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순례 01 08화

당신은 무엇을 밥으로 먹고 사는가

by 강산




당신은 무엇을 밥으로 먹고 사는가




당신은 무엇을 먹고 사는가

당신은 무엇을 밥으로 먹고 사는가

우리들은 모두가 처음에는

나뭇잎을 먹고 과일을 먹고 물고기를 먹고

짐승들을 잡아서 먹고 농사를 지어서 먹고살았다

그러다가 사람들은 물물교환을 하고 돈을 만들었다

사람들이 돈을 만든 다음에는 각자가 잘하는 것을

하면서 먹고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밥이 달라졌다

먹고사는 것들이 달라졌다 너무나 많이 달라졌다

농사를 먹고살고 목축을 먹고살고 사냥을 먹고살고

농촌을 먹고살고 어촌을 먹고살고 산촌을 먹고살고

쌀을 먹고살고 밥을 먹고살고 돈을 먹고살기 시작했다

장사를 먹고살고 사기를 먹고살고 전쟁을 먹고살기 시작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먹고 사는가

당신은 지금 무엇을 밥으로 먹고 사는가

당신은 지금 무엇을 주업으로 하여 먹고 사는가

노동을 주업으로 먹고 사는가 정신을 주업으로 먹고 사는가

당신은 지금 칼을 휘둘러서 먹고 사는가 펜을 굴려서 사는가

당신은 지금 권력을 뜯어먹고 사는가 명예를 팔아서 사는가

당신은 지금 거짓말로 속여서 사는가 지식을 팔아서 사는가

당신은 지금 무엇을 팔아먹고 사는가 무엇을 심어서 사는가

당신은 지금 이 세상에 어떤 씨앗을 뿌려서 먹고 살아가는가


당신은 무엇을 먹고 사는가

산과 들과 강과 바다에서

먹고살던 사람들은 이제

시장과 전쟁터에서 먹고 산다

돈이 만들어지면서

조개껍데기를 먹고 엽전, 동전, 철을 먹고

동을 먹고 은을 먹고 금을 먹고 종이를 먹고

플라스틱을 먹고 비트코인을 먹고 허공까지 먹어치우며 살아간다




이호테우해변 폐동이왓에서



조랑말 의자에 앉아 조랑말 등대를 본다

빨간 등대에서는 빨강 불빛이 깜박이고

하얀 등대에서는 초록 불빛이 깜박인다

쌍원담의 바닷물은 절반쯤 빠져나갔다

수평선 위에서 고기를 낚고 있는 불빛들과

저 수평선 너머에서 반짝이는 불빛도 있다

파도 위에서 윤동주와 송몽규가 흔들린다

윤동주의 길이 되고 빛이 되고 벽이 되고

등대가 되고 파도가 되고 쌍원담이 되고,

꿈이 되고 바람이 되었던 송몽규가 보인다

석 달 먼저 태어나 동주의 길을 열어주고

윤동주의 죽음까지 증언하고 늦게 떠나 간

송몽규의 그 모든 삶이 윤동주를 완성했다


돈키호테, 청년 문사 송몽규는

햄릿, 윤동주를 끝끝내 시인으로 부활시켰다

할아버지 윤하현은 자신의 묘비로 마련한 비석에

시인윤동주지묘라고 새겨서 손자를 시인으로 처음 불렀다

그렇게 윤동주는 죽어서야 비로소 시인의 이름표를 달았다


이호테우해변 폐동이왓에도 이제는 시인의 이름이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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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10시간


대학 4학년 2학기 끝무렵 2급 정교사 자격증을 취득한 나는 모교인 부여군 소재의 석성 중학교로 교생 실습을 나갔다. 나이 어린 여학생들이 총각 선생을 보자 환호성을 질러댔다.

이러구러 선생이 되기 위한 학습에 열중하던 중 동인 활동을 하던 선배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서울에서 문인들이 대거 신동엽 시비를 방문하러 내려오니 시간이 있으면 부여 읍내로 오라는 거였다.


백낙청 고은 신경림 천승세 염무웅 이시영 등등 지면으로만 알던 유명 문인들이었다. 나는 마치 첫사랑을 앓는 소년처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날은 마침 토요일이어서 오전 수업을 마치는 대로 서둘러 가면 그들을 만날 수 있을 것같았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지그시 누른 채 읍내의 한 음식점에 당도하니 행사를 마친 그들이 뒤풀이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나는 먼 발치에서 그들을 지켜보았을 뿐 끝내 인사를 올리지 못했다.


졸업 후 출판사와 학원가를 전전하다가 이십 대 후반에 작가회의에서 실무 간사일을 보게 되었다. 지근거리에서 그들을 대할 수 있었고 점차 친연한 사이가 되어갔다.


간사일을 마치고 청사 출판사 편집장을 하다가 영등포 소재의 대입시학원에서 강사짓을 하며 호구를 마련해갔다.


한 여자를 만나 아이를 얻고 궁색하지만 거처도 한 칸 마련해 놓고 본격적으로 생활인이 되어갔던 것이다.


서른 중반의 어느 여름날 오후, 집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신경림 선생님이었다. 마포 아현동 중국집 2층에 있으니 거기로 오라는 거였다. 그날은 국수가락 같은 비가 치렁치렁 흐느적거리며 내리고 있었다. 나는 연인을 만나는 심정이 되어 한달음에 달려 나갔다. 선생님과의 대작이 저녁까지 이어졌다.


그날 이후 일주일이 멀다 하고 마포와 인사동과 정릉, 그밖에 여러 여행지에서 선생님과 나는 망년지기가 되어 술을 마시고 고담준론은 가끔, 대개는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았다.


선생님이 내게 준 말이 있다. 시 이전에 생활인이 되라는 말씀이셨다. 나는 이 말을 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힘들 때마다 이 말을 떠올렸다. 악착같이 부지런을 떨어 이제는 살 만한 형편에 이르렀다. 이게 다 선생님 덕분이다.


든 자리는 몰라도 간 자리는 눈에 띈 다더니 선생님이 부재하시니 옛일들이 새록새록 어제 일인 듯 떠오른다.



이재무 2일


들리는 말로는 신경림 선생님 장례식장에 천여 명의 문상객이 다녀갔다고 한다. 근자에 없는, 실로 어마어마한 숫자다.

문상객들 중에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인들도 있었지만 대개는 인기와는 거리가 먼 보통 예술인들과 일반 독자들이었다.


또한, 문상객들은 진보, 보수 성향의 구별 없이 선생님과 인연을 맺은 예술인들 그리고 선생님의 시편을 즐겨 읽었던 독자들이 태반이었다. 그만큼 선생님이 맺은 인연의 스펙트럼이 넓다는 증좌다.


장례식장은 인생의 최종 성적표라는 생각이 든다. 식장을 다녀올 때마다 사는 동안 척지지 말고 사람을 잘 모시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 생각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은 쉽지가 않다.


아무래도 인품, 천품은 하늘이 내리는 거라서 학습으로는 한계가 있는 듯하다.


내 죽음 이후 식장을 떠올리니 모골이 송연해진다.



https://youtu.be/yPywRaP5zQE


https://youtu.be/UFi2vz-i2Mk?si=FZpT9dkYk370siR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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