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흐르고 시대는
2024년 5월 22일 아침에 신경림 시인과 성춘복 시인이 떠나셨다
부처님 오신 날, 스승의 날, 일주일 뒤에 보름달을 따라서 가셨다
우리들의 큰 스승이 떠나가셨다 나에게 이름표를 달아 주신 시인
신경림 시인처럼도, 성춘복 시인처럼도 나는 지금껏 살지 못했다
나는 지금껏 시인으로 살지 못하고 오직 생존만을 위하여 살았다
나는 혈당측정기 포장지를 뜯는다 택배를 신청한 아들은 입원했다
오른쪽 배가 아파서 맹장염인 줄 알고 찾아갔다가 입원을 하였단다
처음 들어보는 게실염이란다 나의 혈당을 측정하니 106이 나왔다
혈당 검사지 뒷면을 보니 혈관처럼 전선이 숨어있다 아, 전류구나
혈당은, 핏속을 지나는 전류를 측정하여 숫자로 보여주는 것이구나
우리들이 함께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움직여주는 포도당은 무엇일까
우리들의 시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우리들의 세상의 혈당을 잘 조절할 수 있을까
나는 이제라도 스승님이 주신 이름표에 맞게 시인으로 살 수 있을까
세월은 오늘도 쉬지 않고 흘러만 가고 시대는 오늘도 잘도 넘어가는데
가난하게 살아서 부자로 떠난다
신경림 시인께서 오늘 아침에 떠나신다
사람들의 숲에서 별들의 숲으로 가신다
저승길에서는 무엇을 타고 가는 것일까
리무진, 꽃상여, 조랑말, 낙타, 아니면 배
나는 또한 무엇을 타고 뒤를 따라서갈까
기차를 타고 떠날까 버스를 타고 떠날까
아니면 쉬며 쉬며 가더라도 걸어서 갈까
인간은 기어가다 일어나서 걸어서 간다
우리들을 걸어가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뼈와 뼈를 연결하여 일으켜 세워주는 것
뼈와 뼈를 움직여서 걸어서 가게 하는 것
우리들이 살아 있다는 것은 움직이는 것
그렇다면, 죽음으로 가는 길은 무엇일까
스스로 움직일 수 없어 실려가게 되는 것
한 자리에 너무 오래 누워서 머문다는 것
근육이 할 일이 없어져서 떠나버리는 것
살도 피도 뼈도 할 일이 없어져버리는 것
그렇게 내 몸이 나를 버리고 떠나가는 것
그렇게 내 꿈이 나를 버리고 떠나가는 것
참으로 아름다운 신경림 시인께서는
늘 가난하게 살으셔서 부자로 떠나신다
살아서 언제나 부자로 살았던 사람들은
죽어서 저승의 길에 들어서면 가난해진다
살아서 부자로 살까 죽어서 부자로 살까
살아서 시간이 길까 죽어서 시간이 길까
나는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만 할까
신경림 선생님께서 주신 쪽지에
병원 다녀와서 잠시 누웠는데
신경림 선생님의 꿈을 꾸었다
우리 집에 선생님께서 오셨다
나는 컴퓨터를 하고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컴퓨터를 요청하셨다
더 좋은 아들 컴퓨터를 말씀드렸다
선생님과 함께 아들 컴퓨터를 켜는데
발로 자꾸만 스위치를 밟아서 끄셨다
컴퓨터는 켜지지 않고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쪽지 한 장 주시고 떠나시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 집 천장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눈에서도 내렸다
우리 집은 아파트인데 왜 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꿈속을 빠져나왔다
꿈 밖에서 다시 생각하니 곡성집 같다
주신 쪽지 내용이 다시 보이지 않는다
나는 왜 번번이 이런 실수를 하는 것일까
나는 왜 일상생활이 가장 어려운 것일까
■ 시인 이재무가 쓰는 '신경림'
01 거제와 구례에서 연하리 상입장까지
시인 신경림은 1935년 4월 6일 충북 충주군(지금의 중원 군) 노은면 연하리 상입장 470번지에서 4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주 신 씨들이 전남 구례와 경남 거제에서 충주군 노은면 보련골로 이주해 터 잡고 집성촌을 이루며 산 지 무려 이백여 년 만에 그가 태어난 것이다. (훗날 그는 이것을 근거로, 그의 문우나 후배, 제자들과 방담을 나눌 때 아주 신 씨는 애당초 지방색이 있을 수가 없었다고 말하고는 하였다).
당시 전남 구례에서 터를 옮겨온 아주 신 씨들은 대부분 직계들로서 연하리 보련골에, 일부 방계가 연하리 상입장(장터 윗동네)에 무리 지어 살게 되었는데, 그의 가계는 아주 신 씨들 가운데 직계 아닌 방계로서 연하리 상입장에 자리 잡은 십여 호 가운데 하나였다.
그의 가계의 승계는 일반 가계의 승계와는 좀 다른 특이한 면이 있었다.
조부가 증조부에게 양자로, 증조부가 고조부에게 양자로, 고조부께서는 구례 지방에서 양자로 들어와 가계를 승계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그의 가계는 양자에서 양자로 대를 이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던 것이 그의 할아버지 대부터 명실공히 순수 혈통만으로 대를 잇게 되었다. 그러므로 시인 신경림은 그 순수 혈통의 3대째를 잇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조부와 그 형제분들은 본래가 학자들이었는데 그들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거개가 다 개화주의자들이었다. 일찍이 그들은 한글 전용을 주창하였고 농촌계몽운동을 벌이는 등 개화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대단하였다(여담 같지만 훗날에 시인 신경림이 시작(詩作)과 여타의 수려한 산문에서 모국어에 대한 남다른 애착과 노력을 보여 준 것은 어쩌면 이러한 그의 가계사의 유전학적 영향과도 무관 치는 않을 것이다).
또한, 당시 아주 신 씨 집안의 향학열은 인근 타성바지들의 부러움과 시샘을 눈 따갑게 받을 정도로 그 열기가 자못 뜨겁고 유난스러웠다고 한다.
예컨대 시인 신경림의 집안 어른들 가운데에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사람만도 여럿 되었고, 국내의 유수 대학이나 전문대 정도는 한 집에 한두 명 이상 가가호호 거의 대개가 다니고 있을 정도였다고 하니, 이만한 학구열은 사실이지 요즘 세상에도 보기가 드문 예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학구열이 여느 타성바지에 비해 뜨겁고 유난스러웠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인즉, 그것은 아마도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아주 신 씨들 특유의 학문적 가풍의 내력 탓이기도 했지만, 당시 전남 구례와 경남 일원 등지에서 이주해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신 씨들에게는 타관 객지나 진배없는 충주에서의 신산스러운 삶 속에서, 타성바지로부터 행여 있을 수 있는 괄시나 냉대를 받지 않겠다는 어떤 심리적 압박감 내지는 오기에 가까운 의지가 유형무형으로 작용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어디서 듣도 보도 못했던 타성바지가 이주해 옴으로써 토박이들은 토박이들대로의 위기의식 비슷한 것이 작용하여 텃세와 가시 같은 눈총을 보냈을 것이고, 아주 신 씨들은 아주 신 씨들대로 여간한 신고를 하지 않고서는 객지에서 자신들의 삶의 뿌리를 내린다는 것이 생각처럼 그렇게 수월치만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아주 신 씨들은 본토박이들에 비해 더욱 극성을 부려야 살 수 있게 되었을 것이고, 학구열 또한 그들이 부려 댄 극성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어떻게든 간에 아주 신 씨들은 그들 특유의 바지런함과 극성에 가까운 학구열 덕택으로 본토박이들에게서 이렇다 할 해코지나 무시를 당하지 않고서도 넉넉히 뿌리를 내려갈 수 있었다.
구례와 경남 일원에서 이주해 온 그들의 살림살이는 세월의 물살이 장단 완급으로 흐르면서 점차 눈에 띄게 불어나갔다.
그만큼의 결실이 있기까지 그들이 바친 신산의 노고와 근면이 결코 적지 않았음은 물론이었다.
그의 부친(申泰夏)에서는 충주농업학교를 나와 농사를 짓는 한편 면서기, 농협서기 등을 지내다가 후에 동생 신태은(申泰銀, 신경림의 삼촌으로 그는 6·25 발발 시 시류에 휩쓸려 희생을 당한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이었고 신경림의 나이 열다섯 살이었다고 한다.
당시 소년 신경림은 그의 삼촌의 억울한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았고, 후에 그때 겪은 아픈 경험을 살려 시「폐광」으로 옮겨 놓는다)과 함께 광산에서 덕대(광산의 하청업자), 연상(분광주) 등으로 일했으며, 금방앗간과 금분석간도 경영하였다. 그러다가 신경림의 나이가 열아홉에 이를 즈음에는 논을 판 돈으로 약사와 함께 동업하여 약방을 경영하기도 하였으나 크게 실패하고 말았다.
그의 부친은 일보다는 술과 친구들을 더 좋아하였고(그의 부친은 병이 들어서도 사람을 좋아해서 누가 찾아오기라도 하면 불편한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안 돌아가는 입으로 세상의 온갖 얘기를 하고 싶어 했다고 한다.
훗날 그는 세상사람들의 얘기를 들어주는 작업에 몰두하게 될 때, 그 당시 아버지의 얘기 상대가 되어주지 못한 일이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다고 한다),
한때는 마작에도 손을 대는 바람에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다.
시인 신경림이 태어난 이듬해(1936년) 첫째 동생(현재 서울공대 졸업 후 워싱턴에서 사업 중)이 태어났고, 그 뒤 이 년, 삼 년 터울로 하여 둘째(현재 충주고를 졸업한 뒤 남해화학 근무), 셋째 (현재 홍익대와 미국 조지아 대학원 졸업 후 영국 뉴캐슬리 대학 동양학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재직) 등이 태어나기 시작하였다.
어느새 신경림은 4남 2녀의 장남이 되어 있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집안일보다는 바깥으로 더 출입이 잦으신 아버지가 위태롭게 보였다. 반면에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산처럼 믿음직스러웠고 신뢰가 갔다.
그의 모친은 곡산 연 씨로 충북 괴산군 도안면에서 태어나셨는데, 그 당시 외조부께서는 군내에서도 손꼽히는 부자였다.
그러나 독립운동 자금을 대어주다가 몰락하여 뒤에 서울로 쫓기듯 이사를 가게 되는 불행을 겪게 되었다. 본디 상당한 재력가이신 데다가 학식과 덕망을 고루 갖춘 외조부의 훈육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모친께서는 일찍이 한학에 밝으셨고 실천궁행에도 빈틈과 소홀함을 보이지 않으셨다고 한다.
요컨대 그의 부친께서는 다소 즉흥적이고 격정적인 면모가 있으셨던 것에 비해 그의 모친께서는 사리가 분명하셨고 이지적이셨으며, 인정 또한 후하여 인근에서 칭송이 자자하셨다 한다.
어릴 적 신경림은 자연, 매사에 맺고 끊는 것에 관대하셨던 부친에게서 보다는 의지와 정감을 속옷과 겉옷으로 적절히 껴입으셨던 모친에게 더 기대어 듣고 보고 배웠다고 한다. 이것으로 보아, 훗날의 신경림의 체질화된 내면의 양면성, 즉 떠돌이 기질의 두루마기 속에 감춰져 있는 냉철한 과학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은 아마도 짐작건대 이러한 그의 부친과 모친의 천품을 선험으로 물려받은 데서 온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신경림에게 음우의 영향을 끼친 분으로는 그의 부모 외에 또 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고향에서는 팔방미인으로 널리 재명을 빛낸 분으로, 그와는 가까운 친척뻘 되는 당숙이었다.
피리를 잘 분다 해서 '신퉁수'로도 불리었던 그의 당숙께서는 목불식정의 일자무식자였으나, '신언서판'이라는 또 다른 별명에 값을 할 만큼 인물이 좋고 말재간 또한 천의무봉의 솜씨였는지라, 그분 주위에는 언제나 된장 주머니가 매달린 저수지 속 소쿠리에 새우 떼가 모여들듯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람들이 들끓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기분에 따라 웃겼다, 울렸다 하는 말솜씨가 가히 금메달감이라 한때는 읍내 악단 단장까지 지낼 정도였다.
또한 그분은 인간문화재로 불리었던 제3의 별명이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연극에도 소질을 보이었고, 소리에도 능했다.
여기에 그는 그 방면의 재질 있는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노름 또한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수준급으로서 건달기가 다분한 타고난 쟁이로서의 낭만주의자였다.
그분은 이러한 기질 탓으로 직업도 다양했다. 한때는 전국을 누비는 장돌뱅이였다가 그것이 시들해질 만해서는 뱃사공 노릇과 뗏목도 탔고, 그것 또한 정들 만 해지면 광산으로 들어가 광부로 일하는 등 어느 한 곳에 진득하니 안주하질 못했다.
역마살이 끼었는지 그는 툭하면 떠났고, 떠났는가 싶으면 금세 돌아오고는 하였다.
피의 내림 탓이었을까?
어린 신경림에게는 어른들의 골 깊은 한숨과는 달리 그런 당숙이 안돼 보이기는커녕 민들레 풀씨처럼 자유로이 세상을 유영하는 삶이 부러울 뿐이었다.
다만 납득하기 어려웠던 것은 그렇게 많이 직업을 옮겨 다니고, 재주 또한 출중했던 그분께서 평생을 가난의 족쇄에 묶여 허덕이며 사는 모습이었다.
아무튼 어린 신경림은 예(藝)에 능하고 재담이 우렁이 넣고 끓인 장국맛 같던 당숙이 좋았다.
어른들 틈에 끼어 귀를 세워 엿들었던 그분의 세상 이야기를, 가슴 깊숙이 달아 놓은 그만의 이야깃주머니에 꽁꽁 다져 챙겨 놓고는 행여나 이야기가 발이 달려 있어서 달아날까 봐 노심초사 몇 번이고 조바심으로 열린 앞가슴의 옷섶을
여미었던 기억은, 지금에 와서 떠올려도 낙숫물 소리처럼 생생하기만 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린 가슴에 어른을 담고 앉아 그가 불어 주는 애조 띤 피리소리를 들으며, 볼의 습자지를 촉촉이 적셔 오는 눈물 줄기를 조용히 훔쳐내고는 하였다.
피리의 음향에는 날개가 달려 있었는데, 어린 신경림은 그 날개에 자신의 몸피 작은 몸을 얹어 마을 밖 먼 길을 떠나고는 하였다.
어찌 들으면 청승맞고 또 어찌 들으면 한스럽던 그 울음의 마디마디에는, 지금에 와서 생각건대 다름 아닌 당숙의 신산스러웠던 삶의 이력과 역정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다음 글, "02 노은 국민학교에 입학하다"로 계속 이어집니다.
■ 시인 이재무가 쓰는 '신경림'
02 노은국민학교에 입학하다.
조국이 일제의 사슬에서 벗어나기 이 년 전인 1943년, 신경림은 여덟 살의 나이로 노은면의 노은국민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때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본격적인 대륙침략의 계기를 열었던 일본이 중일전쟁과 마침내 태평양전쟁(1941년)을 일으키며 침략의 야욕을 확대시켜 나가면서, 철저한 파쇼 군국주의 체제로 한반도를 유린시켰던 시기였다. 말하자면 그 시기의 한반도는 민족 구성원 전체가 파쇼 군국주의 체제의 희생물이 되어 광란 속에 휩싸여 들어갔던 말 그대로 광기의 시절이었다. 그 세월 속에서 많은 지식인들은 절망과 탄식을 넘어 자의로 타의로 굴절되어 갔으며 또 변절하여 갔다.
파쇼 군국체제의 광기 번뜩이는 약탈과 수난이 그가 살고 있는 노은면이라 해서 비켜 갈 리 만무했다.
그곳 또한 엄연히 군국체제 본국, 즉 내지의 식민지로서의 하나의 행정 구역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곳 노은면이야말로 군수공업 원료인 광물의 산지였던 까닭으로 다른 그 어느 곳보다도 더 많은 수탈 대상 지역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어지러운 혼돈과 무질서의 세월, 암담한 조국의 현실이 어린 신경림에게는 뼈가 시리게 인식되지는 않았다. 아직 세상물정을 제대로 이해하기엔 그의 나이가 턱없이 모자란 탓이었다.
어렸을 때 내게 가장 인상이 깊었던 일들은 대개 광산에 관계되는 것들이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집 뒤 언덕길을 지나가던 밤 대거리들의 칸델라 불빛, 장날이면 으레 싸전 뒤 밤나무 아래서 벌어지던 광부들의 싸움질, 콩을 팔러 집으로 찾아오던 광부의 아낙네들의 억센 사투리, 어머니를 따라가 들여다본 단칸 움막 속의 흐린 십 촉 전등, 금방앗간에서 흘러와 냇물바닥에 깔리던 복대기흙. 행정상으로는 같은 마을이었으나, 광산은 우리 집에서 2킬로쯤 산속으로 더 들어가서 있었다.
나는 가끔 동무들과 어울려 광산엘 갔고, 버력 더미를 기어올라가 시커먼 금점굴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때 온몸에 감기던 공포와 전율을 나는 지금껏 잊지 못하고 있다. 갱구 가까이의 언덕에는 빨간 양철지붕을 한 이 층집 광산사무실이 있었는데, 사무실 뒤는 일인(日人) 기사들의 관사였고, 그 한 기사의 아내는 우리 학교의 교사였다. 키가 작달막하고 은테 안경을 쓴 그 여교사는 매우 상냥했다.
여선생 앞에서 미리 주눅이 들어 주뼛대는 우리들에게 번번이 요깡이니 미루꾸니 하는 귀한 과자들을 나누어주었다. 나는 여선생에게 과자 얻어먹은 얘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일로 삼촌에게 매를 맞은 일이 있기 때문이다. 왜 이 상냥한 여선생과 일인 기사들을 삼촌은 반드시 죽일 놈들이라는 말로 부르는지 어린 내게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마음속에서 광산이라는 것이 그토록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기실 삼촌으로 해서였다. 전쟁 말기에 삼촌은 광산에서 광부로 일했는데, 그 얼마 뒤에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이어 광산은 폐쇄됐다. 해방이 되면서 광산은 전성기를 이루었다. 북으로부터 피난민, 만주 등지로부터의 귀환동포로 광산은 빈민의 소도시로 팽창되었다. 다닥다닥 붙은 움막들이 몇백 채에 술집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진종일 청승스러운 유행가 가락이 끊이지 않았다.
이때부터 우리 집은 본격적으로 광산과 맺어지기 시작했다. 삼촌은 자본주를 끌어들여 덕대로서 분광(分鑛)의 경영에 참가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아버지마저 연상(鉛商)이 되어 광산에 손을 대게 되었다. 광산과 우리 집과의 관계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 화약상, 금방앗간, 금분석 등으로 깊이 빠져 들어갔다. 명절이 오면 이십여 명의 광부들이 우리 집에 모여 돼지를 잡고 순대를 삶으며 웅성대던 모습이 아직도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 중 '내 시의 뒷이야기'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학교에 다니는 것이 어린 신경림은 즐거웠다. 그곳에 가면 새로 사귄 동무들이 있었고 수선화처럼 청초한 여선생님이 있었다. 신경림은 어깨에서 허리로 비껴맨 책보 속 필통 안에서 덜컹대는 몽당연필에 발장단을 맞추며 등하교에 열중하였다. 까까머리 동무들과 함께 해찰하면서 반공중으로 한 획 한 획을 흘림체로 흘리듯 나는 기러기떼에 사정없이 돌팔매질을 하기도 하고, 남의 집 채마밭에 들어가 무서리도 일삼으며 지내기도 했던 어린 신경림은, 간혹 어느 날에는 그런 동무들로부터 일부러 뒤처져 저 혼자만이 공상의 언덕에 올라 몸과 마음을 문이기도 하였다.
공상의 팔 할은 바람에 정처 없이 날아다니는 검불처럼 목계 강가를 배회하는 거였다. 목계야말로 어린 신경림의 마음속에 깊게 자리 잡은 이상향의 마을이었다. 간혹 당숙들과 삼촌들이 주고받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어깨너머로 훔쳐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들의 말이 과장이 아니라면 그곳은 이 지금껏 가장 아름다운 낙원임에 틀림없었다.
또한 그곳에 사는 사람들 역시도 가장 선하고 고운 사람들임에 의심이 있을 수 없었다. 언제든 기회만 주어진다면 그곳엘 꼭 가고 말리라. 어린 신경림은 충치로 썩어 가는 어금니를 질끈 깨물고는 하였다. 죄 아닌 선(善)한 바람이 깊어서였을까. 그의 간절했던 소망과 기대가 예상보다 훨씬 빨리 이루어졌다. 학교에서 그곳으로 소풍을 갔던 것이다. 하긴 그곳 말고는 걸어서 소풍을 갈 만한 곳도 달리 없었다.
어린 신경림은 자신의 소원이 뜻하지 않게 금세 이루어진 것이 무척 기뻤다. 생각 같아서는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려 만세라도 불러 대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숫기 없는 그로서는 속으로만 그 기쁨을 맛볼 뿐이었다. 본래 잠이 많은 그였지만 소풍 전날은 설렘 탓으로 도통 달아나는 발 빠른 잠을 잡을 수가 없었다. 훗날 그는 그곳에서의 인상기를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어린 한 시절을 남한강 가에서 보낸 나로서는 남한강의 삶과 정서를 한 편의 시로 쓰고 싶은 욕망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이다. 한데 나는 남한강 하면 먼저 목계라는 한 강마을이 떠오르고, 목계 하면 남한강 전부의 모습이 떠오르니 이상한 일이다. 물론 목계는 남한강에서 더없이 중요한 나루로, 옛날 이곳에서는 해마다 정월에 강운과 강을 끼고 사는 사람들의 안녕을 비는 당제가 열렸으며, 그 무렵 사방 이백 리 안팎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줄다리기를 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고장이 남한강에서 유일하게 강장이 서던 나루라는 점이다. 서울에서 뱃길을 타고 소금배 나 장사배가 오면 으레 목계나루에서 짐을 부렸고, 이곳에서 소금이며 생선이며 하는 물건들은 달구지로 옮겨져 새재와 박달재를 넘어 충청도·강원도·경상도 각 지방으로 퍼졌으며, 소금배와 장사배는 달구지에 실려 온 내륙 산물들을 바꾸어 싣고 내려갔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강벌에 장이 섰으니 그것이 목계장이다. 이 장은 닷 새에 한 번씩 서는 것이 아니라 소금배가 닿는 아무 때나 섰으며, 하루로 끝나지 않고 한 번 서면 닷새씩 이레씩 갔으며, 장사꾼들은 장을 끌어 이문을 높이기 위해서 난장을 벌이고 씨름판을 벌였다. 물론 지나간 시대의 일로 지금은 모두 얘기로 만 남아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내가 목계에 특별히 집착한 것은 이런 이유들 때문만은 아니다.‥(중략)‥목계로 소풍을 갔을 때의 감동도 잊지 못한다. 강에 바짝 다가붙은 이층 집들, 즐비한 가게, 차와 사람들을 실어 나르던 너벅배, 강가의 솔밭‥‥‥, 커서도 나는 종종 목계를 찾아갔었는데, 담배 수납철의 떠들썩하던 풍경도 여간 인상적이 아니었다. 집집마다 젓갈 장단에 노래가 끊이지 않았고, 담배를 바치고 돈을 주머니에 넣은 농사꾼들은 호기 있게 술주정을 했다. 내겐 어쩐지 이것이 바로 한강의 삶의 모습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뽑은 나의 시와 이야기' 중에서
이상 그의 술회에서 보았듯 목계는 어린 신경림의 마음의 천에 아름답고 풍요로운 풍광으로, 나아가 사람들의 애환이 씨줄과 날줄로써 섬세히 수놓아진 마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그곳은 그가 장년이 된 이후에 떠올렸을 때도 마음의 강물 속으로 까닭 모를 설렘이 물결치는 그런 곳임을 알게 되었다. 소풍을 다녀온 이후 어린 신경림은 한동안 시도 때도 없이 불쑥 얼굴을 내밀곤 하는 목계의 모습에 시달려야 했다.
강둑을 따라 한여름날의 밤하늘에 핀 별꽃보다도 더 많이 지천으로 핀 풀꽃들의 가녀린 몸짓들이며, 태어나 처음 구경한 잘 다듬어진 이층 집들이며, 눈요깃감만으로는 너무 벅찼던 가게, 그 이름만으로도 설렘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너벅배, 아침 조례 때의 전교 어린이들의 줄 서기보다 더 나란히 줄지어 서 있던 소나무들의 행렬, 정선 쪽으로부터 뱃길을 타고 내려오는 소금배와 장사배, 그들이 불러 대는 강의 하류처럼 낮고 축축한 가락 등등.
그는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와 비쩍 마른 그의 앞가슴을 헤쳐대는, 집요한 목계에서의 유혹의 여러 모습들을 떨쳐 내려 크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댔지만, 이틀째 감지 않은 그의 머리에서 비듬만 떨어졌을 뿐 그 모습들과의 싸움에서 번번이 두 손을 드는 것은 그의 의지였다. 그만큼 목계에서 받은 인상은 강렬했다. 점차 어린 신경림은 부지불식간에 공책 한구석 여백을 이용하는 시간이 늘어갔다. 그의 뇌리에 각인된 목계의 풍광을 뜯어 내 공책의 여백 속으로 옮겨 놓는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훗날 우리 문학사에 그 이름자를 굵은 획으로 남길 시인의 시작(詩作)은 이렇게 시작이 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날처럼 몽당연필을 크레용 삼아 목계에서의 단상을 치고 있는데 누군가 그의 어깨를 툭 쳐오는 것이었다. 화들짝 놀라 뒤돌아보니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어린 신경림의 손 끝에 눌려 있던 공책을 빼어 들었다. 너무도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서 당혹한 신경림이 어쩔 줄 몰라 마음을 죄며 그저 두려움에 떨고 있었는데, 아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선생님은 고함이나 호령 대신 만면에 샘물 같은 미소를 띠며, 은쟁반 같은 손으로 밤송이처럼 까슬까슬한 그의 머리를 몇 번이고 쓰다듬는 것이 아닌가.
"얘, 이것 정말 네가 쓴 거니?"
"네."
어린 신경림은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픈 심정이었다.
"야, 너 참 대단한 아이로구나! 제법 잘 쓴 시인데 그래."
선생님은 한 손으로는 계속 어린 신경림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시를 받쳐 들고 몇 번이고 소리 내어 다시 고쳐 읽고 있었다. 아이들의 부러움과 시샘이 섞인 시선이 신경림의 얼굴에 따갑게 꽂혀 왔다. 까닭 없이 가슴이 울렁거렸고 눈물 한 움큼이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목울대를 치밀어 왔다. 그는 작은 입을 더욱 앙다물고, 찔금 눈을 감아 버렸다. 이 일이 있고 난 이후 소리소문 없이 어린 신경림은 교내의 유일한 시인이 되었다.
간혹 짓궂은 아이들이 '이봐, 신 시인 어쩌고' 하면서 그를 놀려대기도 하였지만 그는 아이들의 악의 없는 그런 놀림이 그리 귀에 거슬리지만은 않았다. 막연히 어른이 되면 시인이 되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그는 더욱 악착같이 책을 잡았다. 시인이 되려면 상급학교에 진학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시인이라고 해서 반드시 높은 공부를 해야만 하는 법은 없었지만 그때는 꼭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어린 신경림은 재능을 인정받은 시 때문에 좌절감에 빠지게 되었다.
도에서 시행하는 어린이 글짓기 대회에 그도 다른 어린이들과 함께 작품을 출품했는데, 그만 그를 포함해 그를 아끼던 동무들과 선생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불운하게도 장원을 놓쳐 버린 것이었다.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누구도 그의 장원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그가 그간에 보여 준 시적 재능은 자타가 공인할 만큼 출중한 것이었다. 도교육위원회에서 심사 결과를 통보해 오기를 장원이 아무개라는 이름자는 밝히지 않고 장원이 노은국민학교 차지라고만 알려와 그 장원이 다름 아닌 신경림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막상 시상식날 도에서 보내온 봉투를 열어 보니 장원은 그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산지기집 아들이었다. 노은국민학교에서 가장 시 잘 쓰는 어린이 시인으로 통했던 신경림의 장원 낙방으로 동무들과 선생님이 받은 놀라움은 컸다.
이때 신경림이 받은 충격은 실로 적지 않았다. 모닥불이 끼얹힌 듯 얼굴이 달아올랐고, 만취한 어른처럼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렇잖아도 길게만 느껴졌던 아침 조례 시간은 그날따라 더욱 길고 아득했고, 그만큼 고통의 길이도 길어졌다. 다시는 시를 쓰지 않으리라 그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단호한 결심은 고등학교에 들어가 장맛비에 흙담이 무너지듯 여지없이 깨지고 만다.
국민학교 시절 신경림과 주로 어울렸던 동무들은 하나같이 별 볼 일 없는 집의 아들들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그가 생래적으로 잘나고 똑똑해 뵈는, 또는 그런 것을 장기로 삼는 친구들과는 애당초 뜻이 맞지 않았던 성미 탓이었을 것이다. 그와 비교적 가까이 지냈던 친구들은 모두가 사는 게 고만고만한 집의 자식들로서, 이를테면 장터에서 아버지가 잡화점을 하는 강덕식과, 술집 아들 이상옥, 여인숙집 아들 허태순, 국수틀집 아들 김영수 등등이었다. 이들과의 교우는 장성하기까지 굴곡 없이 이어지는데 이들 가운데 이상옥은 죽었고, 허태순과는 지금까지도 허물없이 만나 어제와 오늘을 넘나들며 술과 이야기를 즐기는 편이다.
신경림은 특히 이상옥과 허태준하고는 혈육처럼 가깝게 어울렸다. 굳이 이들과 더 친했던 이유를 들라 하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사정 때문이었다. 당시 신경림이 자란 곳은 농사에만 전적으로 생계를 의존하는 농촌이 아니었다. 가까운 곳에 금광이 있어 그곳에 생활의 일부를 투자할 수 있었던 그런 농촌이었다. 장이 서면 인근의 농민들로 붐볐지만 주로 큰 손님들은 금광 사람들이었다. 농사에 비해 벌이가 좋았던 그들은 그만큼 씀씀이도 헤펐다.
그런데 본래 그가 살던 동네는 장터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는 그의 마을에서 좀 떨어진 장터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유달리 호기심이 강했던 그는 장터가 자꾸만 그리워졌다. 그는 장날이면 어떻게든 핑계를 만들어 장터를 쏘다녔다. 쏘다니다 지치면 그는 거기에서 주막을 하는 친구 이상옥의 집에 가서 쉬곤 했다. 주막은 언제나 대만원으로 붐볐다. 그는 친구 이상옥과 함께 주막의 마루에 앉아 술꾼들이 순서 없이 털어놓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연애 이야기, 죽음에 관한 이야기, 빨치산 이야기 등속을 들을 수 있었다. 모두가 처음 듣는 흥미진진한 것들이었다.
어린 신경림이 친구 이상옥과 친할 수 있었던 이유로는 이것 말고도 또 하나가 더 있었다. 어릴 적 신경림은 겁이 많았다. 그런 그가 하루는 이상옥과 사소한 말다툼 끝에 주먹질이 오가게 되었는데, 어린이 깡패로 소문난 이상옥에게 힘이 달린 신경림이 나중에는 일방적으로 맞게 되었다. 분한 마음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 그는 다음 날 이상옥을 불러 내 다시 싸움을 걸었다. 그러나 결과는 어제와 마찬가지였다. 그 다음날 그는 또다시 이상옥을 찾아갔다. 그렇게 엿새째를 찾아가니 그만 이상옥은 질려서 걸음아 나 살려라 달아나기에 바빴다. 수수밭으로 도망가다 넘어진 이상옥은 신경림이 씩씩거리며 다가오자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두 손을 가슴께로 올려 빌고 빌었다. 어린 신경림의 쇠가죽처럼 질긴 투혼이 그만 이상옥을 무릎 꿇게 만든 것이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이상옥은 신경림의 말이라면 죽는시늉을 하였고, 저 스스로 누구든 신경림에게 손찌검을 못 하도록 보호자를 자처하였다. 이렇게 해서 겁 많고 순박했던 신경림은 그들 또래에서 가장 힘이 세었던 깡패를 자신의 수족으로 부릴 수 있게 되었다. 또 절친했던 친구로 허태순이 있었는데 그 아이는 그의 어머니가 그를 낳은 후 개가를 해서인지 늘 우울과 우수를 얼굴에 달고 다녔다. 또한 같은 이유에서였겠지만 다른 또래들에 비해 제법 숙성한 티를 내고 다녔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는 허태순이 자신의 집 모퉁이에서 남몰래 훌쩍거리고 있는 것을 신경림이 보게 되었다. 그 모습을 본 신경림은 왠지 가슴 한구석에 슬픔의 물방울이 괴어오름을 느꼈다. 그날 이후로 그는 허태순에게만은 싫은 말 한마디 귀찮은 표정 하나 짓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둘은 누구보다 서로를 깊이 이해하는 사이로 발전해 갔다. 어릴 적 신경림을 논하는 자리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그와 방물장수가 맺은 인연이다.
장사 장사 황아장사
걸머진 게 무엇인가
자기네들 굴레다리
가시네들 낭자댕기
늙으신네 쌈지끈
선비네들 부채끈
도령네들 머리댕기
이 노래는 내 어렸을 적 동네에 황아장수가 들어오면 뒤따라 부르던 노래다. 이 무렵에는 일제 당국의 강제와 극심한 물자난으로 장도 폐지되고, 장터에 단 하나 남아 있는 잡화 가게는 배급표가 있어야만 드나들게 되어 있었다. 이런 판국인데도 용케 우리 동네에는 종종 찾아오는 황아장수가 있었다. 엄장이 큰 늙은이였는데, 그 엄장에 비해 황아짐은 장난감처럼 작았다. 그 안의 물건도 실로 보잘것없었다. 나무를 깎아 만든 목그릇이며 목숟갈, 청올치로 꼰 노끈, 나무열매나 풀잎을 재료로 한 가내 제조의 환약, 헌 한지를 누덕누덕 발라 만든 부채, 이런 것들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도대체 장사라는 사람을 볼 수 없는 세상이니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다. 동네에 들어서면 그는 으레 늙은 느티나무 아래 짐을 풀었다. 그리고 입담과 넉살로 아낙네들과 아이들을 불러모았다. 그가 물건을 팔아 가지고 가는 것은 돈이 아니라 보리쌀이나 좁쌀이나 콩이었다.
그는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해서야 짐을 챙겨 돌아가는 것이었는데, 우리들 아이들은 이때 으레 곳집 뒤까지 그를 따라갔다. 거기서 그는 뒤돌아서서 우리를 향해 소리치고는 했다. "야, 이놈들아! 그만들 가거라. 어둡는다." 그리고는 그 큰 키를 구부정하게 하고서, 더 이상 우리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걸어갔다. 곳집서부터 봉곳한 봉우리가 둘로 갈라진 고개까지는 한 오 리는 되었다. 해 는 바로 그 고개로 넘어가고 그 위 하늘에는 발갛게 놀이 서려 있었다. 고개까지는 곧은 한길이었다.
황아장수의 새카만 뒷모습은 좀체 사라지지 않은 채 빨간 놀을 배경으로 한길에 박혀 있었다. 까마귀가 몇 마리 둔중한 소리로 울면서 황아장수를 따라갈 뿐이었다.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중 '내 시의 뒷이야기'
어린 신경림은 방물장수가 좋아 그를 따라 삼사십 리 이웃장까지 따라다녔다. 그 일 때문에 부모님께 꽤나 꾸지람을 듣곤 했지만 좀처럼 그의 바람기를 잠재울 수가 없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그의 동네로 들어오는 여자 방물장수들이 그의 집 앞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 노독을 식히고 있으면 그들을 그의 집으로 안내해 왔다. 주로 문경이나 영주 쪽에서 참빗, 비누, 대나무 소쿠리 따위를 짊어지고 온 사람들이었다. 할머니나 어머니도 마음이 너그러우신 편이라 한번 집에 든 사람을 내치진 않았다.
그들은 밥값이나 잠자리값 대신에 자기들이 가지고 다니는 물건을 주기도 하고 세상에 떠도는 재미있는 얘기도 들려주었으며, 흥이 나면 노래도 부르곤 했다. 어린 신경림은 벌써 이렇게 해서 각 지방의 많은 민요를 접할 수가 있었고, 그의 핏속을 흐르는 떠돌이 기질의 싹을 틔워 나갈 수 있었다. ●
"03 충주사범학교 시절" 이어집니다.
사랑은 나비처럼
하이고
보는 내가 더 지친다
한 시간 넘게
이러고 있다
언제 끝날지
나는 아직 모른다
2016년 5월 25일 · 제주도 서귀포 ·
15 보리수 아래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서 깨달으셨다
신의 시대에 과학자가 되셨다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처(處)·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
나는 당신으로 말미암아 있고
당신 또한 나로 말미암아 있다
나는 이어도공화국
보리수 아래서
연을 본다
연꽃만 보아도
연근까지 다 보인다
나는 당신으로 말미암아 없고
당신 또한 나로 말미암아 없다
18 꽃붓
백련 씨앗을 받아 심었다
연밥의 종소리를 심었다
물을 만난 씨앗에서
싹이 나오고
줄기가 나오고
잎이 나오고
뿌리가 나왔다
흙을 만난 뿌리가
꽃을 피윘다
백련 씨앗이 홍련을 낳았다
종소리가 붓을 피워 올렸다
바람이 지나간 길을 따라
꽃붓이 하늘에 글을 쓴다
태엽
누가 저렇게 작은 손으로
둥글둥글둥글둥글둥글둥글
정교하게 태엽을 감았을까
소철 잎 태엽들이 풀린다
태엽 풀리는 소리가 들린다
누가 이렇게 큰 손으로
내 마음의 태엽을 감았을까
둥글둥글둥글둥글둥글둥글
내 마음의 태엽이 풀리다가
철커덕 걸려 풀리지 않는다
태엽 풀리는 소리가 안 들린다
https://youtu.be/UFi2vz-i2Mk?si=a-vsAU5RFdFR6z0c
https://youtu.be/baEELdBzKf8?si=7qdqZPlo5syDfySY
https://youtu.be/JwU5wvz1zDk?si=VIUzFkkcxYLes32j
신경림 시인과 성춘복 시인 타계
시문단의 消息(소식)【2025】 시인들의 動靜(동정)【88】 시대를 짊어진 작은 거인, 리얼리즘 민중시인 신경림 시인과 전임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및 문인협회장 성춘복 시인 타계.
시대를 짊어졌던 작은 거인, 리얼리즘 민중시인 신경림 시인금일 숙환으로 별세. 장례는 예를 갖추어서 대한민국 문인장으로 모시기로 하였으며 발인은 2024년 5월 25일 토요일 5시 30분 (4일장), 장지는 충주시 노은면 연하리 선산이며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2호실(서울 혜화동)
【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INCE 2006】 2024년 5월호 (2024, May) ㅡ통호 제181호 ㅡ Vol. 181
엘리엇 Eliot, Thomas Stearns이 그의 시「황무지 The Waste Land」에서 잔인하다고 표현한 4월이다. 딱딱하게 죽은 땅에서 하얀 속살을 지닌 화사한 목련이 살아나고, 어두운 대기에서 새소리가 돌림노래로 환히 울리는 생경감, 이를 두고 시인은 잔인함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러한 4월, 황홀하도록 낯선 풍경들은 신경림 시인과의 조우를 더욱 어울리게 한다. 고요하고 낮은 서정적 어조를 지닌 그가 시대를 통과하면서 읊을 수밖에 없었던 시들은 어떠했던가. 따스한 그의 정조와는 전혀 다르게 그의 시들은 차갑고 침울하고 아팠기 때문이다. 그는 시대를 저버리고 목가를 부를 수 없어 처연한 비가를 불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로 하여금 리얼리즘 시인이라고 부르게 하였고, 민중 시인이라고도 부르게 하였다. 현대 정치사와 산업화로 인해 와해되어 가는 농촌에 대한 애환, 기층민들을 향한 연민과 애정은 그의 시에서 푸른 울음으로 형상화되었다. 때로는 분노와 저항으로 높고도 빠른 격정이 서사시로 휘몰아치기도 하였으나 그의 시들은 가장 한국적인 민요조의 속성을 아름다이 서정시로 드러내었다. 민요가 민중에 의해 제작되었고, 청중 역시 일반 서민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민요가 지니고 있는 정신적인 율조나 양식은 신경림이 추구하는 시의 본질과 등가等價였을 것이다.
시대적 현실 상황에서 꼼짝 않고 묵묵히 자신의 시 정신을 견지해 온 시인, 실천적인 욕구로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활동을 주도하고 환경의 중요성을 깨달아 ‘환경운동연합’에 공동대표로 참여하는 등 작은 체구이기에 무거운 짐을 짊어진 모습이 더욱 서늘하였던 시인, 신경림 시인과의 만남은 한국전자통신연구원에서 이루어졌다. 선생님께 인터뷰 요청을 드리자 마침 백북스클럽 초청으로 특강이 있다고 일러주시면서, 그 장소에서 만나자고 하셨던 연유였다. 봄이라지만 빗발이 거세고 돌풍이 부는 쌀쌀한 저녁, 선생님을 뵈러 가는 길이 스산했다.
웹진 시인광장 2010년 8월호[통호 제18호] 김명원의 시인탐방 중에서-
민중시 ‘농무’로 1970년대 한국 민중문학의 새 지평을 열고 오랜 시간 독자들에게 사랑받아온 신경림 시인이 22일 아침에 별세했다.
암으로 병원에 입원하여 투병하던 중이었던 신경림 시인은 이날 오전 일산 국립암센터에서 타계했다. 향년 88세.
故 신경림 선생은 지난 1936년 충북 중원에서 태어나 1960년 동국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이한직의 추천을 받아 1955년과 1956년《문학예술》지에 시「갈대」,「낮달」,「석탑」등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그러나 등단 이후 10년간 고향으로 내려가 방랑을 하였으며, 다시 서울로 올라와 현대문학사, 휘문출판사, 동화출판사 등에서 편집 일을 했다. 한때 절필하기도 했으나 1965년부터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하여 1970년《동국시집》에「원격지」, 1971년《창작과비평》에「農舞」,「前夜」,「서울로 가는 길」등, 1972년《월간다리》에「산읍기행」, 1972년《월간중앙》에「詩祭」등을 발표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시집으로『農舞』(1973),『새재』(1979),『달넘세』(1985),『씻김굿』(1987),『남한강』(1987),『가난한 사랑 노래』(1988),『우리들의 북』(1988),『길』(1990),『쓰러진 자의 꿈』(1994) 등, 장시집으로『남한강』(1987),『여름날』(1991),『쓰러진 자의 꿈』(1993),『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1998), 기행문집으로『민요기행·1』(1985),『민요기행·2』(1989), 평론집으로『농촌현실과 농민문학』(1972),『문학과 민중』(1977),『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1983), 『역사와 현실에 진지하게 대응하는 시』(1984),『우리시의 이해』(1986),『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1』(1998),『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2』(2002), 수필집으로『한밤중에 눈을 뜨면』(1985),『다시 하나가 되라』(1986),『진실의 말 자유의 말』(1988), 『바람의 풍경』(2000) 등이 있다. 1974년 제1회 만해문학상, 1981년 제8회 한국문학작가상, 1990년 제2회 이산문학상, 2007년 제4회 스웨덴 시카다상 등을 수상하였다. 1975년 고은, 백낙청, 박태순, 이문구, 염무웅 등과 함께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립, 1983년 민요연구회 창립, 1987년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문학연구소 소장, 1988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창립 사무총장,을 지낸 바가 있다.
장례는 예를 갖추어서 대한민국 문인장으로 모시기로 하였으며 발인은 2024년 5월 25일 토요일 5시 30분 (4일장), 장지는 충주시 노은면 연하리 선산이며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레식장 2호실(서울 혜화동).
故 성춘복 시인
같은 날 1991년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및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공동 의장 등을 지냈으며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직을 지낸 바가 있는 성춘복 시인이 22일 오늘 아침 6시 55분경에 자택에서 별세하였다고 문인협회가 전했다. 향년 88세이다.
고인은 1936년 경북 상주에서 출생하여 성균관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5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하였으며 시집 으론 『공원 파고다』,『복사꽃 제(祭)』, 『네가 없는 이 하루는』,『마음의 불』,『'봉숭아 꽃물』, 등의 50 여권의 저서를 펴낸 바가 있다.
월탄문학상을 비롯해서 한국예술문화대상, 펜문학상, 서울시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그는 또한 지난 1998년부터 2000년까지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유족으로는 부인 우희정 씨와 아들 원영·동현 씨, 딸 아경·희진 씨, 사위 이재의·강민 씨, 며느리 선상희 씨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장례식장 9호실에 차려졌으며, 발인은 오는 24일 오전 7시, 장지는 경기도 포천군 혜화동 성당묘원이다.
☎ 02-2072-2010
[출처] 시문단의 消息(소식)【2025】 시인들의 動靜(동정)【88】 시대를 짊어진 작은 거인, 리얼리즘 민중시인 신경림 시인과 전임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및 문인협회장 성춘복 시인 타계.|작성자 웹진 시인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