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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과 함께 37

―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by 강산




윤동주 시인과 함께 37

―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1

머리에 이고 가는 사람만 보여도 눈물이 난다

머리에 보따리 이고 가는 사람 모두가 어머니

평생 도붓장수였던 어머니 생각에 눈물이 난다

새벽달 이고 나가, 밤 보름달 이고 돌아오시던

평생 우리 집의 가장이셨던 어머니 생각이 난다


나도 오늘 밤 어머니가 이던 보름달을 이고 간다



2

세상에서

나를 가장 슬프게 하는 글이 있다

짧은 글이지만

언제나

나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글이 있다

어머니의 마지막 글이 있다

아마도,

광주에 있는 병원을 몰래 빠져나오셔서

고향집에서

농약을 마시고 쓰신 것 같다

그 농약이

온몸으로 퍼지는 순간에 쓰셨을 것만 같다

신음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수건을 입에 물고,

치아가 다 으스러지도록,

입을 앙다물고 쓰신 듯하다

자식인 나는 평생

용서를 받지 못할 것 같다


내가 유일하게 받은 유산이 바로 이 유서다



https://youtu.be/mRZ5hDp_gSA?si=hL9xlBOqUKXhXo0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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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가장 슬프게 하는 어머니의 마지막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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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몸으로 기억한다. 나의 몸이 어머니를 기억한다. 어머니는 나의 하느님이다. 그 기억을 더듬어 다시 한번 그 따뜻한 길을 여행한다. 그 행복과 평화의 길은 나의 길이고 내 아들의 길이고 내 어머니의 길이고 우리들 모두의 길이다. 그 숭고한 길의 힘으로 나는 오늘도 행복하게 살아간다.


35

나의 몸은 아직도 토성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아직도 토성(土星)을 진성(鎭星)이라 부른다. 토성은 목성에 이어 태양계에서 두 번째로 크며, 직경은 지구의 약 9.5배, 질량은 약 95배이다. 태양으로부터 14억 km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약 9.7km/s의 속도로 공전하는데, 이는 지구 시간으로 대략 29.6년이나 걸린다.


36

나의 기억이 왜 토성에서부터 출발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이유를 나는 아직 모른다. 나는 다만, 어쩌면 나의 이름 때문에 기억이 재구성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날, 그러니까 그믐달도 없는 깜깜한 밤에 토성은 30년 만에 지구에 가장 가까운 곳으로 접근하였고 번쩍, 하는 불빛과 함께 우주비가 내렸다. 나는 그 5억 개가 넘는 우주의 빗방울 속에 있었다. 나는 무작정 토성에서 지구를 향해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37

지구에 도착하여 보니 어느 작은 시골이었다. 그믐달도 없는 깜깜한 밤에 보름달을 이고 가는 도붓장수 여인이 있었다. 커다란 미원박스 안에 바늘, 실, 양말, 동정, 고무줄, 비누… 많은 생활용품들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그 박스 아래는 생활용품과 물물교환 한 쌀, 보리, 조, 수수, 콩 등이 담긴 자루가 있었다. 또한, 그 박스 위에도 비교적 가벼운 물건들과 함께 이미 팔려나간 물건들 대신 수숫대 빗자루며 계란 등과 함께 손때 묻은 되가 있었다.


38

이 모든 물건들을 아주 큰 보자기에 싸서 이고 가는 여인이 있었다. 집을 나설 때에는 빈 헝겊 자루들이 똬리 역할을 했지만, 그 접혀 있었던 자루들이 불룩하게 다 채워지고 네모난 박스 위에도 묘지처럼 볼록해서 보름달이 되어야만 집으로 돌아가는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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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인의 몸은 흠뻑 젖어 있었고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지천에 피어있는 참꽃들만이 바람결에 맞추어 몸을 눕히고 있었다. 나는 다행히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녀를 적셨고 무사히 그녀의 몸과 마음속으로 침투할 수 있었다. 이것은 나의 운명이었고 축복이었다. 나는 그렇게 천만다행으로 그녀를 만났고 그녀는 나의 어머니가 되어가기 시작했다. 어찌하여 나는 그녀를 젖게 했을까? 왜 나는 하필 그런 여인의 몸속으로 황급히 뛰어 들어갔던 것일까? 나는 어찌하여 그렇게 그녀의 아들이 되었던 것일까?


40

나의 아버지는 1931년 3월 26일에 이 세상에 태어나셨다. 나는 그때부터 아버지 몸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나는 아마 1965년 6월 장마가 시작되고, 산수국과 수국이 한창 피어나던 무렵에 아버지 몸 밖으로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나의 모든 전생을 한 번쯤 더 되풀이하여 생각했을 것이다. 물에서 살았던 시절부터 물 밖으로 기어 나왔던 경험까지, 그중에서 많은 것들은 생략하고 꼭 필요한 정거장들만을 거쳐서 돌아왔을 것이다. 아가미 시절과 허파 시절을 짧은 10개월 동안 다시 한번 속성으로 살아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1966년 어느 봄날에 힘차게 울면서 이 세상으로 나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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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ZS7cbDazcuNgD2ytKMUiElhg34.jpg 고향집 옥상에서 찍은 빨래 하시는 나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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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181022_1982535328554778_9156543741659271983_o.jpg 고향집 바로 앞에서 찍은 아버지 말년의 모습과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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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 살고 계신 누나와 함께 집을 둘러보고 알아본 결과

아직도 집은 어머니 앞으로 있었습니다

누나와 형님들과 동생에게 연락하니 나에게 관리를 하라고 합니다

그냥 아무 조건 없이 내 앞으로 상속을 하고 내 마음대로 쓰라고 합니다

제 생각에는 큰 형님 앞으로 가야 할 것 같아 큰 형님께 말씀드렸더니

그냥 저에게 쓰라고 합니다

그래서 형제들 모임 총무인 막내와 의논한 결과

부모님을 위한 형제들 모임 통장으로 5백만 원 입금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형님들과 누나는 돈 받는 것을 극구 사양하시지만

(얼마 전에 누나가 3백만 원에 팔려고 내놓았는데 팔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것이 서로에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만 저도 마음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 것 같습니다



곡성군청에 갔습니다

곡성군 기차마을에서 장미축제가 있었습니다

22세기 약속의 땅 곡성군

기차마을이 있는 곡성군

심청이 마을과 섬진강이 있는 곡성군

여기에서 저는 다시 문학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동안 너무 멀리 돌아서 온 것 같습니다



곡성군청이 정겹게 느껴집니다



등기소까지 들러 왔습니다

서류정리는 천천히 해도 된다고 합니다



아마도 저번 태풍에 창고 담장이 무너진 것 같습니다



집터는 좁아도 최대한 활용한 집이기 때문에

안쪽 내부는 상당히 넓습니다

방이 4개 이상 나올 것입니다

천천히 수리할 생각입니다

가게방은 심야전기 난방설비가 잘 되어 있어

전기공급만 재개되면 바로 쓸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방을 먼저 정리하고 도배해서 사용하면서

나머지도 고치면서 글을 쓸 생각입니다



아마도 저는 그렇게 많이 사용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창작 작업실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무료로 빌려줄 생각입니다

또 누가 압니까

이 작은 창작 작업실에서 세계적인 작품이 탄생할 수 있을지......,

주위 여건으로 보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좋은 인연을 꿈꾸어 봅니다



집 바로 앞에 있는 정자도 잘만 활용하면 좋을 듯합니다

저 뒤에 보이는 분들은 누나와 매형입니다



정자 바로 앞으로 삼기천이 흐르고

옛날에는 흐르는 물도 많아서 징검다리가 있었습니다

징검다리 건너

뚝 너머에 우리 집이 있었습니다

뚝을 넘으면 월경리입니다

그곳에서 저는 어릴 때부터 오리를 많이 길렀습니다

제 시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징검다리의 주요 배경이었습니다



비가 많이 오면 뚝이 넘쳐 회관으로 피난을 가야만 했습니다



불가피하게 자물쇠를 채웠습니다

다음에 혹시 사용하시고 싶은 분들은 저에게 연락 주시길 바랍니다

비밀번호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징검다리


하나


길이었다 덜 자란 몸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

어머니는 방물을 파셨고 새벽 샛강의

입김 자욱한 안갯속으로 떠나시곤 했다

나는 담장 밑에 펼쳐놓은 꼬막껍질에

쑥국 끓이기 놀이를 하며 자랐다

노을만 어렵게 어렵게 감아 들이던

바람개비가 스스로의 바람결을 가늠할 수 있을 때

물오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파랑 간짓대 들고

오리 떼를 몰아내던 골목이 심하게 흔들렸다

어머니 뒷모습을 지우던 안갯속으로

하얀 꽁무니가 사라지고

나도 그 속으로 따라 날아가고 싶었다



할아버지 산소가 보이는 징검다리 사이로 햇살이

주검처럼 부서지며 흘러갔다 하류에서

한 몸으로 몸을 섞기 위해 취로사업 나가신

아버지가 무너진 둑에 묻히고 작업복이 천수답

허수아비에 내걸리던 날도 나는 그 저수지 뚝에서

삐비 꽃을 뽑아먹고 돌아오는 길

가로수 구멍 속에 몇 개의 돌을 더 던져 넣었다

어머니가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줄도 몰랐다

그 해 여름 장마는 담장의 발목을 적셨고

두꺼비 같은 우리 식구들은

한밤중에 회관으로 기어 올라갔었다



학교 앞 코스모스로 기다리기를 즐겼다

하학종소리 사이로 보이는 형의 검정고무신 앞은

발가락이 먼저 나와 있었고 생활 보호 대상자

가족 앞으로 달려오는 옥수수 빵과 건빵

나는 그것이 좋았다 우리는 뿔 필통 속 몽당연필로

흔, 들, 리, 며, 징, 검, 다, 리, 건, 넜, 다,

끈이 풀리는 소리로 흘러가는 여울물 소리는

우리를 다시 묶어주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징검다리를 잘도 건너 다녔다



수수깡으로 안경을 만들어 끼고 기차놀이하던

우리들은 그 새끼줄 속에서 자유로웠다

우리들의 기차는 징검다리를 비로소 건너 다녔고

오후의 서툰 기적소리 울리며

동구 밖까지 나가 놀던 소아마비 동생은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못했다 찾다가 찾아보다가

어린 집배원이 된 큰 형도

동생의 소식은 가져오지 못하고 한 떼

건너가는 동네 아이들만 오래도록 바라보곤 했다


다섯


여울물 소리는 끈이 풀리는 소리였고

또다시 묶이는 소리였다 방직공장에 취직했던

누이가 파란 눈의 아이를 보듬고 돌아와

빨래터에는 방망이질 소리가 잠들지 않았고

헛발 짚은 어머니는 물속에 더욱 자주 빠지셨다

……………… 배고픔과 어머니 ………………

들판에 흐드러진 달맞이꽃 사이로 그렇게 어머니는

젖은 보름달을 이고 늦게 돌아오시곤 했다



연어의 종착역

곡성 고향집 바로 앞에
연어의 종착역 표지석이 있다
나는 연어가 되어
참으로 먼 길을 거슬러 올라왔다
나도 이제는
연어알 같은 붉은 알을 낳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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