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1
리드런에게 죽비를 얻어맞고 번쩍 정신이 들었다
그렇지, 남들을 따라하면 안 돼지 나는 나여야지
많은 사람들이 책의 줄거리만을 이야기할 때
나는 그럴수록 필사를 하고, 이면을 보아야지
읽고 달리는 것이 아니라 읽고 산책을 해야지
리드런은 리드런의 길을 가야 리드런 답고
나는 나의 길을 해찰하며 산책을 해야 나답지
그믐달은 그믐달의 길을 가고 초승달은 초승달의
길을 가야지 그래야 보름달도 보름달의 길이 있지
2
꽃샘 추위에 꽃들이 얼고 있다
난장에서 떨고 있을 고양이 걱정을 한다
전기장판 하나로 버티고 있는 나는
혹시 정전이라도 될까봐 걱정을 한다
농막 안에서도 이렇게 추워 잠들지 못하는데
지리산과 한라산에서 겨울을 견디었던
빨치산 사람들은 얼마나 춥고 배가 고팠을까
지금도 난장에서 떨고 있을 생명들은 어떻게 견딜까
태백산맥은 이제 우리들의 성경이 되었다
태백산맥은 이제 우리들의 불경이 되었다
영화로 보고 오디오북을 들어도 책이 제일이다
태백산맥은 이제 소제목들만 읽어도 시가 된다
책장만 넘겨도 주인공들의 숨소리가 들린다
일출 없는 새벽
가슴으로 이어진 물줄기
민족의 발견
소화, 하얀 꽃이라는 이름의 무당
조계산 숯막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가 빨갱이 맹근당께요
그리고 청년단
이념 이전의 인간
문딩이 가시내, 팔자도 참 험하게 변했다
암약
나는 이제
허리 잘린 태백산맥을 생각하면
죽방과 방죽이 먼저 떠오른다
벌교의 꼬막이 되고
부용산 되어 부용산 노래를 부른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곡성의 반월산 반달이 보이고
연어의 종착역 기적소리가 들린다
나는 오늘도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그리하여 오늘도,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윤동주 시인은 어릴 때 김약연 선생님께 <맹자>와 <성경>을 배웠다. 김약연 선생님은 윤동주 시인의 외삼촌이자 북간도 조선인 사회의 정신적 지주였다. 북간도의 대통령이라는 말도 있었다. 덕분에 윤동주 시인은 동서양의 교양을 두루 섭렵할 수 있었다. 윤동주 시인의 대표 문장이라고 할 수 있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은 <맹자>에서 빌려온 문장이다.
맹자는 인생삼락 말했다.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고 말했다. 부모와 형제가 함께 살아계시거나 있어 다들 무탈한 것, 하늘을 우러러서 한 점 부끄럼이 없고, 땅을 굽어서 미안해할 일이 없는 것, 천하의 영재들을 모아서 교육을 시키는 것, 이 세 가지를 인생삼락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아무나 누릴 수 없을 뿐더러, 군자만이 누릴 수 있다고 해서 군자삼락이라고도 한다.
인생삼락에 대하여 공자님도 말씀하셨는데 맹자와 공자의 인생삼락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맹자의 인생삼락
<맹자> 진심편 : 군자삼락
군자에게 세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천하의 왕이 되는 것은 들어있지 않다!
(君子有三樂而王天下與存焉: 군자유삼락이왕천하여존언)
부모님이 살아계시고 형제들이 무고하니 첫째 즐거움이요
(父母俱存兄弟無故一樂也:부모구존형제무고 일락야)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고 사람들을 굽어 보아도 부끄럽지 않으니 두번째 즐거움이요
(仰不愧於天俯不怍於人二樂也:앙부괴어천부부작어인 이락야)
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치니 세번째 즐거움이다
(得天下英才敎育之三樂也:득천하영재교육지 삼락야)
공자의 인생삼락
<논어> 학이편
배워서 때때로 익히면 이 또한 기쁘지 않은가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하랴
(有朋自遠方來하니 不亦樂乎)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 하지 않으니 또한 군자가 아니냐
(人不知而不慍이면 不亦君子乎)
공자에게도 인생삼락이 있었고 맹자에게도 군자삼락이 있었다.
먼저, 공자의 인생삼락은
첫째, 배우고 또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둘째,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니 이 또한 기쁨이 아닌가.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셋째, 사람들이 나를 몰라주더라도 화를 내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人不知而不溫 不亦君子乎)
다음, 맹자의 군자삼락은
첫째, 양친이 다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요.
부모구존 형제무고(父母俱存 兄弟無故)
둘째,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구부려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요.
앙부괴어천 부불작어인 (仰不愧於天 俯不作於人)
셋째, 즐거움은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이다.
득천하영재 이교육지 (得天下英才 而敎育之)
그럼, 그대는 인생삼락을 가졌는가?
자신이 성인이 아니어서 그런 것은 필요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있을 때와 없을 때는 완전히 다르다.
삼락이 아니라 오락도 좋고 팔락도 좋다.
낙은 단순한 즐거움이 아니라 그 사람의 가치관과 삶의 의미가 담겨 있다. 그 사람이 즐기고 즐겨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가 있다.
낙이 낙인 줄 모르면 그것을 경험하더라도 즐거움을 모른다.
어떤 것이 낙인 줄 알면 그것이 낙인 줄 모를 때보다 경험을 더 많이 하게 된다.
나의 인생삼락은
먼저, 평생 배우고 공부하는 것이다.
공부를 하는 것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인식을 바르게 하기 위함이다.
매일 공부하여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후회는 없을 것이다.
공자님 말씀, 배우고 또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둘째,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이 더 행복하고 지혜롭고 즐거울 수가 있다면 나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설혹 그렇게 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는 주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
맹자님 말씀,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구부려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요.
앙부괴어천 부불작어인 (仰不愧於天 俯不作於人)
셋째, 나답게 사는 것이다.
내가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일을 하며 사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나의 가치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도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땅에도 부끄러움이 없다면 잘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2
정하섭은 약간 오르막진 산굽이 길을 민첩하게 걸어올랐다. 등성이를 기점으로 외즐기 산길은 구불구불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정하섭은 등성이에서 걸음을 멈추고 휴우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다리가 약간 흔들리는 것 같다가 이내 똑바로 균형을 잡았다. 시월 하순으로 접어들고 있는 새벽 대기는 카랑하게 매웠지만 그의 웃도리 단추는 세 개나 풀어헤쳐져 있었다. 정결한 느낌의 희고 반듯한 이마에는 땀이 진득하게 배어나 있었고 숨을 쉴 때마다 입에서는 열기 묻은 단내가 뿜어져나왔다. 정하섭은 주머니 속을 더듬었다. 몇 개비 남지 않았을 찌그러진 담뱃갑이 손에 잡히는 순간 담배를 피워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꿈 깨듯 깨달았다. 어둠살을 타고 길을 걷기 시작하고부터 열 번도 더 넘게 되풀이한 부질없는 몸짓이었다. "정 동무, 성냥은 나한테 넘기도록 하시오. 한 개피의 성냥이 정 동무의 목숨을 살해하는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 있소." 꼬박 육십리길을 걸으며 단 한 번도 쉬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 간절한 한 모금의 담배연기도 빨아들일수가 없었다. 위원장의 처사는 백번 옳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만약 성냥을 회수하지 않았더라면 그 무의식적으로 발동하는 흡연욕구를 끝까지 이겨낼 수 있었을까. 처음 몇 번은 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횟수가 거듭되다 보면....... 그래도 끝까지 성냥을 그어대지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을 정하섭은 자신의 의식 속에서 선뜻 건져올릴 수가 없었다. 왜 나는 자신있게 내보일 그런 의지를 갖추지 못하고 있을까. 그 의문에 답하기라도 하듯 돌의 표피처럼 딱딱하고 무표정한 위원장의 얼굴이 불쑥 다가들었다. 그럼, 위원장은 그런 내 마음을 이미 간파하고 성냥을 회수했단 말안가. 이 불길한 생각을 뒤쫓아 바늘끝처럼 예리한 충격이 머리끝에서부터 등줄기까지 찌르르 관통하고 있었다. 그건, 위원장에게 그렇게 의지박약한 인간으로 취급되었다면 당성인들 제대로 인정받고 있을 리가 없잖은가 하는 두려운 생각이었다. 정하섭은 갑자기 전신이 옥죄어오는 공포를 느꼈다. 당성을 의심받는다는 것, 그건 두말할 필요 없이 마지막이란 의미였다. 정하섭은 두 손으로 얼굴을 꼭 눌러 감싸며 신음처럼 긴 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밤새껏 걸어 여기까지 와 있지 않느냐고 스스로를 일깨우고 있었다. 그때 구원처럼 들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암호는 백두산, 한라산, 복창하시오." "백두산, 한라산." 지난밤 위원장에게 하달받은 암호가 정하섭의 가슴에 안도의 따스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암호는 곧 생명이었다. 암호의 누설은 조직의 동맥을 끊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에게 독립공작을 부여하고 암호까지 하달했다는 것은 당성을 의심하기는커녕 당성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가 하는 좋은 반증이었던 것이다.
"내가 너무 신경과민이군."
정하섭은 스스로를 안심시키듯 분명한 어조로 혼잣말을 하며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위원장은 사소한 실수로 야기될지 모를 큰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위원장다운 주도면밀하 조치였다. 그는 거의 웃는 일이 없이 냉혈적인 침착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정하섭을 불렀을 때는 다소 당황한 빛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사태가 우리한테 약간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소.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똑똑히 들으시오. 이건 당의 명령이오." 당의 명령이라는 전제 앞에서 정하섭은 반사적으로 부동자세를 취하며 긴장했다. 당의 명령은 '사태가 약간 불리한' 정도가 아니었다. 자신들이 취해야 하는 행동은 결정적인 패주였던 것이다. 그러나 정하섭은 묵묵히 명령을 수령하는 자세를 지켰다. 명령 앞에서는 그 어떤 이의제게나 회의적 질문이 용납될 수 없다는 불문율 때문이 아니었다. 직감적으로 느끼기에도 자신들이 처한 상황은 너무나 급박해져 있었다. "날이 새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해야 하고, 임무수행을 하는 동안 몸은 계속 은폐시켜야 하오." 그리고 큰길을 버리고 산길을 타면서도 담배 한 대를 피울 수 없다는 사실은 사방이 적의 감시 속에 에워싸여 있다는 증거였다. 그런 위기의식에 쫓기며 육십리길을 내달아오는 동안 정하섭의 곤두선 신경은 산소용접기에 닿은 쇠붙이처럼 무수한 불똥을 튀기며 타들었다.
나는 정하섭을 따라 벌교로 간다
중도방죽의 갯벌, 갈숲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