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진성 시인의 꿈삶글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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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현지시각)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 작가가 스웨덴 한림원에서 ‘빛과 실’이란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스톡홀름/로이터 연합뉴스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지.
수백여명의 청중이 한강 작가만을 바라보는 가운데, 그는 1979년 4월 여덞 살 적 지은 시를 고요히 읽어 내려갔다. 스웨덴 한림원에서 7일(현지시각) 열린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한강 작가의 연설 제목은 ‘빛과 실’로, 그의 한국말은 나긋하지만 한 공간을 가득 매웠다. 유년기 광주에 살았던 그는 곧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될 것이란 걸 알게 된 뒤 공책과 문제집, 일기장에 끄적였던 시들을 모아 ‘시집’을 만들었다. 한강 작가는 “그 여덟 살 아이가 사용한 단어 몇 개가 지금의 나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고 했다.
뛰는 가슴 속 내 심장.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 그걸 잇는 금(金)실- 빛을 내는 실.
노벨상 수상자들은 매해 12월 스톡홀름에서 열리는 ‘노벨 주간(Nobel Week·5∼12일)에 참석해 자신의 성취물이나 작품세계를 소개하는 연설을 한다. 한강 작가도 지난 10월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공개한 자리이기도 한 한림원 그랜드홀을 찾아 대중을 만났다. 그는 1993년 작가 생활을 시작한 뒤 31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집필한 장편소설 ‘채식주의자’,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며 만난 질문은 무엇이었는지를 이야기했다.
7일(현지시각)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연설이 열린 스웨덴 한림원에 비치된 한강 작가의 작품들. 사진 볼리비아 저널리스트 하비에르 클루어(Javier Clure) 제공
소설가의 일, “질문들을 견디며 사는 일”
한강 작가는 장편소설을 쓰는 일을 “질문들을 견디며 사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장편소설의 매력을 이렇게 말했다.
“완성까지 아무리 짧아도 1년, 길게는 7년까지 걸리는 장편소설은 내 개인적 삶의 상당한 기간들과 맞바꿈된다. 바로 그 점이 나는 좋았다. 그렇게 맞바꿔도 좋다고 결심할 만큼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들 속으로 들어가 머물 수 있다는 것이.”
7일(현지시각)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 작가가 스웨덴 한림원에서 ‘빛과 실’이란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스톡홀름/로이터 연합뉴스
질문과 함께 사는 소설가는 글쓰기를 시작한 시점과 끝마친 시점에 있어 같은 사람일 수 없다. “변형된 상태에서 다시 출발”하며 새로운 소설로 나아간다. 한강 작가는 장편 ‘채식주의자’와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을 내놓기까지 품어 온 질문을 이 자리에서 나눴다.
특히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육식을 끊고자 한 주인공 영혜와 언니 인혜, 그 주변 인물들을 다룬 책 ‘채식주의자(2007년 출간)’ 앞에서 한강 작가는 이렇게 질문한다. “한 인간이 완전하게 결백한 존재가 되는 것은 가능한가? 우리는 얼마나 깊게 폭력을 거부할 수 있는가? 그걸 위해 더이상 인간이라는 종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한강 작가는 이 책을 통해 2016년 한국인 최초로 영국 맨부커상 국제 부문 상을 수상하며 세계적 인지도를 지닌 작가로도 발돋움했다.
한강 작가가 7일(현지시각) 스웨덴 한림원에서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연설을 했다. 지난 10월 노벨상 수상자를 발표했던 마츠 말름 상무이사(왼쪽)와 한강 작가(오른쪽). 스톡홀름/AP 연합뉴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이렇게 아름다운가”
한강 작가는 특히 광주 항쟁을 다룬 책 ‘소년이 온다’와 제주 4·3을 다룬 책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며 품어 온 질문을 소개하는 데 연설의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2012년 ‘희랍어 시간’을 발표하기까지 그는 주로 개인을 향한 폭력과 그 내면을 파고들며 인간다운 삶과 생명의 의미를 물었다. 희랍어 시간을 쓴 뒤엔 “삶을 껴안는 눈부시게 밝은 소설”을 쓰려고도 애썼다.
하지만 결국 그럴 수 없었다고 했다. 열두 살이 되던 해 서가에서 우연히 거꾸로 꽂힌 ‘광주 사진첩’을 발견했을 때 껴안은 질문을 다시 마주한 것이다. 이 사진집엔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 신군부에 저항하다가 잔혹하게 살해된 시민들과 학생들이 담긴 사진과 총상자들에게 피를 나눠주기 위해 병원 앞에 끝없이 줄을 선 사람들의 사진이 함께 놓였다. 인간의 상반된 모습이 담긴 이 사진들을 본 한강 작가가 품은 의문은 이런 것이었다.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인가? 동시에 인간은 어떻게 그토록 압도적인 폭력의 반대편에 설 수 있는가? 우리가 인간이라는 종에 속한다는 사실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2021년 출간한 ‘작별하지 않는다’를 쓸 때도 비슷한 질문을 곁에 뒀다. 1948년 제주도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에서 살아남은 ‘정심’은 오빠의 유골을 찾기 위해 분투하고, 수십년이 지나도록 애도를 종결하지 않으며 끝끝내 망각하지 않으려는 사람이다. 한강 작가는 이 책에 이르기까지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라는 질문을 글쓰기의 동력으로 삼았다.
7일(현지시각) 스웨덴 한림원에서 열린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연설. 청중들이 집중해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스톡홀름/AFP 연합뉴스
언제나 사랑을 향하고 있던, 한강의 소설
이렇게 절실한 질문의 끝에서 한강 작가가 되돌아온 곳은 45년 전의 어렸던 그가 “사랑이란 어디에 있는지, 사랑은 무엇인지” 묻고 답한 시였다. 어린 한강은 사랑이 “나의 심장”이란 개인적 장소에 위치하고, 사랑은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라고 답했다. 한강 작가는 소년이 온다를 출간한 뒤, 소설을 읽고 고통을 느낀 독자들을 보며 이들의 고통이 자신이 소설을 쓰며 느낀 고통과 “연결”돼 있었다고 했다. 이 고통의 이유를 두고 그는 “우리는 인간을 사랑하고자 하기에, 그 사랑이 부서질 때 고통을 느끼는 것일까? 사랑에서 고통이 생겨나고, 어떤 고통은 사랑의 증거인 것일까?”라며 처음으로 사랑을 생각했다. ‘작별하지 않는다’의 ‘정심’을 들여다보면서는 “우리는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가? 어디까지가 우리의 한계인가?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는 끝내 인간으로 남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이 물음의 끝에서 결국 한강 작가는 자신의 모든 소설이
“언제나 사랑을 향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그것이 내 삶의 가장 오래고 근원적인 배움이었던 것은 아닐까?”
라는, 질문의 모양을 한 대답을 내놓았다.
7일(현지시각) 스웨덴 한림원에서 열리는 한강 작가의 연설을 듣기 위해 올라가는 사람들의 모습. 사진 장예지 특파원 penj@hani.co.kr
“느린 속도로나마 계속 쓰고, 앞으로 더 나아갈 것”
한강 작가의 다음 소설은 어떤 사랑에 관한 질문을 던질까. 2021년 ‘작별하지 않는다’ 출간 이후 그는 새 소설을 쓰고 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고 있다. 다만 이 책을 완성한 뒤 다음에 쓸 소설은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세상을 떠난 언니에게 내 삶을 잠시 빌려주려 했던, 무엇으로도 결코 파괴될 수 없는 우리 안의 어떤 부분을 들여다보고 싶었던 소설 ‘흰’과 형식적으로 연결되는 소설”일 것이라는 힌트를 남겼다.
그는 계속 ‘쓰는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다.
“완성의 시점들을 예측하는 것은 언제나처럼 불가능하지만, 어쨌든 나는 느린 속도로나마 계속 쓸 것이다. 지금까지 쓴 책들을 뒤로 하고 앞으로 더 나아갈 것이다. 어느 사이 모퉁이를 돌아 더이상 과거의 책들이 보이지 않을 만큼, 삶이 허락하는 한 가장 멀리.”
▷한강 작가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강의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