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동주 시인과 함께 마지막 순례를 떠난다 012
1.
한강 작가의 벼락같은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작가와 시인들에 대한 관심이 이어지고 있다
제주도에서 억새꽃이 가장 유명한 곳은
산굼부리였다 그런데 교통여건이 좋은
새별오름이 서서히 억새꽃의 성지가 되고 있었다
나는 해마다 이 새별오름에서
억새꽃들과 함께 춤을 추었다
하지만 나는 산굼부리와 새별오름의
억새꽃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냥 길가에 피어있는 억새꽃이 좋다
언제라도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는 눈빛이 좋다
새별오름에 오면 억새꽃만 보는 것이 아니라
꼭 재미있는 사연을 간직한 무덤들도 둘러본다
제주도의 무덤들은 대부분 산담이 있다
산담을 보면 제주도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을 어느 정도는 짐작을 할 수 있다
제주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삶과 죽음이
그렇게 멀리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에 대하여도 생각한다
인간의 존엄에 대하여도 생각을 깊이 한다
또한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사람들도 생각한다
작가의 꿈과 삶과 글에 대하여도 깊이 생각을 한다
시인의 꿈과 삶과 글에 대하여도 깊이 생각을 한다
예술가의 꿈과 삶과 글에 대하여도 깊이 생각을 한다
2.
그렇게 많은 꿈을 꾸면서도
나는 나의 꿈을 잘 요리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강 작가를 보라
한강 작가는
자신이 꾼 꿈을 가장 아름답고
가장 의미 있게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다
환상적 리얼리즘은
꿈을 가장 잘 요리하는 꿈의 셰프들이
만들어내는 꿈의 요리라고 할 수 있다
한강 작가를 거칠게 읽으면 다음과 같다
한강 작가는 자기 관리를 참으로 잘한다
1970년 전남 광주 출생
1992년 윤동주 문학상 당선
1993년 연세대 국문과 졸업
1993년 시인 등단
1994년 소설가 등단
2007년 《채식주의자》
- 이 작품으로 2016년 맨부커상 수상
2014년 《소년이 온다》
- 5.18 광주 민중항쟁을 소년의 눈으로 다룬 소설
2021년 《작별하지 않는다》
- 4.3 항쟁을 다룬 작품으로 2023년 메디치상
2024년 10월 10일 노벨문학상 수상
< 노벨위원회 발표문 >
한강의 주요 국제적 돌파구는 소설 <채식주의자>(2007, 채식주의자, 2015)에서 나왔습니다.
세 부분으로 구성된 이 책은 주인공 영혜가 음식 섭취 규범을 거부할 때 발생하는 폭력적인 결과를 묘사합니다. 고기를 먹지 않기로 한 그녀의 결정은 다양하고 완전히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녀의 행동은 남편과 권위주의적인 아버지 모두에게 강제로 거부당하고, 수동적인 신체에 집착하는 비디오 아티스트인 처남에게 성적으로나 미학적으로 착취당합니다.
결국 그녀는 정신과 진료소에 입원하게 되고, 그곳에서 그녀의 여동생은 그녀를 구출하고 '정상적인' 삶으로 되돌리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영혜는 위험하면서도 유혹적인 식물계의 상징인 '불꽃나무'를 통해 표현되는 정신병적인 상태에 더욱 깊이 빠져듭니다.
좀 더 줄거리를 바탕으로 한 책은 2010년에 출간된 <바람이 분다, 가라>('The Wind Blows, Go')입니다. 이 소설에는 슬픔과 변화에 대한 갈망이 강하게 담겨 있는 우정과 예술성에 관한 크고 복잡한 소설입니다.
극단적인 삶의 이야기에 대한 한강의 신체적 공감은 점점 더 강렬해지는 은유적 스타일로 인해 더욱 강화됩니다.
2011년 <희랍어 시간>(Greek Lessons, 2023)은 취약한 두 개인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매력적으로 묘사합니다.
일련의 충격적인 경험으로 인해 말을 할 수 없게 된 젊은 여성은 시력을 잃고 있는 고대 그리스어 교사와 연결됩니다. 각자의 결점으로부터 깨지기 쉬운 연애가 발전합니다. 이 책은 상실, 친밀감, 그리고 언어의 궁극적인 조건에 관한 아름다운 명상입니다.
극단적인 삶의 이야기에 대한 한강의 신체적 공감은 점점 더 강렬해지는 은유적 스타일로 인해 더욱 강화됩니다.
소설 <소년이 온다>(2014, Human Acts, 2016)에서 한강은 이번에 자신이 자랐고 수백 명의 학생과 비무장 민간인이 살았던 광주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 있다. 1980년 한국군이 자행한 학살 사건에서 살해된 인물, 역사의 희생자들에게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이 책은 이 사건을 잔혹한 현실화로 직면함으로써 증인문학의 장르에 접근한다.
한강의 스타일은 간결하면서도 환상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장르에 대한 우리의 기대에서 벗어나며, 죽은 자의 영혼이 육체에서 분리되어 자신의 소멸을 목격하게 하는 것은 그녀의 특별한 방편이다. 어떤 순간, 묻힐 수 없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체들을 보며 텍스트는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의 기본 모티프를 떠올리게 된다.
<흰>(2016, The White Book, 2017>에서는 한강의 시적 스타일이 다시 한번 지배적입니다. 이 책은 서사적 자아의 누나였을지 모르지만, 태어나고 몇 시간 만에 세상을 떠난 사람에게 바치는 애가입니다.
흰색 물체에 관한 일련의 짧은 메모에서 작품 전체는 이러한 슬픔의 색을 통해 연관적으로 구성됩니다. 이것은 또한 설명된 바와 같이 이 책을 소설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세속적인 기도서'로 만듭니다. 서술자는 상상 속의 자매가 살도록 허용되었다면 그녀 자신도 태어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론합니다. 책이 마지막 말에 도달하는 것도 죽은 자들을 언급하면서입니다. '그 하얀 것, 그 모든 하얀 것 안에서 나는 당신이 내놓은 마지막 숨을 들이마시겠습니다.'
또 다른 하이라이트는 2021년 < 작별하지 않는다>(“We Do Not Part”)로, 고통의 이미지 측면에서 백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이야기는 1940년대 후반 대한민국 제주도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을 배경으로 전개됩니다. 그곳에서 어린이와 노인을 포함해 수만 명이 부역자라는 혐의로 총살당했습니다. 이 책은 화자와 그녀의 친구인 인선이 사건이 발생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나서 친척들에게 닥친 재난과 관련된 트라우마를 안고 함께 애도하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응축된 만큼 정확한 이미지를 통해 한강은 현재에 대한 과거의 힘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집단 망각에 빠진 것을 밝히고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려는 친구들의 끈질긴 시도를 똑같이 강력하게 추적합니다. 책 제목을 빌려준 공동 예술 프로젝트에 대한 트라우마. 유전된 고통과 마찬가지로 가장 깊은 형태의 우정에 대해서도 이 책은 꿈의 악몽 같은 이미지와 진실을 말하려는 증언 문헌의 경향 사이에서 매우 독창성을 가지고 움직입니다.
한강의 작업은 고통의 이중 노출, 즉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 고통의 대응이 동양적 사고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2013년의 <회복하는 인간>에서는 치유를 거부하는 다리 궤양과 주인공과 죽은 여동생 사이의 고통스러운 관계가 관련됩니다. 진정한 회복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으며, 고통은 일시적인 고통으로 환원될 수 없는 근본적인 실존적 경험으로 나타납니다. <채식주의자>와 같은 소설에서는 간단한 설명이 제공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일탈행위는 주인공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백지상태에서 거부하는 형태로 갑작스럽고 폭발적으로 발생합니다.
단편 소설 <유로파>(2012, 유로파, 2019)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작품에서는 자신이 여자로 가면을 쓴 남자 서술자가 불가능한 결혼 생활에서 헤어진 수수께끼의 여자에게 이끌립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다면 당신의 인생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물을 때 내러티브 자아는 침묵을 지킵니다. 여기에는 성취나 속죄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녀의 작품에서 한강은 역사적 트라우마와 보이지 않는 규칙에 맞서고, 그녀의 모든 작품에서 인간 삶의 취약성을 폭로합니다. 그녀는 육체와 영혼, 산 자와 죽은 자의 연결에 대한 독특한 인식을 갖고 있으며 시적이고 실험적인 스타일로 현대 산문의 혁신가가 되었습니다.
- 노벨위원회 위원장 앤더스 올슨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상을 받는 사람에 대하여 생각을 한다
상을 주는 사람에 대하여 생각을 한다
한강 작가는 이제 작품 쓰기에만 몰입하면 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있을까? 나는 아직도 김성백 시인을 잘 모른다. 그의 고백을 한 번 들어보자.
한라산에서 내려온 물이
이호테우해변에서
맨발 걷기를 한다
어두운 땅속을
오래도록 걸어온 물도
용천수가 되어
쌍원담 문수물이 되어
부처님의 맨발이구나
20241019 오늘은
여수민중항쟁의 날이구나
우리들의 역사는 아직도
군화를 벗지 못하고 있는데
파도소리도 맨발이고
빗방울도 맨발이고
배들도 맨발이고
등대불빛도 맨발이다
꽃들도 맨발이고
아기 울음소리도 맨발인데
나는 아직도 마음의
신발을 벗지 못하고 있구나
우리는 모두가 맨발로 왔다가
버선발로 저승길을 걸어가는데
저승길도 맨발로 걸어가는
영혼들이 참으로 많구나
세상에는 아직도 맨발이 참 많구나
부모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한승원 작가와 김인호 시인에게 배운다
김도수 시인과 나희덕 시인에게 배운다
나는 이제 겨우 정신을 차렸는데
벌써 뿌리를 뽑아버리면 나는,
벌써 고춧대를 뽑고 있었다
고춧대에는 아직도 꽃이 피고
꽃에서 고추가 열리고 있고
어린 고추가 자라 풋고추가 되고
풋고추가 온 힘을 다하여 익고
익은 고추도 더 빨갛게 익어가는데
너무 빨리 고춧대를 뽑고 있었다
뿌리까지 뽑힌 고춧대에서도 악착같이
꽃을 피우고 몸을 붉게 익히고 있었다
* 돌아보니 나에게도 습작노트가 많이 있었다
윤동주 시인보다 더 많은 습작노트가 있었다
그동안 나는 자신감이 없어 도망치기만 하였다
저렇게 뽑혀버린 고춧대도 꽃을 피우고 끝끝내
악착같이 푸른 풋고추를 빨갛게 익히고 있는데
헝가리의 산과 의학자. 산욕열이 시체를 만진 의사의 손에 묻은 유기분해물질의 흡수에 의한 일종의 흡수열이라고 단정하고 예방법으로 조산에 임하는 사람의 손을 염화칼슘액으로 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통해 1847~1849년에는 산욕열 발생률을 1/10로 감소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다.
반대론자들에게 밀려나 1855년에 귀국한 후 부다페스트대학 산과학 교수를 역임하고, 1861년에 《산욕열의 원인 ·개념 ·예방》을 저술하였다. 빈 교외의 정신병원에서 죽었다.
―『나의 습작기(習作期)의 시(詩) 아닌 시(詩)』목차(目次)
한 시인의 시적 세계는 유년시절의 경험과 청소년 시절의 경험이 많은 영향을 끼친다. 윤동주 시인의 인격 형성과 시적 세계의 구축은 만주와 디아스포라와 명동 마을과 김약연의 독립정신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고토회복과 이상촌 건설과 인재교육을 위하여 만주로 건너갔던 선각자들의 후손, 민족운동과 기독교 민족교육의 본거지가 되어가는 명동촌, 이토 히로부미를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한 안중근이 천주교 신부들로부터 협조를 거부당한 뒤 김약연의 도움으로 몰래 권총으로 사격 연습을 한 곳도 명동촌의 뒷산이었다고 한다. 조연현 선생님의 <해방의 등불 된 '간도의 대통령'>이란 글에서도 잘 증언하고 있다. 그리하여 장로가 된 김약연 선생님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일찍부터 시작된다. 특히 <무오독립선언서>에서 밝혔듯이 일제에게 독립을 청원하는 것이 아니라 '육탄혈전'으로 독립 '전쟁'을 해서 무력으로 일제를 몰아내야 한다는 더욱 적극적인 의지를 피력했기 때문에 일제의 입장에서는 무장투쟁의 본거지를 그냥 두고만 볼 수 없었다.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은 북간도 민족운동의 근거지로 자리 잡았던 명동학교를 불태우고, 무장투쟁을 주장해 온 교장 김약연을 체포한다. 김약연은 1920년 쉰둘의 나이에 체포되어 2년 동안 옥살이를 한다. 1923년 출옥해 폐허에 임시 건물로 지어진 명동학교를 유지했지만 이듬해 흉년으로 운영난에 시달린다. 1925년 용정의 은진중학교와 통합하여 명동중학교는 문을 닫는다. 윤동주 시인은 1925년 4월 그대로 유지되었던 명동소학교에 입학한다.
1929년 예순한 살의 나이로 김약연은 평양신학교에 다니며 목사 안수를 받는다. 목사이면서도 사회주의자 이동휘와 손을 잡았으며 서일 등 대종교 지도자들과도 협력했다. 중국인들이 그를 '간도의 한인 대통령'이라고 부를 만치 포용력 있는 지도자였다. 1930년 예순둘의 김약연은 명동교회 목사로 돌아온다. 당시 열세 살이던 윤동주와 송몽규는 이때부터 규암 김약연에게 <맹자>와 <성경> 등을 배우고 1931년 3월에 명동소학교를 졸업한다. 1932년부터 1934년까지 규암 김약연은 은진중학교에서 성경과 한문을 가르친다. 그리고 1938년 2월에 용정의 은진중학교와 명신여고의 이사장으로 취임한다. 규암은 이미 존경받는 목사이며 민족지도자였지만 말이 아니라 삶 자체로 모범을 보였다. 교장이면서도 천 평쯤 되는 밭농사를 직접 지었고 거름을 등에 지고 다니면서 황무지를 개척했다. 가을에는 농군들과 함께 밤새워 타작을 하는 등 제자들을 가르치는 모습이 마치 공자가 제자들에게 도를 행하는 것과 흡사했다고 증언하는 사람들이 많다. 1942년 10월 29일 용정시 자택에서 돌아가셨는데 "내 모든 행동이 곧 나의 유언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일흔넷의 일기로 별세하셨다.
『나의 습작기(習作期)의 시(詩) 아닌 시(詩)』에는 윤동주 시인이 연희전문학교 입학 전, 중학생 시절에 쓴 글들이 담겨 있다. 지금으로 치면 고등학생정도일 것이다. 1934년 12월부터 1937년 3월까지 창작한 윤동주 시인의 습작기의 시들이 담겨있다. 윤동주 시인이 1917년 12월 30일생이니 18세에서 21세 사이에 쓴 글들이다. 그 나이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당신은 그 나이에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나의 습작기(習作期)의 시(詩) 아닌 시(詩)』를 읽어보면 윤동주 시인은 그전부터 시를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전에도 계속 시를 쓰고 있었으나 이 노트를 준비하여 쓰면서 본격적으로 시인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시를 썼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앞의 글에서도 거론했듯이 그 결정적이 계기는 아마도 친구 송몽규의 이른 등단이었을 것이다.
『나의 습작기(習作期)의 시(詩) 아닌 시(詩)』에는 59편의 시가 실려 있는데 주로 동시가 많다. 그리고 제목이 없는 시도 있고 제목만 있는 시도 있다. 또한 윤동주 시인이 자필로 쓴 목차에는 36편의 제목만 적혀있다. 그러니까 그야말로 윤동주 시인 개인의 습작노트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윤동주 시인이 살아생전에 공식적인 등단 절차를 밟아서 등단한 시인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습작노트도 더욱 소중하게 다루어지고 있을 것이다. 아니, 우리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이런 자필 습작노트를 볼 수 있어서 더욱 의미 있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노트의 표지에 인쇄된 밀러의 비너스 때문에 자꾸만 나의 아프로디테 생각이 난다. 그리고 어머니 생각이 난다. 나는 사실 밀러의 비너스보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더 좋아한다. 나는 어쩌면 지금도 나의 아프로디테보다 나의 어머니가 더 보고 싶은지도 모른다. 아마도 눈물의 양과 눈물의 깊이 때문일 것이다. 아니, 다시 한번 더 깊이 생각하니 오래된 것일수록 더욱 좋아하는 나의 취향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윤동주 시인에게 청년문사 송몽규가 있었다면 나에게는 누가 있을까? 나는 지금 누구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을까? 나는 지금 누구를 부러워하고 있을까? 문득 생각나는 이름들이 있다. 이병률 시인과 정끝별 시인과 나희덕 시인과 김기택 시인과 …, 이병률 시인은 1987년에 같이 출발을 하였고, 정끝별 시인은 1988년에, 나희덕 시인과 김기택 시인은 1989년에 같이 출발을 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가 너무 먼 곳에 있다. 이병률 시인은 같은 해에 예대문학상에 나는 예장문학상에 각각 당선되었고, 정끝별 시인은 문학사상 신인발굴로 함께 등단을 하였으며, 나희덕 시인과 김기택 시인은 같은 해에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의 나의 삶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구석기시대 조각으로, 오스트리아 다뉴브강에 있는 빌렌도르프에서 1909년 철도 공사 때 발견된 돌로 만든 여인상(女人象)이다. 높이 11Cm의 조그만 계란형 돌에 유방·배(腹)·둔부·성기(性器) 등을 과장되게 표현한 특징을 갖고 있다. 이 조각상은 출산(出産)과 풍요를 기원하면서 만들었다는 추정이 전해지는데, 이에 '출산의 비너스'라고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