자니 장시라는 형식은 부득이한 것이었다.

이 시를 구상하면서 나는 서사시라는 서구적 개념의 문학 형식을 무시하기로 했다.

내가 들은 것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이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다.


이 과정에서 나는 내게 가장 많은 얘기와 노래를 들려 주었고, 또 가장 감동적이었던 창돌애비라는 반박수의 방법을 크게 참작했다.

그는 얘기 속에 노래를 섞기도 하고 노래 속에 얘기를 섞기도 하면서 줄거리를 이끌어 가는 뛰어난 얘기꾼이요, 노래꾼이었는데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대목대목 청중을 얘기꾼과 노래꾼으로 동원하는 방법이었다.

-장시집「남한강」의 '책 앞에'에서


소년 신경림이 남한강 자락을 오가면서 바꾼 신발의 문수가 모두 몇 번인지는 정확하지가 않다. 하지만 그는 결코 짧지 않은 세월과 횟수를 거듭하며, 어제오늘 그곳에 붙박고 살아갔던 토착민들의 유장한 삶과 애환과 깊이 모를 비애·분노·좌절·절망 등속을, 또한 희망 ·기다림·그리움 등속을

자신의 가슴을 천으로 삼아 아프게 바느질해 가고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훗날에 그는 그만의 특이하면서도 구성진 가락 속에 이것들을 실어 내는데 성공한다.

그의 초기 시에서는 남한강 물줄기로 솟구치는 이 땅 천민들의 분노와 절규, 또는 강 밑바닥 깊숙이 자리한 그들의 한과 비애 등이 3음보 내지 4음보의 가락 속에 많은 부분 무르녹아 있었다. 그것은 읽는 이로 하여금 한없이 감동의 바다에 빠져들게 했었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장년이 된 연후의

그의 노력과 함께 소년 시절 그가 치러냈던 내용 있는 방황 또한 크게 한몫을 거들었던 것이다.


각설하고, 학교생활보다는 남한강에 더 정을 붙이던 신경림은 어느 날 기어이 일을 저지르고야 만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국어 시험지를

백지로 내고 만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국어 선생님(평론가 유종호 씨의 부친)께서는 신경림을 문책하지 않았다. 대신 시 다섯 편을 써 오면 그가 저지른 잘못을 면책해 줌과 동시에 그것으로 점수를 대신해 주겠다는 제의를 하게 되었다.

국어 선생님은 그렇게라도 해서 신경림의 시적 재능을 살려 주고 싶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교과 과정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사제간의 낭만적인 교감이었다.

그런 국어 선생님의 후덕한 배려 덕택으로 신경림은 자신의 가슴 산맥에 광활하게 내장된 시심의 지하자원을 캐 나갈 수 있었다.

그 선생님에 그 제자였던 것이다.

뒷날 신경림은 그때의 선생님들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나에게 문학 쪽으로 영향을 주셨던 선생님 두 분이 계셨어요.

한 분은 유종호씨 부친이신 유촌 선생님(작고)이셨고, 또 한 분은

정춘용 선생님(현재 변호사)이라고 계셨어요. 이분들은 나하고 이야기해 보시고는 나를 재미있다고 생각하셨는지 일단 학교생활이 끝나면 사제지간이라는 관계를 벗어나서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고‥ ‥‥‥그래서 그분들한테 많은 것을 배웠죠.

그분들이 권하는 책들을 많이 읽었어 요. 지금도 정초에 그분(정춘용 선생님)에게 세배를 가는데‥‥‥ 해마다 그 집에 세배 오는 사람들이 세 명 있습니다. 유종호 씨하고 나하고 옛날 우리 친구 중에 깡패가 하나 있었는데 그 친구하고‥‥‥‥그 두 분들이 특이하신 분들이라 학교에서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엄격하게 하셨지만, 학교 시간이 지나면 똑같은 글 친구로 생각하셨기 때문에 서로 이야기를 허물없이 주고받곤 하였죠.


그런데 그 양반들이 학교생활 내에서는 얼마나 엄격했는지 몰라요.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어느 날 학교에서 장거리 달리기를 하는데,

유종호하고 나하고 한 8킬로미터를 뛰어야 하는데 1킬로미터쯤 뛰다가

돌아와 버렸어요. 반환점을 돌면 팔에 도장이 찍히니까 가짜로 도장을 찍었죠.

그리고 중간 등수로 들어 와야 하는데 15, 6등으로 들어와 버렸어요. 그랬더니

독일어 담당이신 정춘용 선생님께서 "야, 너희들이 그렇게 일찍 들어올 놈들이 아닌데 어디 한번 자세히 보자."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에이, 그거 좀 봐 주면

어떻습니까?"했지요. 그랬다가 실컷 매를 맞고 다음 날은 운동장을 50바퀴 돌고, 반성문 쓰고, 교실에서 무릎 꿇고 네다 섯 시간 앉아 있었어요.

정춘용 선생님하고는 지금도 술을 같이 마시고 친구처럼 지내지요. 그 양반은 나 때문에 인권변호사가 되어

돈도 못 벌고 한 15년 고생을 죽도록 하셨어요.

제자 잘못 둬서 고생한 거죠. 우리 친구들 감옥에 가면 그분이 다 변호하곤 하셨으니까요.


시 다섯 편을 제출한 신경림은 어느 날 일 년 선배의 호출을 받고 몹시 당황하였다.

교내 건달들에게 매번 당해 왔던 예전의 불쾌했던 기억들이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를 앙다물고 날카로운 눈초리로 노려보는데,

그 일년 선배는 그런 신경림의 심경을 대충 이해하겠다는 투와 표정으로,

하나 조금은 당혹한 듯 "야, 임마. 왜 그래? 시를 얘기하자는 건데, 문학 얘기 말야."하고 얼러대고는 아직 의심을 다 털어 내지 못해 눈을 치켜 뜬 그를 데리고 나갔다.

그 일 년 선배는 다름 아닌 시 다섯 편을 써 오게 했던 국어 선생님의 아들 유종호였다.

이들의 운명적(?)인 만남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훗날 각기 다른 장르에서 우리 현대문학사에 우뚝 선 봉우리로 자신들의 존재를 떨친 이들의 만남치고는 좀 싱겁고 객쩍은 면이 없지는 않다.


아무튼 그들이 그날로 해서 맺게 된 인연과 우정은 냇물에서 강물로 열려 나갔고, 한번도 우정의 새끼줄 꼬기에

게으른 적이 없었던 탓에, 오늘에 이르러서는 혈육에 가까운 우의를 나누는 사이로 관계가 발전되어 갔다. 이 둘의 인연은 앞서 밝힌 것처럼

고교 졸업 이후에는 서울에서의 대학 생활로 이어지게 되었다.

유종호는 서울대학교 문리대에, 신경림은 동국대학교 영문과에 각각 입학하게 되는데,

이 둘은 한집 한방에서 하숙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신경림은 고교 시절 내내 학과 공부보다는 문학에의 열정에 더 열심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에는 아예 입학시험 공부 대신 일어판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열 권을 독파해 내었고, 그밖에 투르게네프의 소설들과 백석, 이용악, 임화, 오장환, 정지용의 시집 등을 읽느라 꼬박 밤을 새우곤 하였다. 그는 또 대한교육연합회 주최 중· 고등학교 문학콩쿨 대회에 시와 산문을 출품하여 산문 부문에서 당선의 영예를 안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시절 교지에 평론 「이형기론」을 발표하여

문예반(그는 문예반 활동을 하지 않았다) 학생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그는 고교 시절부터 담배를 하게 되었는데(술은 이미 중학교 시절에 배웠다),

나중에는 그것이 대마초인지도 모르고 그것까지 피워 댔다.

그러다가 그의 나이 27세 때 고향에 있는 술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면서

현실을 비판했다 하여 감옥에 들어갔을 당시, 담배가 몹시도 피우고 싶어 쩔쩔매다가

교도관한테 "담배 하나 못 참는 놈이 뭐 잘났다고 설쳐 대냐." 하는

핀잔을 받은 이후로 담배를 끊게 되어 지금껏 피우지 않고 있다.


술버릇 또한 그 사건 이후로 고쳐져 아무리 많은 양의 술을 마셔도 주법을 어기는 경우가 없다.

고교 시절 그와 절친했던 친구들로는 앞서 밝힌 유종호 씨 외에 장성익 씨(현재 중학교 교사), 이근호 씨(전 외교관), 이재화 씨(현재 대전 지법원장) 등인데 이들과는 지금까지도 가깝게 지내고 있다. ●



05 서울에서의 궁핍한 대학 생활 그리고 하향


1955년 서울은 전후의 폐허 속에서 실존주의와 허무적 낭만주의가

유행의 큰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해방 후 남한에서 단독 정부의 구축을 이룩한 이승만 정권은 전쟁 이후 반공주의를 빌미로 그의 독재체제를 더욱 강화시켜 나갔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수립을 명분으로 각종 정치적 테러를 자행하고, 국민 주권을 탄압하던 이승만 독재 정권은 이미 스스로 존립 명분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기를 맞아 내일에의 전망이 불투명했던 지식인들은 깊은 정치적 허무감과 실존에의 끝없는 물음 속으로 한없이 빠져들고 있었다.


이 시기에 있어 청년 신경림 또한 여타의 지식인들과 크게 다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곧 지식인들의 잠처럼 깊었던 그 허무감의 늪에서 발을 빼내 보다 바람직한 내일에의 세계를 꿈꾸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단련시켜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생각처럼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행보를 방해하는 크고 작은 난관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해(1955년)에 청년이 된 신경림은 고향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안고서

동국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서울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일 년 동안 그는 그의 일 년 선배 유종호와 함께 하숙을 하며 낯선 서울 지리와 문리를 익혀 나갔다.

우선 무엇보다 체계적인 학습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가 들어간 곳이 '독서회' 모임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그 동안 말로만 듣던 이론서와 창작물들을 읽었다.

예컨대 동대문 고서점을 뒤져, 당시만 해도 책명의 거론조차 무시무시했던「공산당 선언」등의 유물사관 철학서들을 원서로 구입하여 다투듯 읽어 내려갔던 것이다.

학문에 대한 갈증은 읽으면 읽을수록 더해 갔다.

그러던 어느 날에는 「공산당 선언」을 외었다는 것이 발각되어 경찰서로 연행돼 가기도 하였다.

그 시절 신경림이 외경심을 갖고 관심 있게 지켜보았던 정치인은 유일하게 단 한 분, 죽산(竹山) 조봉암 선생이었다.

그분의 정치적 신념에 동조를 보낸 신경림은 그분의 한마디 한마디에 눈과 귀를 열어 주목하였다.

그만큼 그분은 민중의 편에 서서 정치적 신념과 행동을 일치시키려

노력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썩은 냄새 진동하던 정치 패거리들 가운데 유독 그분만은 빛과 소금 같은 존재로 보였던지라, 그분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청년 신경림은 첫사랑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죽산 조봉암 선생이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였을 때, 무학여고에 이 백여명(한강 백사장에선 신익희 후보가 20만의 청중을 모아 놓고 연설을 하고 있었다)의 청중이 모인 가운데 연설을 한 적이 있었다.

이백여 청중 가운데 신경림이 섞여 있었음은 물론이었다.

연설이 끝난 뒤 몇몇 일행과 함께 죽산 선생을 모시고 설렁탕을 먹었던 기억은 지금에 와서 떠올려도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훗날 떠돌이 시절에 그는 죽산 선생이 독재정권의 날조된 조작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비감에 젖어 종이쪽지에 써 갈겼다.

그때 씌어진 것이 바로 [그날] 이라는 시이다.

그가 대학 2년에 오르자, 그간 가까스로 유지해 오던 가세가 형편없이 기울어지게 되었다.


자식들이 상급학교로 진학하게 되자 아버지는 쪼들리기 시작했다.

한 둘까지는 견뎌낼 만했으나 자식들이 자그마치 여섯이었다. 고등학교까지는 그래도 봉급 타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농사지어 밥 먹는 일이 가능했으나 내가 대학에 들어가자 등록 금을 마련하느라 땅을 팔아야 했다.

내 동생까지 대학에 들어가자 아버지는 땅을 팔아 가지고도 학비를 댈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나의 아버지 '술과 마작보다 더 좋아한 것'


신경림의 아버지는 그 후 퇴직금을 밑천으로 장사에 손을 대지만

워낙에 장사수완이 없는데다가 경험마저 없었던 터여서, 정성과 성실에도 불구하고 바람에 검불 날리듯 어렵게 마련한 자본금마저 날려 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 6남매 가운데 아래로 셋은 중학교조차 다닐 수가 없게 되었다.

하숙비를 감당할 수 없었던 그는 하숙집을 빠져나왔다.

이른바 동가식서가숙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입주 가정교사와, 당시 교지 편집장이었던 친구 현재(동국대 교수)의 도움과 배려로 외국 소설들을 번역하여 가까스로 학비 및 생활비를 조달할 수 있었다.


그밖에 그에게 음우의 덕을 베푼 친구들이 여럿 있었는데

박희진(시인), 인태성(시인), 강민(출판인) 등이 그들이었다.

대학 시절 조그만 위안이 하나 있었다면 그것은 친구 유종호와 임재경(한겨레신문 논설위원)등과 어울려 당시 음악다방으로 유명했던

'르네상스'에 앉아 세상의 고뇌와 잡념을 털어 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좌충우돌식의 서울 생활에 어느 만큼 이력이 붙을 즈음, 청년 신경림은 마침내 이한직 선생의 추천으로「문학예술」지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게 되었다. 그때가 1956년 늦가을 무렵이었다. 추천작은「갈대」로서 실존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작품이었다.

국민학교 시절부터 막연히 품어 왔던 시인의 꿈이 비로소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꿈이 실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갈피 없는 서울생활을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고 하향을 하고 말았다.

하향을 부채질한 이유 중에는 문단에 대한 불신도 한몫 크게 거들었다.

때는 1957년 봄이었다.


서울을 떠나온 시인 신경림은 그때부터 십 년간 문학적으로는 긴 침묵으로, 생활면에서는 갖가지 이력으로 신산의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는 결코 짧지 않은 그 세월 동안 오로지 먹고살기 위해서 광부, 농사일, 장사, 공사장 인부, 학원 강사, 학교 강사 등 안 해 본 것이 없었다.

예컨대 태창광산(당시 충청북도 일원에서 제일 규모가 크고

남한에서도 그 크기가 몇째 안 갔다 한다)에서 고향 친구와 함께 일한 적이 있었고, 공사장에 나가 막일을 한 적도 있었다.

또한 아편장수의 길 안내로(이때의 경험은 훗날「눈길」이라는 시로 씌어졌다) 한겨울을 보낸 적도 있었고, 강사로 학교에 재직을 하기도 하였는데, 그 학교에서는

교원노조운동을 벌이다가 쫓겨나기도 하였다.


이 일로 해서 그는 당시 충주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문우 유종호한테서

월급날마다 부담 없이 얻어 쓰곤 했던 생활비조차 끊이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경찰에 끌려가 취조를 받던 중에 유종호의 이름을 대는 바람에 유종호가 죄 없이 가택수색을 당하는 등 많은 수난을 겪게 되어,

그것을 몹시 미안히 여긴 그가 차마 그를 다시 찾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절에 시인 신경림이 겪었던,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하면, 지금 와서 생각해 봐도 고소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그의 나이 스물일곱(1962년 5월)이 되던 해였다.

그가 평소 즐겨 찾던 선술집에서 그와 고향 친구들은 취흥에 겨워 생각 없이

막말을 함부로 뇌까렸다. 그 중에서도 그가 당시 극성을 부려 대던 제 3공화국에 대해 가장 맹렬하게 헐뜯었는데, 누군가 그것을 다음 날 관청에 고발하였다.

이른바 '막걸리 반공법'에 저촉이 된 것이다.


이 일로 해서 5·16직후 그는 참으로 어처구니없게 지명수배를 받게 되었는데, 이 사실을 알려 온 사람은 그의 중학교 동기생이었던 당시

충주읍 경찰서 정보계장 허탁(13대 민주당 국회의원)이었다.

그는 새벽녘 볕보다 먼저 일어나 타고 온 자전거를 담벼락에 아무렇게나 쓰러뜨린 채 신경림의 사립문을

걷어찼다.

지명수배자 명단에 신경림이 들어 있으니 어서 도망가라는 것이었다. 아직 눈곱도 다 떼지 못한 그는 너무도 터무니없는 일에 기가 막혔으나 일은 이미 벌어진 뒤라서 똥줄이 탔다.

그러나 신경림은 도망가고 싶어도 비용이 없으니 마음대로 하라고 버텼다.


적반하장이었다. 허탁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너털웃음을 웃어대고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자신의 호주머니를 뒤져 있는 돈 모두를 털어 주었다.

지금의 화폐 가치로 치면 십만 원 돈이었다.

허탁은 절대로 잡혀서는 안 되니

어디든 멀리 도망가라는 신신당부를 잊지 않았다.

친구로 인해 곤란을 겪고 있는 허탁이 신경림은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고 우스워 보이기도 했다.


그는 원주로 해서 인제, 제천 등지로 도피를 계속하다 불과 10여 일 만에 목계에서 잡혀 결국 그렇게 노심초사하던 허탁의 바람도

아랑곳없이 허탁이 있는 경찰서로 연행되어 갔다.

그때 허탁이 지은 표정은 말 그대로 오물을 씹은 표정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허탁은 시인 신경림을 자신의 구역내에서 아무런 불편이 없도록

갖은 꾀를 써 뒤를 보아주었다. 그 후 신경림은 감옥으로 넘겨져 기소유예 판결을 받고 29일 만에 출소하게 되었다.

이렇듯 그가 겪은 십 년 세월은 산 너머 산이었고 강 건너 강이었다.

당시의 절박했던 상황을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50년대 말 60년대 초는 내게 있어 참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먹고산다는 일이 얼마나 힘드는 일인가를 이때 비로소 절감한 셈이다.

먹고살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고 못 할 것이 없다는 심정이었는데, 그 무슨 일도 그다지 쉽사리 내 차례에 돌아오지 않았다‥‥‥이때 내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이 증오심뿐이었다.


이 증오심만이 나를 지탱해 주고 있었다. 나는 모든 사람들을 미워했다.

잘 사는 사람을,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학식 있는 사람을 미워했다.

가난한 사람을 미워하고 무지 한 사람을 미워했다.

더욱 미워한 것은 이른바 시인들이었다. 나는 이들의 성실성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얘기는 전부가 거짓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이것은 다분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이 이들에 대하여 갖는 질투심에서 연유함은 물론이었다.


나는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녔다. 광산이나 공사장에서 일하는 친구를 찾아가 얹혀지내기도 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들과 함께 노동을 하고 싶었으나 노동을 감당할 만한 체력이 되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이 세상에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주막 앞에 자전거를 받쳐 놓고 늦도록 막걸리를

마시는 면서기 친구가 더없이 부러웠다.

그러나 이 떠돌이 생활은 내가 스스로

정리할 수 있는 어떤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 무렵에 내가 접촉하게 되었던 많은 사람들은 모두 내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

그들은 몇 가지 서로 공통되는 점을 가지고 있었다.

한결같이 가난했고, 세상에 대 해서 원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복수심과

체념으로 조금씩 비뚤어져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전혀 그들 탓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로지 역사의 피해자요, 체제적 모순의 산물이었다.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받은 충격은 컸다. 내 속에서 들끓던 중오심은 마침내

어느 한쪽을 향해 집중되었다. 그러자 나는 차츰 정신적으로 안정되기 시작했다.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 중 '내 시의 이야기' ●


"06 서울로 재입성, 제 2의 문단시절" 이어집니다.



https://blog.naver.com/munhakwan/223168293466


Z2ohRfI1m7aznLMo3k0sdy-WEgE.jpg

신경림.png
442417140_1104612747275545_3243551225146395731_n.jpg
443716843_2732031023650948_4652342180790595410_n.jpg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