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을 잡아야 꿈을 딴다

5.4 나는 말없이 이 탑(塔)을 쌓고 있다

by 강산





감을 잡아야 꿈을 딴다

5.4 나는 말없이 이 탑(塔)을 쌓고 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감나무가 부러웠다

감나무 있는 집이 한없이 참으로 부러웠다

뒷집과 옆집에는 감나무 여러 그루 있었으나

우리 집은 마당이 없어 나무를 심을 수 없었다

감나무에 감꽃이 피어나면

감꽃으로 목걸이를 만들어서 목에 걸고

푸른 청춘의 감나무에서

푸른 감을 따서 항아리 소금물에 담가 울여 먹기도 하고

빨갛게 익어 홍시가 되면 꿈의 별처럼 반짝거렸다

물론 단감나무도 있어서 단감을 따먹기도 하고

말랑말랑하게 익어가는 넓적 감도 꽃처럼 피어났다

나는 그런 감나무가 한없이 부러웠고

그런 감나무가 있던 집 아이들이 더욱 부러웠다


나는 이제 다 늙어서 감을 딴다

단감도 따고 대봉감도 딴다

대나무 간지대로도 따고 나무에 올라가서도 딴다


감을 잡아야 꿈을 딸 수 있다

나는 이제 겨우 감을 잡고 꿈을 따기 시작한다

나는 이제 말없이 이 탑(塔)을 쌓고 있다 꿈을 쌓고 있다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235] 이승하의 "죽기 전에 먹고 싶었던 것" | 코리아아트뉴스

죽기 전에 먹고 싶었던 것 / 이승하



폐결핵에 걸리면 시한부 인생이 되는 것

다 죽어가면서도 펜을 잡고서

김유정, “닭과 구렁이를 고아 먹어야겠다.”

이상, “레몬을 구해다 주오.”


이빨로 대충 씹어 꿀꺽 삼키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것

그대들 그토록 먹고 싶어 찾았건만

못 구했다 못 먹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가끔 해주신

콩죽이 오늘따라 사무치게 먹고 싶다

아내가 해놓으면 식구들 중 나 혼자만

퉁퉁 불어터질 때까지 먹는 콩죽


나 죽기 전에 딱 한 번만

어머니가 해주신 바로 그 콩죽의 맛

맛보고 싶다 구수한 콩죽 먹으며

스르르 잠들고 싶다 영원한 잠, 편안한 잠을


먹고사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이 있으랴

구걸해서라도 먹어야 사는 법

돌아서면 입은 아 배고파 소리치고

위장은 꼬르륵 맞장구를 친다

시는 배가 고파야 나오는 것이거늘

나 삼시세끼 꼬박꼬박 먹으며, 배부르게 먹으며


죽기 전에 그대들 먹고 싶었던 것

먹지 못하고 죽어 목이 메는 절명이다 단명이다



*김유정(1908〜1937), 이상(1910〜1937)


―『사람 사막』(더푸른, 2023)

글이 잘 안 씌어질 때나 몸이 아플 때, 마음이 스산할 때면 김유정과 이상을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의 몸을 불살라 글을 썼는데 나는 지금 이 무슨 태만인가. 핑계인가. 자만인가 _


글이 잘 안 씌어질 때나 몸이 아플 때, 마음이 스산할 때면 김유정과 이상을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의 몸을 불살라 글을 썼는데 나는 지금 이 무슨 태만인가. 핑계인가. 자만인가 _ 이승하 [ 이미지: 류우강 기자]


[해설]


그 시절의 질병과 궁핍


그 시절에는 잘 먹지를 못했다. 한 끼 밥이라도 배불리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사람들이 이상과 김유정뿐이었을까. 폐결핵에는 약도 없었지만 잘 먹지를 못했으니 시한부 삶이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한국 문학사의 명작들을 기침을 콜록콜록 해가면서, 때로는 피까지 토해가면서 썼다. 배에서는 계속해서 꼬르륵꼬르륵 소리가 났을 것이다.


김유정의 소설을, 이상의 시와 소설과 수필을 평상심으로 읽을 수 없다. 얼마나 절박한 심정으로 썼을까. 그 당시엔 폐결핵 환자로 판명이 나면 10년 이내에 죽는 것이 거의 확실했다. 언제 저승사자가 방문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두 사람은 자기 자신의 몸을 횃불로 삼아 원고지와 씨름을 했다. 거의 필사적인 용기와 가학에 가까운 열정으로 쓰고 또 썼으니 몸이 견뎌낼 수 없었다. 스물아홉, 스물일곱의 청춘은 그렇게 갔다. 그 엄청난 작품들을 써놓고.


글이 잘 안 씌어질 때나 몸이 아플 때, 마음이 스산할 때면 김유정과 이상을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의 몸을 불살라 글을 썼는데 나는 지금 이 무슨 태만인가. 핑계인가. 자만인가. 신춘문예 시상식장에 못 오신 소설가 송영 선생님을 인사차 댁으로 찾아뵈었을 때 자기는 작품이 잘 안 되면 (젊었을 때였지만) 벽에다 머리를 쾅쾅 박곤 했었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런 각오로 써야 한다. 쓸 것이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이승하 시인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청춘의 별을 헤다-윤동주』『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shpoe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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