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학교 서천꽃밭 달문moon

― 이어도공화국 꿈삶글 0035

by 강산





평생학교 서천꽃밭 달문moon / 배진성





수많은 언어들과 무서운 말소리들,/고통의 소리들, 분노의 억양들, 크고/작은 목소리들, 손바닥 치는 소리들이//함께 어우러져 아수라장을 이루었고,/마치 회오리바람에 모래가 일듯이/영원히 검은 대기 속에 울려 퍼졌다//나는 무서워서 머리를 움켜쥐고 말했다/「스승님, 저 들려오는 소리는 무엇입니까?/고통에 사로잡힌 저 사람들은 누구입니까?」//스승님은 말하셨다「치욕도 없고 명예도 없이/살아온 사람들의 괴로운 영혼들이/저렇게 처참한 상태에 있노라//저기에는 하느님께 거역하지도 않고/충실하지도 않고, 자신만을 위해 살았던/그 사악한 천사들의 무리도 섞여 있노라//하늘은 아름다움을 지키려고 그들을 내쫓았고,/깊은 지옥도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데,/그들에게는 사악함의 명예도 없기 때문이다」// ― 단테의『신곡(神曲)』26


<창구멍>과 <기왓장내외> 사이에 제목만 있는 시가 있다/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제목은 확실해 보인다/<짝수갑>이란 시가 있는데 여기에 쓰지 않은 것인지/혹은 다른 어떤 이유가 있는지에 대하여 알 수 없지만/아홉 줄이 비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정도의 시가 있지 않을까/생각을 한다//아, <짝수갑>이란 제목이 심상치 않다/내가 언젠가는 <짝수갑>이란 제목으로 시를 써보아야겠다/윤동주 시인과 내가 짝수갑이 되어야만 하겠다/짝이 되어야만 하겠다/윤동주 시인과 내가 한 짝씩 수갑을 차고 함께 가야만 하겠다/<짝수갑> 시를 쓰기 위해서 오늘은 간단한 메모를 한다//짝수갑/짝수갑이 무엇일까/시 제목만 있고 시 내용이 없다/짝수갑을 생각하다가/<짝수갑>과/<건너 마을>을 썼다// _ (1936년 초 추정, 윤동주 19세)/13. 짝수갑(동요) _ 1집 * 제목만 있음// ―『윤동주』13


계곡의 신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그것은 신비의 여인/여인의 문은 하늘과 땅의 근원/끊길 듯하면서도 이어지고,/써도 써도 다할 줄을 모릅니다// _ (제6장 도는 신비의 여인(玄牝) - 도의 여성적 특성 ―『도덕경(道德經)』6


빛은 자신을 보지 못했다/어둠이 있었기에/그 존재를 알았다//진짜 밝음은/스스로를 모를 때 피어난다// _ (『숨의 연대기』제1부 - 빛이 오기 전(창조의 어둠) 5 「이름 없는 빛」) ―『청람 김왕식』6


하나//길이었다 덜 자란 몸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어머니는 방물을 파셨고 새벽 샛강의/입김 자욱한 안갯속으로 떠나시곤 했다/나는 담장 밑에 펼쳐놓은 꼬막껍질에/쑥국 끓이기 놀이를 하며 자랐다/노을만 어렵게 어렵게 감아 들이던/바람개비가 스스로의 바람결을 가늠할 수 있을 때/물오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파랑 간짓대 들고/오리 떼를 몰아내던 골목이 심하게 흔들렸다/어머니 뒷모습을 지우던 안갯속으로/하얀 꽁무니가 사라지고/나도 그 속으로 따라 날아가고 싶었다//둘//할아버지 산소가 보이는 징검다리 사이로 햇살이/주검처럼 부서지며 흘러갔다 하류에서/한 몸으로 몸을 섞기 위해 취로사업 나가신/아버지가 무너진 둑에 묻히고 작업복이 천수답/허수아비에 내걸리던 날도 나는 그 저수지 뚝에서/삐비 꽃을 뽑아먹고 돌아오는 길/가로수 구멍 속에 몇 개의 돌을 더 던져 넣었다/어머니가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줄도 몰랐다/그 해 여름 장마는 담장의 발목을 적셨고/두꺼비 같은 우리 식구들은/한밤중에 회관으로 기어 올라갔었다//셋//학교 앞 코스모스로 기다리기를 즐겼다/하학종소리 사이로 보이는 형의 검정고무신 앞은/발가락이 먼저 나와 있었고 생활 보호 대상자/가족 앞으로 달려오는 옥수수 빵과 건빵/나는 그것이 좋았다 우리는 뿔 필통 속 몽당연필로/흔, 들, 리, 며, 징, 검, 다, 리, 건, 넜, 다,/끈이 풀리는 소리로 흘러가는 여울물 소리는/우리를 다시 묶어주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징검다리를 잘도 건너 다녔다//넷//수수깡으로 안경을 만들어 끼고 기차놀이하던/우리들은 그 새끼줄 속에서 자유로웠다/우리들의 기차는 징검다리를 비로소 건너 다녔고/오후의 서툰 기적소리 울리며/동구 밖까지 나가 놀던 소아마비 동생은/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못했다 찾다가 찾아보다가/어린 집배원이 된 큰 형도/동생의 소식은 가져오지 못하고 한 떼/건너가는 동네 아이들만 오래도록 바라보곤 했다//다섯//여울물 소리는 끈이 풀리는 소리였고/또다시 묶이는 소리였다 방직공장에 취직했던/누이가 파란 눈의 아이를 보듬고 돌아와/빨래터에는 방망이질 소리가 잠들지 않았고/헛발 짚은 어머니는 물속에 더욱 자주 빠지셨다/……………… 배고픔과 어머니 ………………/들판에 흐드러진 달맞이꽃 사이로 그렇게 어머니는/젖은 보름달을 이고 늦게 돌아오시곤 했다// (1987년 예장문학상 당선작 「징검다리」) ―『배진성』2




나는 아직 본격적으로 이어도공화국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내가 꿈꾸는 이어도공화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산이나 아름다운 섬이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산이나 섬을 구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우선 이어도공화국을 만들기 위한 이어도공화국 베이스캠프를 만든다 그 전초기지를 나는 <평생학교> 혹은 <달문moon> 혹은 <이어도서천꽃밭>이라고 부른다 평생학교는 평화학교와 생명학교를 줄여서 부르는 이름이다 그런데 때에 따라서는 이어도공화국 베이스캠프를 그냥 <이어도공화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오늘 아침에는 오랜만에 산책을 나갔다 일곱 시가 되어도 조금 어두웠다 ‘퍼물’ 바로 옆 민박집 주차장에 버스가 서 있었다 버스 안에는 불도 켜져 있었다 가방을 등에 진 사람들이 보였다 민박집 단체 손님들이 일찍부터 어디론가 출발하려고 준비하는 줄 알았다 자세히 보니 민박집 손님들이 아니었다 좀 더 지켜보니, 그들은 오늘 ‘퍼물논’의 유채 나물을 수확하려고 온 일꾼들이었다 그들은 김이 피어오르는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버스에서 내리고 있었다 밭으로 사용되고 있는 논 입구에 모닥불을 피우고 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평생학교 ‘꿈숲’에서 길 하나를 건너면 평생학교 ‘꿈섬’이 나온다 화순은 강정과 함께 물이 많고 논이 많기로 유명하다 옛날부터 ‘일 강정 이 화순’이라는 말이 전해져 오고 있다 제주도는 평소에는 물이 없는 건천이 많은데 화순은 물이 마르지 않는 안덕계곡과 용천수들이 많다 그리하여 물소리를 좋아하는 나는 물길을 따라 산책하는 것을 좋아한다 물소리를 들으며 산책을 하고 돌아오면 언제나 마음속 깊은 곳까지 깨끗하게 씻겨진 나를 발견할 수 있다


‘퍼물논’으로 알려진 평생학교 ‘꿈섬’을 나는 연꽃단지로 만들고 싶은데 약 5천 평 되는 논 중에 이제 겨우 5백 평 확보하여 연꽃을 심고 관찰을 하는 중에 있다 연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으로 늘 연꽃 같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다시 윤동주 시인을 만나는 이유는 하나다 내 시의 출발점이었던 윤동주 시인을 다시 만나서 새롭게 검검하고 더욱 새롭게 다시 출발하기 위함이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내가 다른 곳에서 허송세월을 보내는 동안 세상은 많이 바뀌었고 우리나라 문학판 또한 많이 변했다 그동안 윤동주 시인에 관한 자료들도 많이 정리가 되었고 나 또한 이제는 나의 문학을 정리하고 좀 더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보아야만 할 때가 되었다 나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또다시 윤동주 시인의 촛불을 함께 들고 내가 가야 할 올바른 길을 찾아서 끝까지 가야만 한다


윤동주 시인에서 출발하여 김소월, 한용운, 이육사, 백석, 정지용, 이상, 김영랑, 김수영, 이용악, 김종삼, 김춘수, 오규원, 정현종, 황동규, 이성복, 기형도, 신경림, 박노해, 김용택, 안도현, 이산하, 이재무, 이능표, 장석주, 김인호, 김도수, 이원규, 박두규, 박남준, 김세홍, 신병은, 박해미, 나희덕, 김기택, 정끝별, 이병률, 문태준, 조현석, 김해화, 김남권, 신휘, 현택훈, 김왕식, 이희국...., 많은 시인들의 장점들을 배우면서 나의 문학을 완성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나는 나 자신을 더욱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는 사실 겨우 출발만 하였고 문학의 길을 본격적으로 가지 못했다 시인의 길을 제대로 가지 못했다 그동안의 나의 과오를 철저히 분석하여 새롭게 출발하고자 반성하고 반성하고 또다시 반성하기 위하여 윤동주 시인의 촛불을 먼저 들기 시작하였다


내 시의 출발점은 <징검다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예대에는 두 개의 문학상이 있었다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다 학보사에서 주관하는 예대문학상이 있었고 교지에서 주관하는 예장문학상이 있었다 이병률 시인은 예대학보사 편집장이었다 그리고 교지 편집장은 이기인 시인으로 기억하고 있다 나는 그 당시 불교 동아리 예불회 회장이었다 1987년 이병률 시인은 예대문학상을 받았고 나는 같은 해에 예장문학상을 받았다 그렇게 출발은 같았으나 지금은 너무나 먼 거리에 있다 나는 앞으로 이병률 시인에게 많은 것들을 배워야만 한다 이병률 시인에게는 참으로 배울 점이 많다 훌륭한 인격과 뛰어난 예술혼을 가진 아름다운 예술가에게 나는 앞으로 더 많은 것들을 배워야만 한다 나는 오늘 누군가에게서 나의 아주 옛날 원고 사진을 받았다 분명히 내가 마라톤 타자기로 직접 썼던 원고다 그런데 왜 저 원고가 갈무리 문학회 40주년 기념식장에 있었을까 어쩌면 나의 문학도 저 갈무리 문학회와 40년을 함께 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때 막 시작하는 갈무리문학회 임호상 시인에게 보낸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 어린 학생이 지금은 소리기획 사장이 되었고 여수살롱 대표가 되어 여수의 중추적인 시인이 되어 있다 세월이 참으로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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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IsRYVrXcUJs?si=i7r_wt0AeM2g9AB8







04화 징검다리

평생학교 서천꽃밭 달문moon

이어도공화국

모래 한 알의 꿈

취우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 전집』

배진성 시인의 꿈삶글 0006

0. 윤동주 시인의 <꿈삶글>

10. 병아리 (1~10)

사이버 예절서당(노자 도덕경 1강)

9. (동시) 고향집

책 소개 접기

7. 남(南)쪽 하늘

남(南)쪽 하늘

김왕식님의블로그 : 네이버 블로그

평론가 청람 김왕식의 브런치스토리

11. 오줌싸개 지도

13. 짝수갑





내가 다시 윤동주 시인을 만나는 이유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다시 윤동주 시인을 만나는 이유는 하나다. 내 시의 출발점이었던 윤동주 시인을 다시 만나서 새롭게 검검하고 더욱 새롭게 다시 출발하기 위함이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내가 다른 곳에서 허송세월을 보내는 동안 세상은 많이 바뀌었고 우리나라 문학판 또한 많이 변했다. 그동안 윤동주 시인에 관한 자료들도 많이 정리가 되었고 나 또한 이제는 나의 문학을 정리하고 좀 더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보아야만 할 때가 되었다. 나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또다시 윤동주 시인의 촛불을 함께 들고 내가 가야 할 올바른 길을 찾아서 끝까지 가야만 한다.


윤동주 시인에서 출발하여 김소월, 한용운, 이육사, 백석, 정지용, 이상, 김영랑, 김수영, 이용악, 김종삼, 김춘수, 오규원, 정현종, 황동규, 이성복, 기형도, 신경림, 박노해, 김용택, 안도현, 이산하, 이재무, 이능표, 장석주, 김인호, 김도수, 이원규, 박두규, 박남준, 김세홍, 신병은, 박해미, 나희덕, 김기택, 정끝별, 이병률, 문태준, 조현석, 김해화, 김남권, 신휘, 현택훈, 김왕식, 이희국...., 많은 시인들의 장점들을 배우면서 나의 문학을 완성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나는 나 자신을 더욱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는 사실 겨우 출발만 하였고 문학의 길을 본격적으로 가지 못했다. 시인의 길을 제대로 가지 못했다. 그동안의 나의 과오를 철저히 분석하여 새롭게 출발하고자 반성하고 반성하고 또다시 반성하기 위하여 윤동주 시인의 촛불을 먼저 들기 시작하였다.


내 시의 출발점은 <징검다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예대에는 두 개의 문학상이 있었다.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다. 학보사에서 주관하는 예대문학상이 있었고 교지에서 주관하는 예장문학상이 있었다. 이병률 시인은 예대학보사 편집장이었다. 그리고 교지 편집장은 이기인 시인으로 기억하고 있다. 나는 그 당시 불교 동아리 예불회 회장이었다. 1987년 이병률 시인은 예대문학상을 받았고 나는 같은 해에 예장문학상을 받았다. 그렇게 출발은 같았으나 지금은 너무나 먼 거리에 있다. 나는 앞으로 이병률 시인에게 많은 것들을 배워야만 한다. 이병률 시인에게는 참으로 배울 점이 많다. 훌륭한 인격과 뛰어난 예술혼을 가진 아름다운 예술가에게 나는 앞으로 많은 것들을 배워야만 한다.




징검다리



하나
길이었다 덜 자란 몸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
어머니는 방물을 파셨고 새벽 샛강의
입김 자욱한 안갯속으로 떠나시곤 했다
나는 담장 밑에 펼쳐놓은 꼬막껍질에
쑥국 끓이기 놀이를 하며 자랐다
노을만 어렵게 어렵게 감아 들이던
바람개비가 스스로의 바람결을 가늠할 수 있을 때
물오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파랑 간짓대 들고
오리 떼를 몰아내던 골목이 심하게 흔들렸다
어머니 뒷모습을 지우던 안갯속으로
하얀 꽁무니가 사라지고
나도 그 속으로 따라 날아가고 싶었다


할아버지 산소가 보이는 징검다리 사이로 햇살이
주검처럼 부서지며 흘러갔다 하류에서
한 몸으로 몸을 섞기 위해 취로사업 나가신
아버지가 무너진 둑에 묻히고 작업복이 천수답
허수아비에 내걸리던 날도 나는 그 저수지 뚝에서
삐비 꽃을 뽑아먹고 돌아오는 길
가로수 구멍 속에 몇 개의 돌을 더 던져 넣었다
어머니가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줄도 몰랐다
그 해 여름 장마는 담장의 발목을 적셨고
두꺼비 같은 우리 식구들은
한밤중에 회관으로 기어 올라갔었다


학교 앞 코스모스로 기다리기를 즐겼다
하학종소리 사이로 보이는 형의 검정고무신 앞은
발가락이 먼저 나와 있었고 생활 보호 대상자
가족 앞으로 달려오는 옥수수 빵과 건빵
나는 그것이 좋았다 우리는 뿔 필통 속 몽당연필로
흔, 들, 리, 며, 징, 검, 다, 리, 건, 넜, 다,
끈이 풀리는 소리로 흘러가는 여울물 소리는
우리를 다시 묶어주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징검다리를 잘도 건너 다녔다


수수깡으로 안경을 만들어 끼고 기차놀이하던
우리들은 그 새끼줄 속에서 자유로웠다
우리들의 기차는 징검다리를 비로소 건너 다녔고
오후의 서툰 기적소리 울리며
동구 밖까지 나가 놀던 소아마비 동생은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못했다 찾다가 찾아보다가
어린 집배원이 된 큰 형도
동생의 소식은 가져오지 못하고 한 떼
건너가는 동네 아이들만 오래도록 바라보곤 했다

다섯
여울물 소리는 끈이 풀리는 소리였고
또다시 묶이는 소리였다 방직공장에 취직했던
누이가 파란 눈의 아이를 보듬고 돌아와
빨래터에는 방망이질 소리가 잠들지 않았고
헛발 짚은 어머니는 물속에 더욱 자주 빠지셨다
……………… 배고픔과 어머니 ………………
들판에 흐드러진 달맞이꽃 사이로 그렇게 어머니는
젖은 보름달을 이고 늦게 돌아오시곤 했다



시인의 집이 시를 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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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이 글쎄 시를 쓰고 있었다

부처님 오신 날도 시를 쓰고 있었다

검은 돌담에 푸른 담쟁이 가득했다

돌담에서 햇살의 파도소리 들렸다

조심히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푸른 잔디의 파도가 잔잔해졌다

뱀과 고양이가 장난을 치고 있었다

아기 호랑이와 뱀이 놀고 있었다

감나무 아래서 시인의 어머니가

사시(斜視)로 시집을 읽고 계셨다

방에서 시인은 남포등을 켜고

타자기로 시를 두드리고 있었다

오래된 라디오는

그리운 성산포를 낭송하고 있었다

시인의 친구들은

카페로 리모델링한 창고에 있었다

우영팟에서는 감귤꽃을 모두 벗은

어린 알몸들이 수영을 하고 있었다

시인의 집은 조용히 시의 집이 되고 있었다



이병률 시인의 제주도 성산일출봉 작업실에서



이병률 시인의 성산포 작업실에 왔다. 나의 집은 제주시 외도에 있고 작업실은 마라도가 보이는 화순에 있다. 그러니까 성산포와는 정 반대쪽에 있다. 그래서 평소에는 성산포 쪽에는 잘 오지 못한다. 이번 시집을 내면서 이병률 시인과 연락이 되었고 이곳에 작업실이 있는 것도 알았다. 이병률 시인은 이곳에 잘 오지 못한다고 하였다. 혹시나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없을까 하여 이곳까지 1시간 넘게 운전을 해서 왔다. 집은 사용을 하지 않으면 빨리 낡기 때문에 통풍이라도 시켜주고 싶어서 왔다.


외국여행을 자주 하는 이병률 시인은 코로나 때문에 외국에 자주 가지 못해서 이곳 제주도에 자주 온 듯하다. 이제 코로나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드니 다시 외국으로 나가면서 제주도 작업실은 잘 사용을 하지 않는 것 같다. 작업실을 둘러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나 깔끔하게 정돈이 잘 되어있어서 놀랐다. 이병률 시인의 성격을 알 수 있었다. 이 작업실은 사실 제주도 오조리 시인으로 유명한 강중훈 시인의 어머니께서 사시던 집이었다. 길가에 있는 집으로 집 앞에 바로 주차장도 넓게 있어서 편리하고 좋다.


푸른 담쟁이가 덮고 있는 돌담이 나를 맞는다. 이병률 시인이 알려준 방법으로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푸른 잔디가 깔려있다. 마당에도 돌담이 있고 왼쪽에는 돌담 너머로 감귤나무가 자라고 있다. 대문이 왼쪽으로 치우쳐져 있어서 오른쪽 낮은 돌담 뒤에는 감나무와 벚나무가 있는데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가지치기를 심하게 한 상태다. 감나무 아래 강중훈 시인의 시가 새겨져 있다. 바닥에 펼쳐진 책모양의 돌에 새겨져 있다.



어머니



앞뜰

감나무 낡은 의자에

촉수로 매달린

물음표

살짝 비틀어

사시(斜視)로 쳐다보며 앉으신

당신


2014년 8월

아들 강중훈 짓고 세우다.



어쩌면 이 집은 강중훈 시인의 생가가 아닐까 혼자 생각을 한다. 나중에 이 집은 강중훈 시인의 문학관이 들어서지 않을까 혼자 상상을 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 작은 집은 우리 시대의 시인을 탄생시킨 집이며 또한 현재도 이병률 시인의 작업실로 사용되고 있으니 시인의 집이 분명하다. 이런 집이라면 아주 먼 훗날까지 시인의 집으로 남아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어본다.


대문을 열고 들어오면 바로 이 집의 중심 건물인 안채가 보인다. 하지만 나의 시선은 오른쪽 창고 건물로 먼저 간다. 문이 현대적으로 바뀐 것으로 보아 리모델링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바로 그 문 앞에 호피무늬 고양이 한 마리 햇볕을 쪼이고 있다. 내가 들어와도 자세를 바꾸지 않는다. 작은 뱀 한 마리 지나가니 그 뱀과 장난을 치다가 그냥 보내준다. 어쩌면 뱀과도 친구가 아닐까 나 혼자 생각을 한다.


우선 마당과 우영팟을 둘러본다. 감귤나무 십여 그루가 심어져 있다. 마당과 우영팟 경계에도 낮은 돌담이 쌓여 있다. 어쩌면 이 낮은 돌담이 좋아서 작업실로 정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돌담이 참 예쁘다. 바깥쪽 빙 둘러 울타리도 돌담이고 마당과 우영팟 경계도 낮은 돌담으로 되어있다. 시인의 집답게 미적 감각이 살아있다. 작업실 책상에서 보면 왼쪽은 반달모양이고 오른쪽은 반듯한 돌담이 예술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안채부터 둘러본다. 어쩌면 제주도 전통가옥에다 앞에 방충망과 유리문을 나중에 추가로 설치를 했을 것만 같다. 유리문을 열면 좁은 마루가 나오고 중간에 대청마루가 나온다. 제주도 전통 가옥들은 가운데 대청마루가 있고 양쪽에 방이 있는 구조다. 이 작업실 역시 그렇다. 기본적이 구조는 그대로 두고 화장실 등만 현대식으로 개조를 하였다. 첫인상이 영락없는 시인의 집이다. 책상과 책꽂이가 중심을 잡고 있다. 나머지는 대부분 생략되어 있다.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이 있고 옛날 선풍기와 옛날 라디오 등이 장식품으로 있고 우리 세대의 시인답게 타자기가 있다. 책상에는 잘 깎아진 연필들이 꽂혀있다.


이 작업실에서 가장 신경을 쓴 곳이 부엌이 아닐까 싶다. 이병률 시인은 요리를 좋아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사람들을 불러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준다는 소문이 있다. 창고를 통째로 부엌으로 개조해 놓았다. 부엌이라기보다는 작은 카페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이병률 시인은 역시 멋진 시인이다. 이렇게 멋진 시인이 나의 친구라는 사실이 참으로 좋다.


이 시인의 집에서 나는 전영애 선생님께서 지으신『시인의 집』 책을 읽는다. 나도 이제 시인의 집을 하나 만들어야겠다. 사진과 동영상은 나의 시인의 집을 지을 때 참고하려고 보관하기로 한다. 이 시인의 집은 조천에 있다는 손 세실리아 시인의 집과 많이 닮아 있다. 나는 이병률 시인의 작업실이 훨씬 더 좋다. 여기는 영업집이 아니라 창작의 공간이어서 더욱 좋다.


푸르른 봄날의 여행



이병률 시인과 함께 했던 남산 시절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이 나의 봄날의 씨앗이었다

마음이 아프다 시를 써야겠다

마음이 아프니 시를 써야 한다

몸이 아프면 운동을 하고 마음이 아프면 시를 써라

배진성이 돌아왔다 배진성 시인이 돌아왔다

시야, 잘 있었느냐

내가 돌아왔다

나는 이제

너에게 나를 보낸다

나도 이제 달을 따라간다

나는 젊은 시절에

시는 사찰에서 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렇게 사찰의 범종소리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이제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시는 언어로 만든 사찰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언어로 만든 사찰 처마 끝에 풍경 하나 달아놓고

물고기 한 마리 푸른 하늘을 푸르게 헤엄쳐서

당신의 푸른 가슴속으로 날아가는 바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자, 이제 내가 다시 돌아왔으니

우리 함께 푸른 바람의 춤을 푸른 풍경소리와 함께 출까요

나는 너에게로 가서 너의 가슴속에서 푸르게 살아보려고

푸른 바람과 함께 푸른 너에게 푸른 나를 보낸다

나를 통째로 잘 받아서 우리 함께 아름다운 시로 살아보자


봄날의 여행


물구나무서기로 오는 새벽

잠 밖으로 따라 나온 숫 갈매기가

나이 크기만큼 열린 새벽 속으로

날아올랐다 몸으로 내린 햇살이 나를

넘어뜨렸다 벌렁 누워버린 그림자쯤으로

낮게 젖어있는 나도 일어서 걷고 싶었다

벌건 대낮에도 속살을 벗어던지는

분수처럼 제자리 뛰기라도 해야 했다

나는 강의실 귀퉁이 태양이 버린

그늘에 그늘로 앉아 그 속으로 달려오는 햇발의

발자국 소리에 귀 기울였다 기웃거리는

얼굴들이 까마득히 지워져 깊은 칠판처럼

나도 나를 비워버리고 개나리 빗어주는

남서풍 속살이 되고 싶다 바람이 된 나는

바람보다 오랜 기슭을 넘어간다

어깨너머로 휘파람처럼 물러서던 어린 날

모래톱에 묻어두었던 발자국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여울물 소리를 실패에 감으며

부르시던 어머니보다 나이 크기만큼 먼저

도착하여 뒤돌아보면 징검다리에 서 계시는

어머니는 늘 강아지쯤으로만 바라보셨다

그러나 나는 들꽃 속에 숨어 손바닥에

귀 기울이고 잠든 강아지풀을 흔들면 복실이로

깨어나 꼬리 흔들며 다가오는 것이 좋았다

오요요, 오요요, 오요요요, 요요요요요요 ………,

손금을 밟으며 기어 온다 나도

어머니 손금 속으로 기어들고 싶은데

문득 돌아와 보면 시가지의 가슴마다

초라하게 작아진 희망의 형식을 안고

바람은 바람을 불며 바람 불어 간다


이병률 시인은 나의 백미러다


이병률 시인은 나의 거울이다

나를 돌아보고 반성하게 한다

이병률 시인은 나의 백미러다

뒤를 보면서 앞으로 가게 한다


처음부터 다시 읽는다.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한다』와 『끌림』부터 다시 읽는다. 이병률 시인의 첫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한다』에는 내가 존경하는 최하림 시인, 마종기 시인, 나희덕 시인께서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있다. 그만큼 첫 시집에 공을 들였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에 비하여 나의 첫 시집은 어떻게 나오게 되었던가?


『끌림』초판본과 재판본을 비교하며 읽는다. 느낌이 많이 다르다. 초판본은 랜덤하우스코리아(주)에서 2005년 7월 1일에 나왔는데 내가 좋아하는 김민정 시인이 만들었다. 김민정 시인은 역시 책을 잘 만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재판은 이병률 시인이 직접 만들었을 것이다. 재판 판권을 보니 2010년 7월 1일, 딱 5년 만에 새로운 옷을 입었다. 이병률 시인이 대표로 있는 달 출판사와 김민정 시인이 대표로 있는 난다 출판사는 ㈜문학동네의 같은 계열사이니 서로 긴밀한 관계에 있을 것이다.


어느 해 초가을 이맘때쯤 나에게 써준 말이 자꾸만 생각이 난다. 아니, 행사장에서 받은 책이었으니 다른 사람들에게도 같은 말을 써 주었을 것이다. “좋아하는 일만 하면서 살아요” 하지만 나는 아쉽게도 그렇게 살지 못했다. 지금부터라도 그의 말처럼 좋아하는 일만 하면서 살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좋아하면서 좋은 일만 하면서 살고 싶다. 그런 측면에서라도 나는 먼저 『끌림』 같은 좋은 책을 한 권 만들고 싶다.


『끌림』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티베트의 속담을 알려주는 부분이다. ‘내일과 다음 생 중에, 어느 것이 먼저 찾아올지 우리는 결코 알 수가 없다.’ 나는 이 의미 있는 속담을 이병률 시인에게 배웠다. 우리들 모두는 어쩌면 내일이 오기 전에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오늘, 지금 당장을 행복하게 살아야만 한다. 우리들이 흔히 알고 있는 말처럼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이 그토록 살고 싶었던 내일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우리들은 오늘 최선을 다하여 행복하게 살아야만 하리라. 그런데 언제나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실천이 문제다.


「#026 내일과 다음 생 가운데」 사진이 참으로 흥미롭다. 잘은 모르겠는데 노점상 같기도 하고 그냥 길가에 앉아있는 것 같기도 한 사내가 웃고 있다. 사내 옆에는 딸 같은 여자 아이가 앉아 있고, 아들 같은 아기가 고추를 드러내놓고 포대 위에 누워서 자고 있다. 그런데 우리들의 미래 같은 아기는 죽은 듯이 잠들어 있고, 사내의 등 뒤에 앉아 있는 딸 같은 여자 아이 표정은 의뭉스러운데, 호객행위를 하는 것인지 잘 알 수 없지만 사내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번지고 있다. 하얀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고 있다. 그런데 사내의 왼손이 흔들리고 있다. 궁금하여 카메라 노트를 찾아보니 캄보디아 포이펫이라고 쓰여 있다. 그래서 다시 재판의 카메라 노트를 찾아보니 “하루 종일 내 옆에서 부채질을 해주세요” 아, 그거였구나! 잠든 아이에게 부채질을 하고 있었구나! 그래서 저런 표정이 나오고 있었구나. 아버지의 표정과 딸 혹은 누나의 표정이……


『끌림』은 책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사진첩이라고 하면 좋을 것이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추억이 담겨있는 사진이며 기억이며 아름다운 시화로 만들어진 시와 글이 있는 화첩이다.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이다. 아니, 사랑이 고픈 청춘들을 위한 열정과 사랑과 그리움이 가득한 사랑의 엽서이자 아름다운 러브레터이다. 하지만 내가 만드는 나의 책은 『끌림』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어쩌면 이병률 시인과는 정 반대의 삶을 살았고 추구하는 것도 다를 것이다. 나는 어쩌면 이병률 시인보다는 문태준 시인의 정서에 더 가까울 것이다. 이병률 시인이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깨닫고 사유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한 곳에서 같은 곳을 오래 그리고 깊이 뚫어지게 바라보는 사람일 것이다. 이병률 시인이 많은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스타일이라면 나는 오직 한 사람만을 오래도록 좋아하고 사랑하고 싶은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어쩌랴. 나는 그런 이병률 시인이 너무나 좋은데 어쩌란 말인가.


이병률 시인을 생각한다


늦은 밤 산책을 한다. 아픈 어깨 스트레칭을 하면서 산책을 한다. 산책을 하면서 이병률 시인을 생각한다. <이어도공화국 6 - 서천꽃밭 달문 moon> 시집 원고를 메일로 보냈다. 표사를 이병률 시인이 써주기로 하였다. 참 고맙다. 그동안 연락도 자주 하지 못했는데 선뜻 써주겠다고 하여 참으로 고맙다. 나는 그동안 문단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서 살았다. 나는 다시 문단 안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문학활동을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내가 언제 이 지상에서 떠나게 될지 모르지만 떠나는 그날까지 문인들과 함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나의 작은 숨결이라도 보태야만 할 것이다.


나와는 달리 이병률 시인은 그동안 참 잘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배우처럼 잘 생긴 외모와 뼛속까지 시인인 그는 마음이 참으로 따뜻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간직하고 참으로 잘 살아왔다. 그에게서 나는 많은 것들을 배운다. 그는 선한 영향력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길을 알려주었으며 또한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도 받고 있다. 앞으로 나에게도 선한 영향력으로 나를 깨달음의 세상으로 인도할 것 같아서 마음이 설렌다.


혼자가 혼자에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을 그가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파스칼의 말을 그가 말했다

혼자가 혼자에게 그렇게 말을 하였다

나는 이제 혼자 살기의 달인이 되었다

병률이는 저렇게 성장했는데

나는 그동안 무엇을 하고 놀았던가

나는 왜 그렇게 꿈만 꾸고 살았던가


이병률 시인의 북콘서트 소식을 듣고 예약을 하였다. 기저질환자인 나는 코로나 걱정이 되었지만 꼭 보고 싶어서 예약을 하였다. 백신 접종도 2차까지 마친 상태여서 꼭 참여하고 싶었다. 코로나 발생 이후 나의 첫 행사 참여가 될 것이다. 그만큼 나는 그가 보고 싶었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를 생각했다.


산방독서회에서 함께 갔다. 서귀포예술의 전당 주차장에서 현택훈 시인과 김신숙 시인을 만났다. 코로나 방역을 위하여 체온을 측정하고 제주안심코드 QR 인증도 하였다. 저 멀리 이병률 시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리운 사람은 뒤통수만 보여도 좋다고 하였던가. 시작하려면 시간이 좀 있는 것 같아서 그를 따라갔다. 분장실에서 나를 알아보고 격하게 안아주었다. 내가 오히려 당황하였다. 참 오랜만에 만나는 것인데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대단했다. 그가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은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작업실이 성산포 쪽에 있다는 말을 듣고 다음을 기약하며 연락처를 받았다.


곧 북콘서트가 시작되었다. 서귀포시민의 책 읽기 위원회 회장의 간단한 인사말이 있었고 소금인형의 노래로 문을 열었다.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으로'라는 노래가 좋았다. 이병률 시인의 '혼자가 혼자에게 말을 걸다'라는 이름으로 강연이 시작되었다. 조용조용한 말투로,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그러면서도 힘 있고 폭넓은 철학의 세계로 이끌어가는 모습이 믿음직스러웠다. 일반인들에게도 좋은 내용이었지만 특히 청소년들에게 꼭 필요한 강의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고등학생들이나 대학생들에게 꼭 필요한 좋은 강의가 될 것이므로 많은 학교에서는 반드시 초청하여 강의할 수 있도록 강력히 추천합니다.)


화면에 나타나는 글자들보다 화면에 나타나지 않는, 행간에 채워 넣는 내용이 더욱 좋았다. 그래서 나는 혹시, 강의 자료를 공유하면 병률이에게 불이익이 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오히려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화면 몇 개를 공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혹시라도 이것이 다가 아닐까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 어디에서 초청하여 강의를 듣더라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니 많은 곳에서 그를 초청하여 좋은 자리 많이 만들어줄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는 남들처럼 살고 싶지 않아서 파리에 갔다고 하였다. 26살 때 파리로 가서 2년을 살았다고 하였다. 공부하라고 하는 부모님의 잔소리가 싫어서 갔다고 하였다. 공부를 더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하는 부모님의 잔소리가 싫어서 갔다고 하였다. 남들처럼 좋은 직장에 들어가라고 하는 잔소리가 싫어서 갔다고 하였다. 1개월만 여행하고 돌아오겠다고 떠나서 파리에서 2년을 살았다고 하였다. 참으로 용감한 이병률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2년, 다소 긴 그 혼자만의 여행이 그를 그렇게 바꾸어놓았다고 하였다.


내가 남몰래 25년을 함께 살아온 나의 심장병과 이별을 하고 있는 바로 그 시간에 이병률은 피리에서 새롭게 부활을 하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니 눈물이 나기까지 하였다. 참으로 이병률이 자랑스럽기까지 하였다. 아이슬란드 이야기와 폴란드와 노르웨이 사람들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얼마 전에 제주도의 어느 중학교에서 강연하고 인연이 되었다는 어느 중학생과 짜장면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제주도에서 작업실을 얻는 과정과 그 작업실에서의 사유도 흥미로웠다. '바람에 동백나무가 잠시 흔들렸습니다'는 참으로 아름다운 시라는 생각을 하였다. 이병률은 어느 누구보다도 시를 잘 쓰고 산문을 잘 쓰고 사진을 작 찍고 술을 잘 마시고 식물을 잘 기르고 사랑을 잘하는 시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이병률 시인은 책을 너무나 잘 만드는 시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1인당 1.6권의 책을 쓴다는 말도 좋았고 겨울을 좋아한다는 말도 좋았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을 그도 좋아해서 좋았다. 파스칼의 이 말을 오래전부터 나는 좋아하였다. 내가 만드는 이어도공화국의 핵심 키워드 또한 이 말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 혼자만의 방" 병률이는 이미 진작부터 이 말을 너무나 잘 실천하고 있었다.


"인류의 모든 문제는 홀로 방 안에 조용히 앉아 있지 못하는 무능함에서 유래한다."

ㅡ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 (1654)


*

좋은 행사도 하시고 좋은 책도 주셔서 고맙습니다. 서귀포시민의 책 읽기 위원회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코로나 방역 준수를 위하여 미리 저자 사인도 받아서 나누어주시는 그 섬세하고 의미 있는 일들이 너무나 고맙고 너무나 감사하고 모두가 덕분이어서 참으로 아름답고 의미 있는 북콘서트였음에 다시 한번 절을 합니다.


이병률 작가의 북콘서트를 듣고

함께 간 제주 사람들과 저녁을 먹으면서

제주 4.3 희생자들 한 사람 당

1억 원가량의 보상금을 받게 되었다며

후손들이 그 돈 때문에

서로 많이 다툴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요즘 제주도 사람들은 보상금에 집중되고 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꿈을 꾸었다

다섯 명이 일조가 되어

석탄 상탄 작업을 하는 꿈을 꾸었다

한 사람은 석탄을 캐고

한 사람은 석탄을 두레박에 퍼 담고

한 사람은 두레박을 끌어올리고

한 사람은 두레박에서 컨베이어 벨트에 쏟아붓고

한 사람은 컨베이어 벨트를 운전하고

아, 너무나 힘든 일을 기계처럼 하고 있었다

누구 하나라도 쉬면 일이 진행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쉬지 못하고 끙끙거렸다

잠을 깨서 생각하니

어쩌면 나의 진짜 현실이 그런 것은 아닐까

다시 한번 깊이 나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평생학교 서천꽃밭 달문moon



평이란 무엇일까

생이란 무엇일까

학이란 무엇일까

교란 무엇일까

그리하여

평생학교가 있다


나는 아직 본격적으로 이어도공화국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내가 꿈꾸는 이어도공화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산이나 아름다운 섬이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산이나 섬을 구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우선 이어도공화국을 만들기 위한 이어도공화국 베이스캠프를 만든다. 그 전초기지를 나는 <평생학교> 혹은 <달문moon> 혹은 <이어도서천꽃밭>이라고 부른다. 평생학교는 평화학교와 생명학교를 줄여서 부르는 이름이다. 그런데 때에 따라서는 이어도공화국 베이스캠프를 그냥 <이어도공화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오늘 아침에는 오랜만에 산책을 나갔다. 일곱 시가 되어도 조금 어두웠다. ‘퍼물’ 바로 옆 민박집 주차장에 버스가 서 있었다. 버스 안에는 불도 켜져 있었다. 가방을 등에 진 사람들이 보였다. 민박집 단체 손님들이 일찍부터 어디론가 출발하려고 준비하는 줄 알았다. 자세히 보니 민박집 손님들이 아니었다. 좀 더 지켜보니, 그들은 오늘 ‘퍼물논’의 유채 나물을 수확하려고 온 일꾼들이었다. 그들은 김이 피어오르는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버스에서 내리고 있었다. 밭으로 사용되고 있는 논 입구에 모닥불을 피우고 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평생학교 ‘꿈숲’에서 길 하나를 건너면 평생학교 ‘꿈섬’이 나온다. 화순은 강정과 함께 물이 많고 논이 많기로 유명하다. 옛날부터 ‘일 강정 이 화순’이라는 말이 전해져 오고 있다. 제주도는 평소에는 물이 없는 건천이 많은데 화순은 물이 마르지 않는 안덕계곡과 용천수들이 많다. 그리하여 물소리를 좋아하는 나는 물길을 따라 산책하는 것을 좋아한다. 물소리를 들으며 산책을 하고 돌아오면 언제나 마음속 깊은 곳까지 깨끗하게 씻겨진 나를 발견할 수 있다.


‘퍼물논’으로 알려진 평생학교 ‘꿈섬’을 나는 연꽃단지로 만들고 싶은데 약 5천 평 되는 논 중에 이제 겨우 5백 평 확보하여 연꽃을 심고 관찰을 하는 중에 있다. 연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으로 늘 연꽃 같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연꽃단지 논을 지나면 개끄리민교가 나온다. 다리 아래 개끄리민소가 있어서 붙여진 다리 이름이다. 바위 속으로 개를 끌고 들어가는 것처럼 깊이 파여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물길이 약간 꺾어지는 부분인데 아마도 바위 중에서 비교적 약한 부분이 물의 힘으로 파인 듯하다.


개끄리민교를 건너가면 월라봉이 나오고 올레길 9코스가 나온다. 그리고 다리를 건너지 않고 왼쪽으로 올라가면 도채비빌레와 보막은소가 나오고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황개천과 월라봉 단애 앞바다가 나온다. 박수기정에서 바라보는 마라도 풍경도 좋고 더 멀리 보일 것 같은 이어도 바다도 아름답다.


나는 우선 왼쪽으로 올라간다. 이 길은 원래 수로가 있었던 곳인데 몇 년 전에 관에서 데크 공사를 하여 새로 만든 길이다. 데크 공사를 하기 전에 나는 보막은소에서 퍼물논까지 이어지는 수로를 정비하기 위해 가시덤불을 헤치고 다니던 길이었다. 이 수로는 김광종이라는 사람이 바위를 뚫고 만든 인공 수로였다. 지금은 논보다 밭이 더 인기가 있어서 밭으로 되돌아가는 추세에 있지만, 논이 부족했던 옛날에는 참으로 위대한 공사였던 것이다. 최근까지 퍼물논 주인들은 퍼물논에서 벼농사를 지어 제사상에 곤밥(쌀밥) 올리는 것에 큰 의미를 두었지만 이제 퍼물논에서 벼농사짓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도채비빌레 바위 언덕에 안내판도 있고, 퍼물논 답회에서 오래전에 세웠다는 공덕비도 세워져 있는데, 데크 공사를 한 이후에 오히려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어지고 말았다. 옛날에는 이 공덕비를 찾아오는 문화유산답사팀 사람들이 가끔 보이기도 했는데 이제는 아예 발길이 뚝 끊어지고 말았다.


나는 이 길을 볼 때마다 마음이 참 많이 아프다. 길 만드는 일이 유행처럼 번지던 시절에 이 데크 길은 만들어졌다. 계곡이 깊고 위험하여 1년 넘게 난공사를 하였다. 공사비도 엄청나게 들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이 길은 개통도 하지 못하고 벌써 길이 망가지고 말았다. 공사 진행 중에 세워진 출입금지 간판은 지금도 그대로 있다. 글씨 색깔이 다 닳아 없어진 채로 버려져 있다. 우리 국민들의 혈세가 아무렇지 않게 낭비되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길 말고도 내가 아는 많은 길들이 이와 비슷한 경우가 너무나 많았다. 지금도 어디선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이것저것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만든 이후에 잘 관리하고 잘 활용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김광종영세불망비’는 나란히 두 개가 서 있다. 1938년 5월에 세운 것과 1968년 4월에 세운 것이 길을 마주 보고 나란히 서 있다. 이 비석들이 있는 곳에서 계곡으로 내려가면 당시 수로 공사를 했던 흔적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길은 이제 나 혼자만의 전용 산책길이 되고 말았다. 가끔 낫을 들고 가서 가시덩굴을 쳐내야 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나는 이 길이 참 좋다. 물소리도 좋고 김광종 선생님의 뜨거운 가슴을 느낄 수 있어서 더욱 좋다. 바위를 쪼아대는 정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처음에는 세금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깊이 감사하고 있다. 안덕계곡의 거센 급물살로 망가진 구간도 새로 개선하였다. 물길보다 높이를 더 높여 수리를 하여서 지금은 아주 좋아졌다. 덕분에,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하나 둘 이 길을 찾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듯하다.


나는 오늘 아침 ‘불가능을 넘어선 사람 김광종’ 안내판을 다시 한번 자세히 읽는다. 그리고 10년이라는 세월에 대하여 좀 더 깊이 생각한다. 그러면서 나는 각오를 새롭게 하고 있는 중에 있다.


이 안내판에는 12장의 만화가 그려져 있다. 여행을 온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동네 어르신이 등장하여 김광종 선생님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 있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아들과 아버지가 ‘김광종영세불망비’에 적혀있는 내용을 본다. ‘穿山引水(천산인수) 漢西開始(한서개시) 多費己財(다비기재) 以裕後世(이유후세) 食我香稻(식아향칭) 賴公德基(송공덕기) 功擬召父(공의소부) 歲祈田祖(세기전조)’ ― 산을 뚫고 물을 당겨 한라산 서쪽에 논을 개척하는데 자신의 재산을 많이 털어 후세를 넉넉하게 하였다. 우리에게 향기로운 쌀을 먹게 한 것은 공의 덕기에 기인했으니 그 공이 소부에 비길 만하여 해마다 전조로 제사를 지낸다 ―


이 비석을 보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물으니, 아버지가 아들에게 설명을 한다. ‘김광종(金光宗)이 관개농업을 할 목적으로 사재를 털어 수리시설 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서기 1938년 5월 화순답회(和順畓會)에서 건립한 기념비지’ 라고 대답한다. ‘비문에 의하면 순조 32년 착수하여 10년 만인 헌종 7년에 완공하였고 수로 길이는 안덕계곡에서부터 1,100m로 되어 있다는구나’라고 말하자 아들이 ‘와, 10년 동안 수로공사를 했다는 거예요?’ 라며 되묻는다.


그러자 동네 어르신이 등장하여 설명을 덧붙인다. ‘김광종은 본디 화순 사람이 아닌데도 볼 일이 있어 이곳에 왔다가 이 지역의 농지가 넓고, 가까이에 수량이 풍부한 안덕계곡이 있음에도 전부 밭인 것을 안타깝게 여겼지’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모든 가산을 정리하고 안덕계곡의 지류인 황개천 암반하상(巖盤河床)에 흐르는 냇물을 밭으로 끌어댈 수로공사에 착수했어’ ‘처음에 그의 계획을 지역주민에게 설명하고 동참할 것을 호소했으나 아무도 나서지 않아 겨우 석수(石手) 두어 명을 구하여 황개천을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는 암벽을 뚫기 시작했지’ ‘이를 보고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다. 몇 년이 지나도 수로공사는 그리 진척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끈질기게 암벽에 달라붙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철매로 암반을 깨어나갔어’ ‘애초에 이를 수 없는 역사(役事)를 한다고 비웃던 사람들이 그를 측은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그의 집념이 그 누구도 비웃게 놔두지 않았던 것이었지’ ‘그가 약 700m나 되는 암반을 뚫고 마침내 물길을 내니 사람들은 감복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밭에 물을 대려고 보에다 물꼬를 이으니 도착하기도 전에 전부 새어버리는 게 아닌가’ ‘그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도수로(道水路)를 수정하여 재정비하고 봇물이 새는 것을 방지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다시 몇 년이 흘렀다. 드디어 봇물이 새는 걸 막는 데 성공했다.’ ‘이를 지켜보던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마지막 공정을 거들었다. 암반에 첫 철 매질을 한 지 꼭 십 년이 되는 해 9월에 드디어 1만여 평에 이르는 밭에 물을 대니 땅이 생긴 이래 늘 메말랐던 농토가 순식간에 논으로 바뀌었지’ ‘이후 밭을 논으로 눈 깜짝할 새에 바꿨다는 뜻으로 이 수로 끝에 해당하는 황개천언덕 위 암반지대를 도채비빌레라 불렀다고 하지’


그러자 이 이야기를 다 들은 아들이 ‘우와~ 김광종이라는 분은 끈기가 정말 대단한 분이시군요’ 라며 감탄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 안내판이다.


내가 좀 살아보니 정말로 그런 것 같다. 무슨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적어도 10년은 꾸준히 해야만 이룰 수 있을 것만 같다. 10년이라는 세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세월이다. 정말 좋은 시인이 되기 위해서도 한 10년은 공부를 해야만 하리라. 하물며, 이어도공화국을 만드는 일이야 적어도 100년은 걸리지 않을까? 그런 장기전을 생각하며 마음을 가다듬는 아침이다.


물길 / 강산


나는 하나의 물방울

아버지가 흘리신 물방울

물은 오늘도 흐른다


강은 흐르지 않고

물이 흐를 수 있도록

가슴을 비워준다


물이 강의 가슴을 두드린다

귀를 기울이면 들린다

망치소리도 들리고

정으로 쪼아대는 소리도 들린다


물은 그렇게 스스로

물길을 만들며 흐른다

내가 흘린 물 한 방울

아들의 땀방울이 흐른다


물길은 그렇게 바다로 흐른다

푸른 지구를 따라

둥그런 수평선을 만든다














13. 짝수갑



by강산

Sep 21. 2024


아래로

짝수갑



<창구멍>과 <기와장내외> 사이에 제목만 있는 시가 있다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제목은 확실해 보인다

<짝수갑>이란 시가 있는데 여기에 쓰지 않은 것인지

혹은 다른 어떤 이유가 있는지에 대하여 알 수 없지만

아홉 줄이 비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정도의 시가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한다


아, <짝수갑>이란 제목이 심상치 않다

내가 언젠가는 <짝수갑>이란 제목으로 시를 써보아야겠다

윤동주 시인과 내가 짝수갑이 되어야만 하겠다

짝이 되어야만 하겠다

윤동주 시인과 내가 한 짝씩 수갑을 차고 함께 가야만 하겠다

<짝수갑> 시를 쓰기 위해서 오늘은 간단한 메모를 한다


짝수갑

짝수갑이 무엇일까

시 제목만 있고 시 내용이 없다

짝수갑을 생각하다가

<짝수갑>과

<건너 마을>을 썼다


짝수갑


나는 너의 짝

너는 나의 짝

우리는 서로의 짝

너와 나는 짝궁

너와 나는 짝수갑

수갑 같은 짝궁

수갑으로 연결된

수갑의 짝, 짝궁

우리는 짝수갑

우리는 짝궁 수갑


건너 마을


나는 너의 건너 마을

너는 나의 건너 마을

우리는 서로의 건너 마을

달과 해는 건너 마을

수갑을 찬 건너 마을


건너 마을에 건너 가야

아름다운 꽃이 건너온다

안에서 밖으로 건너오는

안에서 문을 열고 나오는

꽃과 해와 달과 별들

밖에서 안으로 건너 가야

안에서 밖으로 건너 온다


인생은 다만 건너는 것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아버지에서 어머니에게 건너 가고

어머니 문 열고 밖으로 건너 오고

방문을 열고 대문을 열고 건너 오고

골목에서 큰길로, 길에서 세상으로

세상에서는 너에게로 건너 가는 것


여기에서 거기로 건너 가고

거기에서 여기로 건너 오는 것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 가고

저쪽에서 이쪽으로 건너 오는 것


꽃도 저쪽에서 이쪽으로 건너 오는 것

제주도는 그렇게 물길을 건너 오는 고을


아지랑이는 지금 어디로 가는가

땅에서 피어오르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고 있다

꼬리를 힘차게 흔들며 내려온다
어기여차 어기여차 힘내라 힘내라

정자들의 꼬리처럼 힘차게 달려라

흔들면서 흔들면서 힘차게 헤엄쳐

꼬리를 흔들면서 건너가는 아지랑이


물을 건너야 제주도에 닿을 수 있고

제주도에서 또 이어도로 건너 가고

이어도에서 또 다시 서천 꽃밭으로

서천 꽃밭에서 더 하늘로 건너 가고

하늘에서 땅의 깊은 그 속으로 다시,


https://youtu.be/dBot8AXm6A8?si=ywN7uYvqp9rlK4RA

* 윤동주 시인은 제목을 쓸 때 꼭 위쪽 3칸 비우고 그 아래 썼다. 규칙적인 그런 원칙으로 보아 <짝수갑>이 시의 제목임을 짐작할 수 있다.


* 윤동주의 본격적인 습작 활동 (윤동주의 평양 숭실중학교 시절 / 조영환)


현존하는 윤동주의 유작품은 총 124편이다. 윤동주가 1934년부터 1939년까지 6년간 습작한 작품은 『제1습작집』에 실린 59편(이 중 「짝수갑」은 제목만 기록), 『제2습작집』에 수록된 53편 등, 총 112편이다. 앞엣것의 명칭은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로 1934년 12월부터 1937년 10월까지 창작한 작품을 모아놓았다. 뒤엣것의 이름은 창(窓)인데, 1936년부터 1939년 9월 사이에 새로 창작한 작품군(36편)과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 수록 작품을 수정 혹은 그대로 옮겨 적은 작품군(17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습작품들은 윤동주의 자선(自選) 육필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수록되지 않았다.


윤동주는 은진중학교에서 숭실중학교로 편입하고 난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의 습작기에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윤동주는 숭실중학교에 재학하면서 시 12편, 동시 6편 등 18편의 시를 썼다. 윤동주가 은진중학교에서 3년간 재학하는 동안 쓴 시는 4편뿐이었다. 그런데 숭실중학교에 불과 7개월 재학하는 동안 18편의 시를 썼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윤동주는 이후 숭실중학교에서 광명중학교로 편입하여 2년간 다니는 동안에도 시 27편, 동시 26편 등 총 53편을 썼다. 윤동주가 남긴 작품 총 124편 가운데 57%에 해당하는 71편을 숭실중학교와 광명중학교 재학 기간인 2년 7개월 동안에 썼으니, 숭실중학교 시절에는 한 달에 2.5편, 광명중학교 때는 한 달에 2.2편을 쓴 셈이다. 비록 이 시기에 쓴 시 가운데 후일 윤동주의 자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수록된 작품은 단 한 편도 없으나, 중학교 시절의 왕성한 습작시기가 없었다면 어떻게 주옥과 같은 명편들이 실린 그 시집이 탄생할 수 있었겠는가. 윤동주는 습작시기에 다작(多作)만 한 것이 아니었다. 작품에 상징어를 사용하여 시적 의미의 층위를 더하고, 자기 자신과 시적대상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등 시적 역량을 꾸준히 키워나갔다. 그리하여 연희전문에 입학한 이후에 비로소 감동적인 명편들을 꽃 피울 수 있었다.




윤동주의 평양 숭실중학교 시절 / 조 영환

여는 글 – 윤동주와 『숭실100년사』


1986년 12월 중순 오후 늦은 시간이었다. 은평구 응암동 버스정거장에서 205번 버스를 내려 신사동 숭실고등학교로 가는 언덕길을 터벅터벅 걸어서 오르고 있었다. 우산을 써야 할 정도로 진눈개비가 내리고 있었으나, 날씨는 겨울날답지 않게 푹했다. 도로변 좌우로 보이는 야산의 나무 색깔은 온통 무채색뿐이었는데 문득 오른쪽 시야에 노란 빛이 스쳤다. 고개를 돌려보니 개나리꽃이었다. 숭실고 교문 바깥 화단에 철 이르게 핀 노란 개나리꽃 몇 송이가 진눈개비를 맞고 있었다. 나는 웬일인지 온몸의 긴장이 풀어지면서 ‘여기서 오래 지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숭실고 교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숱이 많은 머리칼에 머릿기름을 발라 단정하게 뒤로 빗어 넘긴 숭실고 김창걸 교장이 내게 커피를 권했다. 그리고 뚜렷한 이북사투리로 신임교사 채용 첫 번째 면접문제를 물어왔다.

“동국대 국문과를 나오셨구레. 시인 뉘기를 좋아하시우?”

“서정주 시인을 좋아합니다. 제 은사님이시기도 합니다.”

“기리쿠먼요. 그런데 윤동주 시인은 안 좋아하시우?

“아, 윤동주 시인도 좋아합니다. 윤동주 시인을 제일 좋아합니다...”

그렇게 나는 윤동주가 다녔던 숭실고에 1987년도부터 국어교사로 부임하여 현재 만 30년째 근무하고 있다. 사실, 나는 그 당시에 윤동주의 생애를 잘 알지 못했고, 그의 시도 썩 애호(愛好)하는 편이 아니었다.


내가 숭실고에 부임한 지 4년째 되던 해, 김창걸 교장은 내게 『숭실100년사』를 집필할 의향이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나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 번째, 나의 역사의식이 극히 부족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00년 된 학교 역사를 쓰려면 설립당시인 구한말시대와,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공간에 대한 분명한 역사인식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고 본 까닭이다. 두 번째, 학교역사 자료가 거의 전무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그 동안 『숭실90년사』는커녕 『숭실10년사』도 발간한 적이 없었다. 숭실은 1897년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 평양에서 설립되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고 폐교한 학교이다. 1948년 서울에서 재건하였으나 평양시절의 학교 자료는 학교교지인 『숭실활천』 3권과 졸업앨범 4권이 전부였다. 그런 상황에서 평양시대의 역사를 집필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나는 결국 『숭실100년사』를 쓰게 되었다. 하지만 「서울숭실편」을 집필하고 나서, 「평양숭실편」은 착수도 하지 못하고 병원 신세를 졌다. 김창걸 교장은 개교100주년인 1997년에 『숭실100년사』를 발간할 목적으로 「평양숭실편」 집필을 외부인에게 발주했다. 그러나 1년 후에 외부인이 써가지고 온 「평양숭실편」편은 숭실과 관련된 내용이 거의 없었다. 하릴없이 내가 다시 「평양숭실편」을 집필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수소문 끝에 숙명여대 기독교역사연구소에 1800년대 말부터 1900년대 중반까지 미국 선교사들이 본국에 보고한 ‘연례보고서(Annual Report)’ 영인본이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 이만열 교수의 도움으로 수십 권이나 되는 영문보고서를 모두 열람하고, 내용 중에 당시 숭실학교를 지칭하는 ‘Pyong-Yang Academy’라는 말이 들어 있는 페이지는 모두 복사했다. 그리고 「대한매일신보」와 「동아일보」, 그리고 「기독신보」와 「조선일보」의 영인본을 검색하고 ‘숭실중학교’라는 말이 들어 있는 페이지도 모두 복사했다. 그리고 이들 자료와 김창걸 교장이 쓴 『실(實) 찾아 30년』을 참고하면서 수업을 전폐하고 「평양숭실편」 집필에 돌입했다.


산재(散在)한 숭실 100년의 발자취를 모아 힘들게 역사의 뼈대를 세우고 살을 붙이던 1995년 여름날이었다. 김창걸 교장이 고생한다며 냉면을 먹으러 가자고 했었다. 그리고 평양냉면을 먹으며 당신이 평양 숭실학교를 다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윤동주가 3학년 때 급우였다는 것과 윤동주가 왜 숭실학교를 자퇴하였는지도 술회하였다. 그리고 당시 숭실학교가 일제의 폭압적인 신사참배 강요를 결연히 거부하고 폐교되던 회고담을 흥분된 어조로 들려주면서, 『숭실100년사』가 왜 중요한지를 강변했다. 그러면서 별도로 시킨 소불고기를 젓가락으로 집어서 자꾸 내 그릇에 넣어주었다. 그리고 “얼마나 힘 드시우. 그러나 『숭실100년사』를 쓰는 일이 얼마나 보람 있는 일이우?”라고 말했다. 평양냉면을 먹고 음식점을 나서려 신발을 찾고 있는데, 김창걸 교장이 어느새 내 신발을 찾아 허리를 숙이고 내 발밑에 가지런히 놓아주었다. 그때 그분의 연세가 76세였다. 나는 그날 세상에서 가장 값진 음식과 신발을 선물로 받은 느낌이었다. 『숭실100년사』는 예정대로 개교 100주년인 1997년에 「평양숭실편」 572쪽, 「서울숭실편」 609쪽, 총 1,181쪽 분량에 4.6배판으로 출간되었다.


이 글의 상당 부분은 『숭실100년사』를 근거로 하여 집필하였음을 밝혀둔다.


1. 윤동주의 편입 - 용정의 은진중학교에서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윤동주가 1932년부터 1935년 8월까지 다녔던 은진중학교는 용정의 민족 학교였다. 은진중학교는 만주의 독립운동가인 김약연과 이동휘 등이 캐나다 선교회에 요청하여 설립된 학교로서, 용정의 동산(東山) 일대의 1만평 부지에 600평의 본관과 150평의 기숙사, 400평의 대강당을 갖추고, 본관은 3층 벽돌건물에 스팀보일러로 난방을 할 정도로 교육시설이 다른 학교에 비해서 월등히 선진적이었다. 또한 은진중학교는 캐나다 선교회가 선교부 구역 내에 설립한 학교여서 ‘치외법권’이 적용되는 덕분에 일제의 간섭을 받지 않고 민족교육을 실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35년 9월, 윤동주는 은진중학교 4학년 가을학기에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학을 하게 된다. 4년제인 은진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로 진학하기가 대단히 어려웠기 때문이다. 1922년 2월 일제가 공포한 제2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중학교 학제가 4년제에서 5년제로 바뀌었다. 그리고 1923년 문부성령 1호로 공포된 ‘조선교육령’에 의거하여, 조선 내 각종 사립학교와 같은 미인가(未認可) 학교의 졸업자들이 상급학교로 진학하려면, 총독부가 지정한 ‘지정학교(5년제)’나 5학년제의 중학교로 전학해서 졸업하거나 검정시험제도를 거치도록 돼있었다. 이는 일제가 우리나라의 중등학교 기관을 국가 관리에 종속시키려는 식민지 교육정책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용정에도 유일한 5년제 학교인 광명중학교가 있었으나 친일파가 운영하는 학교여서, 윤동주는 부득이 많은 교육비를 감수하면서 평양의 기독교계통의 지정학교인 숭실중학교로 전학을 하게 된 것이다.


2. 숭실인들의 독립운동과 일제의 기독교 사학 탄압


숭실중학교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베어드(William Martyne Baird, 한국명 배위량)가 1897년 평양에서 설립하였다. 숭실중학교도 은진중학교처럼 기독교학교이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투철하게 교육한 민족학교였다. 숭실중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서 상해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차리석(車利錫)을 비롯하여 우리 민족의 지도자로 추앙받는 ‘한국의 간디’ 고당 조만식,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역임한 손정도, 임시정부 교통부 차관을 지낸 선우 혁, 그밖에도 일제의 관공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경찰과 총격전을 벌인 김예진, 김정련, 백기환, 오운흥, 정찬조 등 무수한 독립운동가와 기독교계 지도자를 배출하였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당시, 숭실은 김영서 등 재학생 80여명이 서울로 올라가 약 200여 명 동지들을 모아 연 3일간 대한문(大漢門) 앞에서 을사조약을 취소하라고 투쟁을 하였다. 일제가 한국의 독립운동을 철저히 탄압하려고 날조한 ‘105인사건’에 숭실중학교에서는 차리석과 김두화 등 동문교사와 졸업생 등 9명이 관련된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기독교 단체로서 무력에 의한 항일 투쟁 단체였던 ‘조선국민회’의 전체 회원 25명 중 숭실 출신은 14명에 달했다.


1919년 평양 3.1만세운동 때는 숭실 정일선 동문의 독립선언서 낭독에 이어 만세 삼창과 시위가 전개됐다. 숭실교사 윤원삼은 학생들을 동원하여 독립선언서와 소형 태극기를 시위 군중에게 배포하였다. 당시 시위군중은 5천명으로 평양인구 4만 명의 1/8에 해당하는 대규모 인원이었으나, 독립선언서는 서울에서 밀송된 것이 6, 7백매에 불과하였다. 숭실의 안라공업소 인쇄부에서 독립선언서 3천매를 별도로 인쇄하여 시위 군중에게 배부하였다.


일제강점 치하에서 윤동주가 다녔던 은진중학교와 숭실중학교 등 다수의 기독교학교들은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기독교학교를 고사(枯死)시키기 위해 탄압을 자행했다.


첫 번째, 일제는 1908년 ‘사립학교령’의 굴레를 씌웠다. 그 요지는 학교 설립시 총독부 학부대신의 인가를 반드시 받아야 하고, 경우에 따라 학부대신이 폐교 명령까지도 가능하게 한 것이었다. 그 결과 1910년에 1,973개교였던 사립학교가 1925년에는 604개교로 격감했다.


두 번째, 1914년 조세법을 개정하여 재한 외국인 선교사 및 선교 단체에 면세 혜택을 폐지하였다. 1914년 4월 1일부로 시행된 조세 제도로 인하여 선교사들은 토지 1평당 지가의 7/1000에 해당하는 토지세는 물론 각 도와 읍에 지방세를 납부하게 되었다. 개정된 조세 제도로 1914년도에 재한 북장로교 선교부가 증액해야 할 연간 재정액수가 5,000원에 달했다. 당시 1원의 현재가치를 약 4만원으로 추정할 때 대략 2억 원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기독교학교 운영비를 본국의 교인들의 헌금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던 선교사들로서는 감당하기 버거운 금액이었다.


세 번째, 1915년 조선총독부령 제24호로 공포한 개정 사립학교 규칙에서 총독부는 한국 내의 기독교회와 선교회가 설립 운영하고 있는 수백의 학교를 포함한 모든 사립학교에 종교교육과 종교의식을 중단할 것을 제시하였다.


마지막으로, 1930년대 일제가 사립학교들에 강압한 ‘신사참배’였다. 기독교계 학교에서 「신사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은 191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의 ‘신사문제’의 주된 것은 천황 사진 배례 강요와 요배강요(遙拜强要)라 할 수 있다. 기독교 교인들은 그것이 우상 숭배와 인간숭배를 강제하는 것으로 보고 완강하게 반대했다. 숭실의 제 4대 교장을 역임한 맥큔 선교사(G. S. Mccune, 한국명 윤산온, 당시 선천 신성학교 교장)도 항의하였다.


학당 학생들이 일황의 사진을 숭배함을 원치 안이 함은 차(此)는 즉 천연물을 숭배함과 동일한 즉 교중에셔 당연히 차이단(此異端)을 척(斥)할 것이요 약(若) 기숭배(其崇拜)함을 허(許)한 즉 일인의 황제를 천신과 갓치 시(視)함을 승인함이니 교의(敎義)의 불허하는 바라.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자료4 임정편 IV pp. 95.


맥큔 교장은 ‘일황숭배는 곧 우상숭배이므로 기독교인으로서 교의에 어긋나기 때문에 응할 수 없다’고 천명했다. 신도는 일본제국주의 내지 침략적 군국주의와 깊이 관련되어 있었으므로 사실 기독교의 적일 뿐 아니라 우리민족의 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나 이해가 없었던 당시에는 단순히 ‘기독교의 적’ ‘우상숭배’ 정도로 이해하여 민족적 차원에서 공동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후에도 ‘신사문제’에 있어서만은 기독교계 단독의 외로운 투쟁을 전개하였다.


참배 강요를 위시한 ‘신사문제’가 다시 대두하게 된 것은 1930년대에 들어서였다. 일제는 1920년대에는 3.1운동 직후 소위 문화정치를 표방한 기만적인 회유 · 분열 정책으로 약간 유화된 타협적 동화정책을 실시하였으나, 1930년대에 들어서서 대륙침략을 재개하면서 다시 폭압적인 정책으로 환원하였다. 즉, 1930년대에 보다 강화된 민족 말살의 동화정책인 ‘황국신민화 정책’을 시행한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신사참배의 강요, 동방요배(東方遙拜)의 강요, ‘황국신민서사’의 제창, 창씨개명 강요, 일본어 상용 등을 강제하였다. 일제는 천황신앙과 신사신도를 교육의 기초로 삼고, 충성심과 애국심을 기르기 위한 훈련으로서 그때까지 묵인하여 왔던 기독교계 학교 학생들에게까지도 신도의식 참여와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3. ‘불령선인(不逞鮮人)의 소굴’, 숭실중학교


그러나 숭실중학교는 일제의 온갖 탄압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신사참배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당시 숭실중학교의 총체적인 교육상은 3.1운동 이후에 해마다 3월 1일을 대하는 학생들의 태도에 상징적으로 드러나 있다.


3월1일이 되면 우리는 첫 시간부터 온 종일 교과서나 노트를 책상 속에 넣은 채, 책상 위에 머리를 숙이고 수업을 받지 않았다. 선생님들도 아무런 말씀 없이 의자에 앉아 계시다가 시간이 되면 나가셨다. 일본인 선생님들은 시학관(장학사)이 올지도 모르니 책만은 꺼내어 놓으라고 타일렀으나 우리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일본 관헌의 감시는 심했다. 일본의 감시 속에서 이 날을 수업도 거부하며 보내는 것은 우리 학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 김창걸, 『實 찾아 三十年』 70쪽


숭실중학교는 기독교학교였지만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한 민족교육에도 힘을 다했다는 것을 위의 증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숭실중학교 학생들은 1919년 3.1만세운동 이후 해마다 3월 1일이 되면 수업을 거부하고 만세운동으로 희생당한 사람들을 추모했고, 학교는 이를 묵인했다.


숭실중학교 내에는 ‘숭실공제회’라는 기구가 있었다. 학생들의 협동사업의 일환으로 생활필수품을 공동 구입, 매출하여 그 이익금을 회원에게 할당하는 소비 경제의 이익을 도모하는 모임이었다. 숭실공제회는 본래 고당 조만식 동문의 지령으로 독립운동자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설치된 것이었다. 숭실공제회 제 1회 회장이었던 강태국 동문(재학시는 康泰民, 전 한국성서신학대학장)은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고당 조만식 선생님은 독립운동을 성취하기 위하여 여러 방면으로 자원을 준비하고 계셨다. 그 자원의 첫째는 독립운동 성취를 위한 물질적 자원이었다. 그 실례를 들면 그 당시 숭실중학교 한 교실에는 숭실공제회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이 공제회는 표면적으로는 숭실중학교 숭실전문학교 두 학교의 학생용품과 교직원들의 생활필수품을 판매하는 작은 슈퍼였다. 나는 고 정재윤 교수의 지령에 따라 이 공제회를 시작하였다. 그 목적은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을 얻기 위한 조만식 선생님의 계획이었다.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이다


- 강태국, 「내가 만난 조만식」 고당 조만식 회상록(고당 기념사업회 편, 1995), p. 113.


숭실중학교의 재학생이 고당 조만식 동문의 지령으로 학교매점인 숭실공제회를 운영하고 그 이익금의 일부를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공하였다는 회고담이다. 강태국 동문은 1931년 숭실공제회 회장이었고, 정재윤 교수는 고문이었다. 그 내용을 하는 사람이 조만식 동문과 정재윤 교수, 강태국 동문 등 극소수였기 때문에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한 액수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감시가 삼엄한 일제 강점 치하에서, 적발되면 징역형 등 혹독한 처벌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학교의 매점을 이용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조성했다는 것은 조국광복에 대한 투철한 신념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숭실중학교는 조선총독부의 시각에서 볼 때 그야말로 ‘불령선인(不逞鮮人)의 소굴’로서 무슨 트집을 잡아서라도 당장 폐교하고 싶은 학교였을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윤동주가 1935년 9월에 숭실중학교로 편입한 지 두 달 보름이 되는 11월 중순, 일제가 신사참배 거부를 이유로 숭실중학교 제4대 맥큔 교장을 해임하는 등 직접적인 제재를 가하기 시작한 ‘평양 시내 중등학교장 회의 신사참배 거부 사건’이 발생했다.


4.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 ‘평양 중등학교장 회의’ 사건


평남도지사 야스다케가 주재하는 평양시내 중등학교장 회의는 통상 도청 회의실에서 열렸다. 그러나 1935년 11월 14일부터 15일까지 이틀간 개최된 그 회의는 사전 예고도 없이 평양신사에 참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회의 당일 도지사와 부도지사, 그리고 학무국장이 입장하기 전에 중등학교장들은 회의실 의자에 앉아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각 9시에 나타난 사람은 사무직원뿐이었다. 그는 도지사가 중등학교장 회의를 평양신사에서 참배 의식 후에 개최할 예정이라는 것과, 도지사가 교장들을 차량에 태우고 가기 위하여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속히 이동하라고 안내했다.


기독교학교장들에게 이와 같은 일은 처음이었다. 논란 후에 감리교 계통의 남녀 고등보통학교장들과 한국인이 운영하는 기독교 학교장은 신사에 참배하기 위하여 밖으로 나갔다. 이들을 포함하여 신사에 참배하기 위해 떠난 학교대표들의 수는 50여 명이었다. 그러나 숭실중학교장 맥큔 선교사와 숭의여학교장 대리 정익성, 안식교계의 순안 의명학교장 에이치 엠 리(한국명 이희만) 선교사, 그리고 맥큔의 보좌관인 강봉우 교사와 에이치 엠 리 선교사의 보좌관 1명 등 5명은 회의실에 그냥 남아있었다. 당시 숭의여학교장 미스 스눅은 롭(Robb) 박사의 부인 전송회에 참석하느라 중등학교장 회의에 불참하였다.


그러자 밖에 있던 학무국장이 회의실에 들어와 나머지 사람들도 평양신사에 같이 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영어로 말했다. 맥큔을 비롯한 학교 대표들은 정중하게 이를 거부하였다. 학무국장은 그렇다면 선교사들의 한국인 보좌관들이라도 학교 대표로 보내달라고 간청을 하면서 도지사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지금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맥큔 교장은 기독교학교들은 이전에 결코 신사에 참배하도록 요청받은 일이 없었고, 교장들이 엄연히 있는데 한국인 보좌관을 학교 대표로 보내는 것은 부적절하므로 응할 수 없다고 거듭 거부 의사를 표명하였다.


도지사 일행이 평양신사에서 돌아온 뒤 회의실에 남아있던 5명은 도지사의 집무실로 호출되었다. 도지사는 이들이 평양신사에 참배하러 가는 것을 거부한 데 놀라움을 표시하고, 신사는 천조대신(天照大神)과 메이지 천황의 영(靈)을 모신 곳으로서 신사에 참배하지 않는 학교는 일본 제국 내에 존재할 필요가 없고, 아울러 신사에 참배하지 않는 교장 또한 마찬가지라고 단언했다. 그리고 맥큔 교장 일행에게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개인적인 이유와 학교장으로서의 이유를 명확하게 사유서에 기록하여 제출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야스다케 지사는 이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줄 테니 밖에 대기된 차를 타고 평양신사로 가라고 하였다. 명령이라고 단호하게 말하면서 즉시 학무국장과 함께 평양신사에 참배하고 올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맥큔 교장은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이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도지사에게 자신과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볼 것을 청하였다.


당신이 나를 통해서 내린 명령에 숭실중학생들은 당연히 복종해야 할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나를 비롯하여 우리학교의 교사, 그리고 모든 학생들은 기독교인이다. 평양에는 1만 5천명, 한국에는 40만 명의 기독교인이 있다. 그런데 내가 이들에게 가르쳐 온 것은 내가 오늘 아침에 받은 명령 내용에 전혀 상반되는 것이다. 청컨대 이 문제에 대하여 좀 더 상의하고 생각할 시간을 주기 바란다.


- 맥큔, 1935, 연례보고서 중에서


맥큔 교장은 동 보고서에서 마치 ‘어린아이처럼 무력하고 비굴한 자세’로 도지사에게 (학교 폐교와 학교장 해임) 징계를 연기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고 적고 있다. 야스다케 지사는 맥큔 교장에게 다소간의 시일을 주겠다고 말한 뒤 그들과 함께 도청 회의실로 돌아와 회의를 주재하였다. 그는 회의를 개회하기 전에 맥큔 교장 일행이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중대한 문제를 야기했다고 말하고, 학교 폐교와 학교장 해임의 최종 결정은 일단 보류하지만 이것은 초미(焦眉)의 사안임을 강조하였다. 신사참배에 응했던 다른 학교의 대표들은 맥큔 교장 일행을 마치 범죄자 보듯이 하였다. 그러나 맥큔 교장은 자신의 신앙 양심에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으므로 이에 전혀 개의하지 않았다.


중등학교 교장 회의는 이틀간 계속되었다. 모든 학교들이 신사참배에 응해야 한다는 것이 회의의 주제였다. 나아가서 야스다케 지사는 모든 교사들이 자택에 신사를 모셔야 할 뿐만 아니라 참배하는 모습을 학생들과 지역사회의 주민들에게 모범적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맥큔 교장은 귀교 직후 숭실중학교 이사장인 마펫(S.A. Moffett) 선교사에게 이러한 사실을 보고하였다. 마펫 이사장은 북장로교 한국선교부와 뉴욕 선교본부, 한국장로회와 회의하여 1936년 9월까지 신사참배와 관련된 입장을 결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1935년 11월 25일 북장로교 한국선교부 실행위원장인 홀드크로포트와 벡커 선교사가 평남지사를 방문하여 동 내용을 전달하고 이러한 사정이 있으므로 내년 9월경 확답을 할 수 있으니 기간을 유예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야스다케 평남지사는 “정부가 여러 차례 발표를 통하여 신사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였고, 신사참배는 교육상 이유에 기초하여 애국심과 충성심을 표하는 것으로서 국민교육상 본질적으로 대단히 중요하여 매일매일 수행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오랫동안 미해결인 채로 방임할 수 없다.”라고 단호하게 거부 의사를 표명하였다.


한편, 한국선교부 실행위원 4명은 같은 날 우가키 총독을 직접 방문하고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 내용은, ‘기독교학교가 신사참배에 대한 최종 결정을 할 충분한 시간을 줄 것과, 그 동안 지방 관리들은 어떤 기독교학교나 교장에게도 신사의식에 참여하도록 더 이상 압력을 행사하지 말며, 참배하지 않았다고 해서 어떤 학교도 처벌하지 말도록 배려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조선총독으로부터 부정적인 답변을 들었다.


맥큔 교장이 신사참배 여부를 확답해야 하는 기한은 12월 20일까지였다.


5. 편입생 윤동주의 학교생활


숭실중학교가 학교장 해임과 학교 폐교라는 극단적인 상황에 빠져들기 시작하기 두 달 전인 1935년 9월, 윤동주는 은진중학교에서 숭실중학교로 편입하여 적응기를 지나고 있었다.


1935년 당시 숭실중학교의 교육연한은 5년, 연간 수업 기간은 시험기간을 제외한 37주였다. 시험은 신입생의 입학시험과 재학생의 편입시험으로 나누어 실시하였다. 전체 학기를 3학기로 나누어, ‘1학기 : 4〜8월, 2학기 : 9〜12월, 3학기 : 1〜3월’로 구분하였다. 학생들은 1주일에 6일간 주당 32시간에서 36시간의 수업을 받았으며, 매 교시 수업 시간은 45분이었다.


교과목은 성경, 수신(修身), 공민(公民), 국어(일본어 - 강독회화, 작문문법, 습자), 조선어 및 한문, 영어(강독회화, 작문문법 습자), 역사, 지리, 수학(산술, 대수, 기하, 삼각), 박물(식물, 동물, 생리 위생, 광물 및 박물통론), 물화(물리, 화학), 법제경제, 부기, 공업, 용기화(用器畵), 자재화(自在畵), 창가(唱歌), 체조, 교련(敎鍊) 등이었다.


학기별로 시험을 치르고 학년말에 이를 합산하여 성적을 산출하였다. 학과목의 점수는 100점 만점, 각 과목의 급제점은 40점이었고, 진급시험과 졸업시험을 엄정하게 치러 일정 점수 이상자만 진급 및 졸업을 시켰다.


1930년대 숭실중학교가 지정학교로 인가를 받은 이후에 입학시험의 과목은 일본어와 산술(算術)의 두 과목이었고, 시험날짜는 3월 6, 7일이었으며, 입학시험과 편입시험의 경쟁률이 각기 5:1 이상이 될 정도로 지원자가 많았다.


1935년 8월, 윤동주가 치렀던 숭실중학교 편입시험은 시험 과정과 절차가 대단히 엄정했다. 1934년도 편입시험에 숭실중학교 재단이사의 아들이 시험을 치렀는데 낙방할 정도였다. 윤동주는 은진중학교 4학년에 진급하여 1학기를 다니고, 2학기 때 숭실중학교 4학년 편입시험을 치렀으나 실패하고 3학년 2학기에 편입되었다. 숭실중학교에서는 윤동주가 편입시험에서 받은 점수로 4학년에 편입되기에는 부족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숭실중학교에는 윤동주의 연변 죽마고우인 문익환과 이영헌이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그들은 은진중학교 3학년을 마치고 숭실중학교 4학년 편입시험을 치러 합격했다. 윤동주는 두 사람보다 은진중학교 시절에는 성적이 우수하였으나 숭실중학교 편입시험에서는 뜻밖의 고배를 마시게 되어 크게 상심했다. 그는 누이동생인 윤혜원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들이 나를 제 학년에 넣어주지 않는다,”라고 서글픔을 토로했다.


그러나 윤동주는 문익환과 이영현의 덕분에 학생회 활동 등 학교생활에는 누구보다도 쉽게 적응했으리라 보인다. 숭실의 학생회는 교사의 지도나 간섭이 없이 학생회 임원을 학생들이 직접 투표로 선출하고, 예산의 수립에서 집행, 조달까지 자율적으로 운영하였다. 학생회의 부서는 지육부(智育部), 종교부(宗敎部), 체육부(體育部), 음악부(音樂部), 의사부(議事部), 사교부(社交部) 등 6개였다.


윤동주는 문익환을 따라 종교부가 운영하는 교회주일학교의 교사로 활동했다. 당시 숭실중학교 학생들은 교회 출석은 물론 교회봉사도 거의 의무적이었다. 학생회의 사찰(司察 : 지금의 기율부)은 상급생이 담당하여 학생들의 종교 활동을 확인하고 권면했다. 학생들은 일요일에는 교회에 출석하여 소속교회에서 출석했다는 도장을 받아 오고, 소속교회의 유년주일학교에서 봉사하도록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학생들 가운데 불만을 제기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숭실중학교에 입학한다는 사실 자체가 기독교 신자가 되어 기독교 신앙에 입각한 지도자가 된다는 각오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숭실중학교에서는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그리고 봄방학 때 교회학교의 교사가 부족한 지방교회에서 주일학교에 숭실중학교의 학생들을 교사로 파송하였다. 그 기간은 각각의 방학 기간 중의 약 1달이었고, 상급학년의 학생을 교장으로 선정하였다. 당시 4학년생이자 목사 지망생이었던 문익환은 평양 대동강변에 위치한 봉수리(鳳峀里) 교회 주일학교 교장이었다. 윤동주는 겨울방학 12월 초순에서 1월 초순까지 봉수리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하였으며, 그 기간 중에 동시 「조개껍질」 등을 썼다. 윤동주는 특별히 그 시의 끝에 ‘1935. 12. 鳳峀里에서’라고 명기하여 이를 기념했다.


아롱아롱 조개껍대기

울언니 바닷가에서

주어온 조개껍데기

×

여긴여긴 북쪽나라요

조개는 귀여운선물

작난감 조개껍데기.

×

데굴데굴 굴리며놀다.

짝잃은 조개껍데기

한짝을 그리워하네

×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나처럼 그리워하네

물소리 바다물소리


-윤동주, 「조개껍질 – 바닷물 소리 듣고 싶어」 전문. 1935년 12월 봉수리(鳳峀里)에서


전체 4연에 각 연은 3행씩 총 12행으로 이루어진 동시이다. 윤동주가 문익환을 따라 평양의 봉수리교회 주일학교에서 교사로 봉사하면서 영감을 얻어 지은 시로 추정된다.


윤동주는 교지 편집을 담당했던 지육부 부원인 이영헌의 추천으로 숭실중학교 교지(校誌)인 『숭실활천(崇實活泉)』 제15호의 편집에 일정 부분 관여했고, 그 책자에 시 「공상(空想)」을 발표했다.


동주는 숭실중학교에 한 학기*(두 학기의 착오-인용자 주)밖에 다니지 않았지만, 그 동안 학교 문예지 편집을 맡았었고 거기 동주의 시 한 편이 실렸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갓 편입해온 학생에게 그 일이 돌아간 것은 ‘은진중학교’에서 먼저 숭실에 나가 있던 이영헌(李永獻, 현 장로회신학대학 교수)이가 문예부장이 되면서 동주에게 그 일을 맡겼기 때문이다. 그때 동주는 내게도 시를 한 편 써 내라고 하였다. 그래서 한 편 써 내었더니 “이게 어디 시야” 하면서 되돌려주는 것이었다.


- 문익환, 「하늘 바람 별의 詩人 尹東柱」, 『월간중앙』, 1976. 4, 312쪽. *은 인용자


『숭실활천』은 평양 시내는 물론 전국 서점에서 20전~40전, 현재의 원화가치로 환산하면 약 8,000〜16,000원에 시판될 정도로 이름 있는 잡지였다. 후일 한국 문단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긴 황순원(黃順元) 김현승(金顯承) 김조규(金朝奎) 등도 재학 당시 『숭실활천』에 활발하게 작품을 투고했던 문학가 지망생들이었다. 그 중에서 황순원은 숭실중학교 3학년 때인 1931년 7월, 문예지 『동광(東光)』에 시 「나의 꿈」을, 9월에는 「아들아 무서워 말라」 등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했다.


이영헌이 윤동주를 『숭실활천』의 편집위원으로 추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영헌은 윤동주가 문학에 관심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책자를 편집하는 일에도 능숙하고 열의가 높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명동소학교 4학년 때 서울로부터 『아이생활』이란 잡지를 구독했고, 5학년 때는 송몽규 등과 등사판 학교 월간지 「새 명동」을 몇 호 발간했다(은진중학교 동창 김정우 회고). 은진중학교 시절에도 급우들과 함께 학교 내 문예지를 발간하고 자신의 문예작품을 발표하는 등 열심히 문예활동을 했다. 윤동주의 여동생 윤혜원 여사가 “오빠의 손가락에는 늘 등사잉크가 묻어 있었다.”고 회상할 정도였다(2007년 윤혜원과 김혁의 인터뷰).


윤동주의 3학년 때 같은 반 친구였던 김창걸(전 숭실고 교장)은 윤동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숭실중학교에는 만주 지방에서 많은 학생들이 유학을 왔었다. 상급생 중에는 정대위(鄭大爲 : 전 한신대 학장), 강춘희(姜春熙 : 전 대사), 문익환(文益煥 : 목사)과 그밖에 많은 학생들이 있었다. 우리 반에는 윤동주(尹東柱 : 시인)가 있었다.(중략)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점당하게 된 후에는 많은 애국지사와 독립 운동가들이 만주 땅으로 망명하여 갔었다. 그리하여 만주 일대는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윤동주는 이러한 후손의 한 학생이었다. 그는 나보다 키가 훨씬 컸다. 그의 가냘프면서도 늘씬한 몸매는 우리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의 책상은 내 책상보다 훨씬 뒤에 있었다. 그러나 우리 반의 학생들이 모두 50 명도 될까 말까 하였으므로 서로서로의 사정들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만주 이야기를 가끔 했다. 특히 만주 지방이나 연해주 지방에서 항일 투쟁하는 조선독립군에 관한 이야기도 해 주었다. 그는 별로 말이 없는 편이기는 하나 꼭 필요할 때는 서슴없이 이야기를 했다. 그는 나보다 한두 살 위인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나이보다 훨씬 어른스러워 보였다. 그는 몸가짐이나 행동 등 매사를 신중하게 처신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는 광활한 만주 벌판에서 자라서 그런지 그의 감정은 언제나 무게가 있어 보였고 희로애락에 대범한 것 같았다. 그러나 무뚝뚝하거나 차가운 성격은 아니었다. 언제나 미소 짓는 얼굴이었고, 후리후리한 키에 애티가 나는 얼굴 모습에서 미남임을 느끼게 하였다. 그는 숭실교지 『숭실활천』에 「공상(空想)」이라는 시를 실은 적이 있었다.


- 김창걸, 같은 책, pp. 77〜78.


김창걸은 윤동주가 만주에서 온 학생으로 키가 훤칠한 미남에 과묵하며 어른스럽지만,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는 온유한 성품의 소유자이며, 만주에서 투쟁하는 독립군에 대해서 서슴없이 이야기하는 용기 있고 애국심 강한 학생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리고 또래의 친구들과는 달리 인생의 회로애락을 초월한 듯이 정신적으로 매우 성숙해 보이는 학생이었다고 술회한다.


『숭실활천』에 실린 윤동주의 시 「공상」은 두 가지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그 시가 윤동주의 시 가운데 최초로 활자화된 시라는 점이다. 윤동주라는 이름 석 자가 우리나라의 전역에 알려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윤동주의 자기성찰적인 시의 특성이 나타난 시라는 점이다. 윤동주는 1935년 9월에 숭실중학교에 편입하고, 곧이어 10월 30일에 발간된 『숭실활천』에 「공상」을 발표한다. 그 기간은 불과 1개월 남짓이었으나, 편입시험에서 1차실패한 자신을 추스르고 공부에 대한 의지를 회복하고자 노력한 중요한 기간이었다.


윤동주는 인생의 변곡점에서 시를 쓰곤 했다. 예컨대, 숭실중학교를 자퇴하고 연변의 광명중학교로 편입하고 나서 「이런 날」(1936. 6. 10)을 썼다. 만주국기와 침략국인 일본 국기가 춤을 추는 축제일, 만주국민도 일본국민도 아닌 연변의 소외된 우리나라의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모순을 모르는 단순함’에 안타까워하는 시이다. 광명중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에 입학한 1938년에는 「새로운 길」(5. 10)을 썼다. 제목 그대로 새로운 대학 생활, 새로운 인생길에 대한 설렘을 매우 흥겹고 발랄한 이미지와 리듬으로 노래한 시이다. 연희전문을 졸업한 이듬해인 1942년에는 「참회록」(1. 24)을 썼다. 일본유학을 가기 위해서 하릴없이 총독부에 창씨개명계를 제출하기 전에 뼈아픈 통회의 심경과 미래의 희생적 삶에 대한 예견, 그리고 다짐을 고백한 시이다.


숭실중학교에 편입한 직후 발표한 「공상」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 시를 쓸 때 윤동주에게는 그때까지의 생애에서 가장 큰 변화가 있었다. 첫 번째, 윤동주가 태어나고 자랐던 연변의 부모 슬하를 떠나 대도시 평양으로 홀로 이주하여 생활해야 하는 환경의 변화이다. 두 번째, 숭실중학교 4학년 편입시험에서 쓰라린 실패를 맛본 데서 비롯된 심리적인 변화이다. 윤동주는 두 가지의 큰 변화 속에서 「공상」을 썼다.


空想 -


내마음의 塔

나는 말없이 이塔을 쌓고있다

名譽와 虛榮의 天空이다

문허질줄도 몰으고

한층두층 높이 싸ㅅ는다

×

무한한 나의空想

그것은 내마음의 바다

나는 두팔을 펼쳐서

나의 바다에서

自由로히 헤염친다

金錢 知識의 수평선을向하여.


- 윤동주, 「공상(空想)」전문


1연에서 화자는 공상을 마음의 탑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탑은 제작자가 진심과 공력을 기울여 쌓는 특별한 대상이 아니다. ‘명예와 허영의 천공’, 즉 명예와 허영뿐인 텅 빈 공간이며,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허망한 것이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그 사실조차 모르고 한 층 두 층 계속하여 탑을 쌓고 있다는 사실이다.


2연에서 화자는 공상을 마음의 바다에 비유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을 그 바다에서 자유로이 헤엄치는 존재로 그린다. 그런데 화자는 바다에서 단순히 헤엄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목표점을 향해 가는 존재로 그려지고, 그 목표점은 ‘금전과 지식의 수평선’으로 제시된다.


시 「공상」에서 화자가 성찰한 자기 자신은 다분히 부정적이다. 1연과 2연은 형식과 내용면에서 대응구조를 이룬다. 1연의 ‘명예와 허영’은 2연에서 ‘금전과 지식’에 대응된다. 그리고 화자는 부정적인 행위를 현재 진행하고 있는 존재로 나타난다. 즉 화자는 현재 명예와 허영의 탑을 쌓고 있고, 금전과 지식을 추구하고 있는 존재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헛되고 부질없는 욕망을 꿈꾸는 존재이다.


윤동주는 나중에 어른이 된 후에 그의 습작시집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에 이 시의 “금전 지식”을 “황금(黃金) 지욕(知慾)”이라는 더 적극적인 부귀와 지식에 대한 욕망을 뜻하는 말로 바꿈으로써 그것이 더욱 허망함을 나타내려 한 것 같다(이상섭, 「윤동주가 경험한 이적」 중에서).


그렇다고 해서, 그는 이 시에서 자신이 지향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명시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부정적인 스스로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펼쳐 보임으로써 앞으로의 자신의 삶의 방향을 암시하고 있을 뿐이다. 즉, 지금까지 명예와 허영을 좇고, 금전과 지식만을 추구해 온 헛된 생각을 버리고 바른 마음을 가지고 학문연마에 정진하겠다는 의지를 간접적으로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윤동주의 시 「공상」이 수록된 『숭실활천』 제15호에는 당시 명사(名士)들의 글이 실려 있다. 조만식 동문의 「졸업할 이들에게 기(寄)함)」이란 글과 당시 숭실전문학교 교수였던 무애(無涯) 양주동의 신라 이두(吏讀) 연구 논문인 「화한삼재도회조선어고(和漢三才圖會朝鮮語考)」, 문예란에는 졸업생 김조규의 「북으로 띠우는 편지」 「오후 2시의 산곡(山谷)」 등의 시 2편, 그리고 역시 졸업생 황순원의 「봄을 압두고」와 「고아(孤兒)」 등의 시 2편이 수록돼 있다.


숭실중학교 학생회 서기로서 숭실활천에 활발하게 작품을 투고했던 김조규는 북한 시인이라는 이유로 일반인들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우리 문학사에서 새롭게 조명해야 하는 시인이다. 숭실중학교 1학년 때 광주학생만세사건으로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그는 시 「추억」 「이날도 저들의 가슴엔」 「오날도 붉은 피는 거리를 물드렷나니」를 숭실활천 제12호에 발표했었다.


이 작품들은 대개가 현실참여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고, 일제의 폭압을 풍자하거나 고향을 상실한 자의 비애와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 이 가운데 이전의 행복했던 농촌 공동체가 일제의 착취 속에 병들어가는 아픔을 대조의 기법으로 극명하게 표현한 김조규의 「이날도 저들의 가슴엔」과 황순원의 「봄을 압두고」를 보도록 하자.


(전략)


하거든, 하거든, 그네ㅅ줄을 붓잡고 喜悅에 우숨지을 이날이거든

아아 저기서 산비탈 조악돌 밭에

구슬땀 흘니며 풀뽑는 저 여인은 누구인가

녹아 흘으는 녹음을 바라보며 깁분노래 불을 이날이거든

밭기슬 흐릿한 나무그늘 앞에서

새ㅅ빩안 쥬먹을 떨며 슲이우는 저 어린애는 웬일인가


가슴 앞어라 참혹하게도 빼아ㅅ긴 저들의 명절이여

오날도 훈풍(薰風)은 초록색 포푸라 닢에서 노래를 하고

꾀꼴새 욱어진 숲속에서 금빛 나래를 흔들것만은

아아 이날도 저들의 뼈짬의 기름은 말으는구나,

아아 이날도 저들의 염통엔 고름이 고이는구나.


- 김조규, 「이날도 저들의 가슴엔」- 단오ㅅ날 – 부분


‘단오ㅅ날’은 사람만 즐거운 것이 아니라 뻐꾹새도 즐겁다. 그러나 일제에게 땅을 빼앗겨 산비탈 조약돌 밭을 일구는 과부와, 밭기슭에서 새빨간 주먹을 떨며 우는 그녀의 젖먹이 어린애는 행복감을 느끼지 못한다. 저들은 나라만 빼앗긴 것이 아니라 명절도 빼앗긴 것이며, 토지뿐만 아니라 생존까지도 박탈당해 뼛속에 기름이 마르고 염통에는 고름이 고이는 아픔을 겪는다.


소설가 황순원은 간결한 시적인 문체로 인간의 삶을 궁구(窮究)하는 소설들을 주로 발표하여 예술주의 또는 예도(藝道)주의의 대표적인 작가로 일컬음을 받고 있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특징은 소위 순수니 참여니 하는 문학가들의 이분법적 구분에서 순수 쪽에 이름을 올리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인생을 폭넓게 아우르는 황순원의 큰 문학을 진정하게 이해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숭실활천 제15호에 발표한 그의 시가 대변한다.


(전략)

그 동안 그렇게도 풀피리를 졸으든 복녀가 팔녀갓고,

울기쟁이란 놀림받은 차손이가 저수지(貯水池) 제물이 되엿고, -

아아 초췌해 가는 고향의 얼굴이여.

쓰디쓴 옛일일낭 덮어두자는 이 마음의 아픔

오늘도 멍하니 흐린 이곳 구름에 뿜어준다.

동무야 우리게라 한때 가슴죄던 예ㅅ날이 없었으랴만

낫들고 호미쥐고 듣든 앞개의 물소리를, 산새들의 노래를, 그리고

각장이 메고 바라보든 높은 하늘을, 넓은 들판을 다시는 꿈속같은

그때 마음으로 대할 수 없을 것만 같구나

깊이깊이 물든 의지없는 겨레의 깨여진 심사여,

(하략)

- 황순원, 「봄을 압두고」일부


1930년대는 일본 식민 통치의 잔학상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표면적으로 일제는 이른바 문화정책을 내걸었으나, 내면적으로 이미 한반도는 일제의 대륙 진출을 위한 전진 기지로서 구조적 개편의 정착 단계에 이른 상황이었다. 모든 경제 체제가 전시 동원을 위한 병참 기지로서의 기능을 갖도록 꾸며짐으로써 농촌은 농촌대로 도시는 도시대로 피폐해졌다. 이 시에서처럼 고향의 ‘복녀’는 팔려가고, ‘차손이’는 저수지에 제물로 빠져죽었다. 고향이 깨어지고, 겨레의 심사는 의지할 데가 없어졌다. 그러나 숭실 출신의 문인들은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었다. 때로 강한 절규를 통해, 때로 강한 눈물의 해학을 통해 그들은 시대를 증언하고 절망적인 삶을 초월해보고자 안간힘을 썼던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윤동주는 문익환과 이영헌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숭실’의 일부가 된 것으로 보인다. 만주 용정의 은진중학교와 유사하면서도 다른 숭실의 기독교교육과 민족 교육을 받아 내면화하고, 숭실의 선배 문인들이 쌓아올린 문학적 전통을 자연스럽게 계승하였으리라고 추정된다.


6. 1935년 당시 숭실중학교의 학교 현황과 맥큔 교장


윤동주는 숭실중학교 1935년 9월 3학년 2학기에 편입하여 1936년 3월말에 그가 신사참배 문제로 학교를 자퇴하기까지 만 7개월 동안 재학하였다. 윤동주의 27년 2개월이라는 단명한 생애에서 숭실중학교에서 보낸 7개월은 짧다면 짧고 길다고 하면 긴 세월이었다. 그 당시 윤동주의 나이는 만 18세로, 자기 존재에 대해 새로운 경험과 탐색이 이루어지고, 자기정체성이 형성되는 매우 중요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윤동주는 숭실중학교 재학하던 7개월 동안 무려 시 18편을 남긴바, 이는 그가 시인이 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치열하게 노력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윤동주가 숭실중학교에 재학 당시 어떤 교육환경에서 공부를 했는지 학교시설과 교육내용, 그리고 맥큔 교장의 교육관과 교육철학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먼저, 1930년대의 숭실중학교의 자산현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30년대의 숭실중학교의 자산현황]

용도평 수교사(校舍)502평기숙사146평도서관76평대강당756평운동장7,185평기타 1,260평총부지9,925평


당시의 중학교에 대강당과 도서관은 물론 기숙사가 있는 학교는 매우 드물었다. 숭실중학교에는 전국의 목사나 기독교계, 또는 민족운동계의 자제들이 입학하였다. 멀리는 만주지방에서 제주도, 함경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황해도, 평안도에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숭실중학교의 초창기에는 인간교육은 기숙사교육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여, 전교생을 기숙사에 입소시켜 철저하게 교육을 시킨 적도 있었다. 그 후에 학생 수가 불어나서 학생들을 기숙사에 전부 수용할 수 없게 되자, 기숙사 사용은 지방학생에게만 허용이 되었고 이들은 전원 수용되었다. 윤동주가 숭실중학교에 재학하던 1930년대에 숭실중학교의 교사(校舍) 건평이 502평인데, 기숙사 건평은 146평인 것을 보더라도 기숙사의 비중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가 있다. 윤동주는 만주에서 온 학생이었기 때문에 누구보다 우선하여 기숙사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기숙사는 단층 벽돌집이었고, 건물 앞에 작은 마당이 있었다. 기숙사는 방마다 4, 5명씩 배당되어 있었는데, 1학년에서 5학년에 이르기까지 상급생과 하급생이 골고루 섞여 있었다. 그들은 한 울타리 안에서 침식을 같이 했기 때문에 마치 형제간처럼 관계가 친밀했다. 기숙사 생활을 통해서 학생들은 전국 각 지방에 관한 정보와 풍습을 배울 수 있었다. 지방 사투리, 생활환경, 문화 등, 산지식을 배울 수 있었다.


김창걸은 “숭실중학교에서 자유주의적이고 인간존중의 교육을 받은 것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고 증언한다. 그 당시 관립학교의 학생들은 틀에 얽매인, 억압적인 교육 풍토에서 인간성이 상실된 교육을 받았지만, 숭실중학교 학생들은 맥큔 교장을 비롯한 선교사 교장들이 추구하는 미국식 민주주의 교육을 받아 창의성과 자율성이 크게 신장될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윤동주가 숭실중학교에 재학하던 당시 교장이었던 맥큔 선교사는 1905년에 미 북장로교 선교사로 평양 선교지부에 배치되었다. 숭실의 설립자인 제1대 베어드 교장을 도와 4년 동안 교육활동을 하다가 1909년 선천 선교지부로 전임하면서 신성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부임 즉시 신성학교 내에 자조근로사업부인 공작부와 농장을 조성하고 기숙사를 신축하는 등 학교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맥큔은 1910년 ‘105인 사건’의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일경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에 개의치 않고 1919년 선천지역의 3. 1운동에 참가한 신성중학교 학생들이 일경에 쫓기자 자택에 숨겨주고 일경의 가택 수사를 거부하여 학생들을 보호하였다, 그리고 1920년에 미국 의원들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의 독립 운동가들이 쓴 진정서를 직접 영문으로 번역하여 의원들에게 전달하는 등 적극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도왔다. 맥큔 선교사는, 같은 해에 박치의(朴治毅) 열사의 선천경찰서 폭파 투탄 의거에 관련된 혐의로 법정에 서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1921년에 신성중학교 교장 임기를 마치고 미국에 귀국한 이후 미국 남다고타주의 휴론대학 총장으로 부임하여 1927년까지 재직하다가, 숭실중학교 및 숭실전문학교 제4대 교장으로 선임되었다.


맥큔 선교사는 숭실의 교장으로 부임하기 전에 미국의 교회를 순회하고 독지가를 방문하여 숭실중학교에 재정지원을 해 줄 것을 호소했다. 그 결과 시카고의 제4교회의 신도인 크로웰(H. P. Crowell)로부터 15,000불, 일리노이주의 록 아일랜드에 거주하는 데이비스(T. B. Davis)로부터 10,000불 지원 등 수만 달러의 재정을 확보하였다. 이 자금으로 숭실대강당과 기숙사를 건축하고 대농장을 확보하는 등 괄목할 만한 학교의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특히 실내 체육관을 겸한 대강당은 1928년 7월에 맥큔 교장의 설계로 기공하여 1930년 10월 완공했다. 이 대강당은 당시 공사비로 54,400원,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20억 원 이상이 들어간 건물로서, 건평 303평, 연건평 756평의 당시로서는 한국 제일의 대강당이었다. 2층 기와지붕으로 음악회, 강연, 가극, 영화상영 등과 일반 대중 집회를 열 수 있었다. 실내 체육관의 기능도 겸하였는데 테니스, 농구, 탁구, 권투, 유도 등을 할 수 있었다. 지하실에도 4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강당과 5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목욕탕 시설을 3개나 갖추고 있었다. 참으로 엄청난 규모의 호화시설이었다. 자연히 이 강당은 숭실중학교 학생들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기독교교계의 전국 규모 주요 행사를 유치하고, 이로 인하여 숭실을 전국적으로 알리는 역할도 하게 되었다. 개관 기념으로 전조선 주일학교 대회를 이곳에서 개최하였다.


맥큔 교장이 가장 역점을 둔 것은 전도활동과 학생들의 교양과 신앙심을 함양하는 교육이었다. 1935년도의 종교부 활동 내용을 보면 종교부 학생이 교회학교 교장이 되어 운영하는 지역교회의 수가 3개, 하기방학 때 종교부원 및 기타 학생 개인이 교사로 파송된 교회수가 58개, 봉사하는 학생 수는 67명이었다. 그리고 이와는 별도로 학교의 교육목사가 인솔하고, 학생들은 악사와 연사가 되는 ‘하기순회음악전도대’를 조직하여 7월 20일경부터 8월 4, 5일까지 약 15일간을 지방 전도활동을 전개하는 등 해마다 방학 때면 200~250명의 숭중 전도대원이 한국의 각지로 흩어져 전도활동을 전개하였다(맥큔 선교사 연례보고서 1932, 1933, 1935.). 전도활동에 소요되는 1년간 경비만 해도 450여원에 달하였으니, 이는 당시 학생회 총 예산 900여 원의 절반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맥큔 교장은 ‘숭실의 학생들이 예수그리스도를 좇아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전도활동’을 기독교교육의 최우선 과제로 삼고 이를 수행하였다.


맥큔 교장이 두 번째로 역점을 둔 학생들의 교양과 신앙심을 함양하는 교육은, ‘교양과목(어학, 예술, 역사, 철학, 문학 등)과 종교 연구에 강조를 둔 교육이었다. 그는 분주한 가운데에서도 학생들이 잠재된 예술적 재능과 소질을 계발할 수 있도록 항상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그는 성품이 쾌활하고 명랑할 뿐만 아니라 청소년들을 지극히 사랑하여 언제나 그들을 만나면 특유의 동작으로 쓰다듬어주거나 안아주었고, 학생들과 함께 호흡하기를 즐겨하여 숭실의 축구시합 때는 몸소 앞에서 응원단장과 함께 뛰면서 응원할 정도였다. 맥큔 교장의 이러한 교육자적 인품과 교육철학, 그리고 교육목표는 학교의 운영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학생회가 명실공히 학생들의 자치기구로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종교, 문학, 음악, 미술, 체육 등 장차 한국의 예체능 분야를 주도해나갈 무수한 인재가 배출되었다. 문학부문의 윤동주, 김현승, 김조규, 황순원 등과 음악부문의 박태현, 김동진, 이인범, 전봉초, 임만섭, 미술부문의 김 원, 윤중식, 박고석 등이 이때 배출된 인물들이다.


7. 윤동주의 본격적인 습작 활동


현존하는 윤동주의 유작품은 총 124편이다. 윤동주가 1934년부터 1939년까지 6년간 습작한 작품은 『제1습작집』에 실린 59편(이 중 「짝수갑」은 제목만 기록), 『제2습작집』에 수록된 53편 등, 총 112편이다. 앞엣것의 명칭은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로 1934년 12월부터 1937년 10월까지 창작한 작품을 모아놓았다. 뒤엣것의 이름은 창(窓)인데, 1936년부터 1939년 9월 사이에 새로 창작한 작품군(36편)과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 수록 작품을 수정 혹은 그대로 옮겨 적은 작품군(17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습작품들은 윤동주의 자선(自選) 육필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수록되지 않았다.


윤동주는 은진중학교에서 숭실중학교로 편입하고 난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의 습작기에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윤동주는 숭실중학교에 재학하면서 시 12편, 동시 6편 등 18편의 시를 썼다. 윤동주가 은진중학교에서 3년간 재학하는 동안 쓴 시는 4편뿐이었다. 그런데 숭실중학교에 불과 7개월 재학하는 동안 18편의 시를 썼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윤동주는 이후 숭실중학교에서 광명중학교로 편입하여 2년간 다니는 동안에도 시 27편, 동시 26편 등 총 53편을 썼다. 윤동주가 남긴 작품 총 124편 가운데 57%에 해당하는 71편을 숭실중학교와 광명중학교 재학 기간인 2년 7개월 동안에 썼으니, 숭실중학교 시절에는 한 달에 2.5편, 광명중학교 때는 한 달에 2.2편을 쓴 셈이다. 비록 이 시기에 쓴 시 가운데 후일 윤동주의 자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수록된 작품은 단 한 편도 없으나, 중학교 시절의 왕성한 습작시기가 없었다면 어떻게 주옥과 같은 명편들이 실린 그 시집이 탄생할 수 있었겠는가. 윤동주는 습작시기에 다작(多作)만 한 것이 아니었다. 작품에 상징어를 사용하여 시적 의미의 층위를 더하고, 자기 자신과 시적대상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등 시적 역량을 꾸준히 키워나갔다. 그리하여 연희전문에 입학한 이후에 비로소 감동적인 명편들을 꽃 피울 수 있었다.


윤동주가 숭실중학교 시절에 쓴 시들은 다음과 같다. 여러 종류의 『윤동주 시집』이나 ‘윤동주 연구서적’들이 윤동주가 작품을 발표한 연도를 조금씩 다르게 기록하고 있어서, 『윤동주 평전』(송우혜, 2004), 『처럼』(김응교, 2016), 『윤동주★전 시집』(스타북스, 2017)을 참고하여 정리했음을 덧붙인다.


[윤동주가 숭실중학교 재학 시절에 쓴 시 목록]


1시「공상(空想)」1935년 10월 이전

2〃「창공」1935년 10월 20일, 평양에서

3〃「꿈은 깨어지고」1935년 10월 27일 탈고 (1936년 7월 27일 개작)『처럼』(김응교, 2016). p. 90. 참고

4〃「남쪽하늘」1935년 10월, 평양에서

5〃「비둘기」 1936년 2월 10일

6〃「이별」 1936년 3월 20일

7〃「식권」 1936년 3월 20일

8〃「모란봉에서」1936년 3월 24일

9〃「황혼」 1936년 3월 25일, 평양에서

10〃「가슴 1」 1936년 3월 25일, 평양에서

11〃「가슴 2」 1936년 3월 25일, 평양에서나중에 발굴된 시. 『윤동주★전 시집』(스타북스, 2017). p. 116. 참고.

12〃「종달새」 1936년 3월, 평양에서

13동시「조개껍질 – 바닷물 소리 듣고 싶어」 1935년 12월, 봉수리에서

14〃「고향집 – 만주에서 부른」 1936년 1월 6일

15〃「병아리」 1936년 1월 6일 (『가톨릭소년』, 1936년 11월)『처럼』(김응교, 2016). p. 90. 참고

16〃「오줌싸개 지도」 1936년 초(추정)『윤동주 평전』(송우혜, 2004) p. 182. 참고. 『처럼』) p. 90. 참고

17〃「기왓장 내외」 1936년 초(추정)〃

18〃「창구멍」1936년 초(추정)『처럼』(김응교, 2016). p. 90. 참고.


위의 시 11번 「가슴 2」는 1955년과 1979년에 발간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수록된 「가슴 2」와는 다른 시이다. 그 시집 속의 「가슴 2」는 윤동주의 원문에는 「가슴 3」이고 1936년에 썼다. 11번의 「가슴 2」는 나중에 발굴된 시로서 1935년에 썼다.


윤동주가 숭실중학교에 재학할 때 쓴 18편의 시를 주제별로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시 9편 : 「남쪽하늘」, 「비둘기」, 「황혼」, 「이별」, 「조개껍질」, 「고향집」, 「오줌싸개 지도」, 「창구멍」, 「기왓장 내외」


• 꿈이 파괴된 상실감을 노래한 시 3편 : 「꿈이 깨어지고」, 「가슴1」, 「종달새」


• 일제 강점기의 비애를 형상화한 시 1편 : 「모란봉에서」


• 기타 5편 : 「공상」, 「창공(蒼空)」, 「병아리」, 「식권(食券)」, 「가슴2」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시가 9편으로 전체 18편 가운데 절반을 차지한다. 만주연변의 가족의 품을 떠나 평양에서 홀로 학교생활을 해야 하는 윤동주로서는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제비는 두 나래를 가지었다.

스산한 가을날 ㅡ


어머니의 젖가슴이 그리운

서리 내리는 저녁 ㅡ

어린 영(靈)은 쪽나래의 향수(鄕愁)를 타고

남쪽 하늘에 떠돌 뿐 ㅡ


- 윤동주, 「남쪽 하늘」전문


작품의 창작 날짜와 장소가 ‘1935년 10월, 평양에서’라고 기록된 「남쪽 하늘」이라는 시이다. 시적화자는 제비는 두 날개를 가졌기 때문에 서리를 피해 남쪽으로 날아갈 수 있지만, 자신은 “쪽나래의 향수를 타고” 그리운 어머니가 있는 남쪽 하늘을 떠돌 뿐이라고 안타까워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시적화자가 있는 곳이 북쪽, 어머니가 있는 곳은 남쪽으로 설정돼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윤동주는 1935년 10월에 평양에, 그의 어머니는 연변에 거주하고 있었다. 즉, 윤동주는 그의 어머니가 있는 연변보다 상대적으로 남쪽인 평양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시적화자는 ‘어린 영이 북쪽 하늘에 떠돈다.’고 해야 맞는 말이겠다.


그러나 이것은 두 가지의 측면에서 모순을 내포한다. 첫 번째는 시인이 반드시 그가 쓴 시의 시적화자와 일치해야 한다는 숨겨진 전제가 모순이다. 두 번째는 어법상 모순이다. 즉 제비가 겨울을 피해 남쪽으로 갔는데, 시적화자는 겨울을 피해 북쪽을 떠돈다고 한다면 이는 어법상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이 시에서 ‘남쪽’은 지리적인 위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 의미를 내포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어머니는 부산이나 제주도에 거주하는 존재가 아니라 ‘따뜻한 모성’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윤동주는 외롭고 쓸쓸한 평양의 객지 생활, 어머니가 그리운 심경을 ‘남쪽 하늘’이라는 상징적 시어를 써서 매우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그런데 ‘남쪽’의 이미지는 다른 시에서도 나타난다.


헌 짚신짝 끟을고

나 여긔 웨 왓노

두만강을 건너서

쓸쓸한 이 땅에

×

남쪽 하늘 저 밑에

따뜻한 내 고향

내 어머니 계신 곧

그리운 고향 집.


- 윤동주, 「고향집」- 만주에서 불은 (1936년 1월 6일), 전문


이 시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시적화자가 있는 곳은 평양이 아니라 만주이다. 이 시의 부제처럼, 만주에 있는 시적화자가 남쪽에 있는 어머니를 그리워 부른 노래이다. 그런데 시적화자의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 그는 헌 짚신짝을 끌고 두만강을 건너 쓸쓸한 땅, 만주에 와 있는 존재이다. 즉, 가진 것도 없이 홀로 고향집을 떠나 만주에 정착하려는 존재이다. 그러나 만주는 생각만큼 녹록하지 않아서 막막히 고향집 어머니를 그리워한다는 내용이다.


이 시에서도 시적화자는 윤동주 자신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윤동주는 실제로 남쪽의 고향집을 떠나 홀로 만주에 온 사람이 아니다. 숭실중학교를 다니기 위해 북쪽에 있는 만주를 떠나 남쪽에 있는 평양에 와 있는 학생이다. 그런데 왜 이 시에서 시적화자는 그렇게 그려지고 있을까? 이 시의 화자는 가족과 고향을 등지고 홀로 만주에 정착하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아 고생하는 당시 우리나라의 디아스포라를 연상시킨다.


‘가족을 떠나야 가족이 보이고, 조국을 떠나야 조국이 보인다.’는 역설이 있다. 연변의 가족을 떠나 평양에서 생활하는 윤동주에게 비로소 그의 가족이 디아스포라인 것이 뚜렷하게 인지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일제 강점 치하에서 그의 가족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토지를 찾아 고향과 조국을 등지고 만주를 떠돌아다니는 상황을 인지한 게 아닐까? 그런 점에서 이 시에서 ‘남쪽’은 ‘떠나온 고향’, 더 나아가서 ‘잃어버린 조국’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시들을 통해 살펴본 것처럼, 우리는 윤동주가 숭실중학교에 재학하는 동안 우리민족이 처한 식민지 상황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시를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8. 맥큔 교장 해임


숭실중학교에서 윤동주가 시작(詩作)에 몰두하던 시기에, 평남도지사 야스다케는 숭실중학교 맥큔 교장에게 신사참배 이행 여부를 확답하도록 종용하였고, 그 기한은 1935년 12월 20일이었다. 만약 숭실중학교가 신사참배에 불응한다면 교장의 해임과 학교의 폐교를 단행하겠다고 통첩을 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소화천황 2남 명명 축하행사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1935년 11월에 교장 회의가 있은 후 20여 일이 지난 12월 4일, 일본의 소화천황(昭和天皇)의 둘째 아들의 명명(命名)을 축하하는 행사가 있었다. 이 행사에는 평양시의 초등학교를 비롯하여 남녀 각급학교 및 일반시민이 기(旗) 행렬과 제등행렬을 거행하기로 한바, 각 기독교계 사립학교 학생들도 일반 공립학교 학생들과 같은 행동을 취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숭실중학교의 맥큔 교장을 비롯하여 숭실중학생들이 신사참배 거부의 태도가 너무 완강하기 때문에 평남도청 학무과에서는 숭실중학교만은 신사에는 참배하지 않고 일본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하여 목례를 하고 일본천황만세만 삼창하는 조건으로 행사에 참가하도록 하였다.


예정대로 숭실중학교 학생들은 기(旗) 행렬에는 참가하지 않고 학교에서 봉축식을 거행한 뒤 야간 제등행렬에만 참가하였다. 그러나 대열의 맨 나중에 위치한 대부분의 숭실중학교 학생들은 황거요배나 만세삼창도 하지 않고 마치 시위를 하듯이 일제히 해산하고 귀가함으로써 고의로 신사에 참배를 하지 않았다.


“…내가 숭실중학교 3학년이던 1935년 12월 어느 날 아침이었다. 일본 천황 ‘히로히토(裕仁)’가 둘째 아들을 낳았다고 하여 평양 시내 전학생이 이른바 ‘등불행렬'을 하도록 명령받았다. 학생들은 모두 와카마쯔(若松) 소학교 앞에 모였다. 줄곧 신사참배를 거부해오던 숭실중학교도 이날만은 다 모였다.


평양신사는 모란봉 산정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 신사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가파른 돌계단을 한참이나 올라가야 했다. 돌계단을 오르고 있을 때 이미 참배를 마친 다른 학교 학생들이 찡그린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숭실중학교는 참배 대열의 맨 꼴찌였다. 계단의 한가운데쯤 올라갔을 때였다. 당시 5학년이던 숭실 YMCA 회장인 임인식(林仁植)형이 갑자기 “제자리 섯, 뒤로 돌아”라고 고함쳤다. 학생들은 마치 일시에 전류가 통한 듯 “와! ” 하는 함성과 함께 그대로 돌계단을 뛰어 내려오고 말았다. 그것은 이심전심의 무서운 결속이었다…“


- 김두찬 「그 蠻行 그 眞相」, (숭실 제 33회, 1938 졸), 동아일보 1982. 8. 16.


이 사건이 발생한 후로부터 일본 당국은 더욱 크게 분격하여 숭실중학교의 동태를 극히 주목하기 시작했다.


1935년 12월 9일부터 13일까지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 실행위원장인 홀드크로포트(J. G. Holdcroft, 한국명 허대은)의 서울 자택에서 선교부의 실행위원회가 소집되었다. 실행위원 6명과 선교사 몇 명이 참집하여 평양의 숭실중학교와 숭실전문학교, 그리고 숭의여학교의 신사참배와 관련된 심각한 문제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그 결과 ‘신사참배 문제는 한국선교부 총회와 한국장로회 총회, 그리고 선교본부와의 협의를 통하여 일정한 결론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임시로 당국에 항의하는 것’을 기본 방침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야스다케에게 보내는 맥큔 교장의 회신은 ‘천황폐하 및 황실에 대한 깊은 존경의 뜻을 가지고 또 나아가서 황조(皇祖) 황종(皇宗)을 숭경할 용의가 있지만, 신사에서의 여러 의식을 종교적 행위라고 믿는 이상 하나님의 뜻에 위반되고 신앙의 자유와도 일치되지 않는 행위라고 믿으며, 나의 양심에 따라 이를 거부한 것밖에 없다’는 내용으로 할 것을 결의하였다.


맥큔 교장은 동년 12월 13일자로 다음과 같은 서신을 야스다케 지사에게 발송하였다. 그러나 1935년 12월 30일 와타나베 학무국장은 맥큔 교장과 홀드크로포트 위원장, 그리고 솔토 선교사를 본부에 초치(招致)하고, ‘만약 맥큔 교장과 숭실중학교가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면 교장직 해임과 학교 폐쇄를 단행할 것’을 재차 엄중 경고하였다.


맥큔 교장과 마펫 이사장은 평양 선교사회를 소집하고 신사참배 문제를 예의 검토하였는데 신사참배 불가론이 우세하였다. 마지막으로 신사참배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평양신학교 교수인 박형룡(朴亨龍) 목사와 평양 산정현교회 주기철(朱基徹) 목사에게 그 찬부를 문의하였던바, 그들 또한 신사참배는 불가하다는 의견을 강하게 내세웠다.


맥큔 교장은 ‘신사참배를 거부할 뿐 아니라 교장직의 사면(辭免)도 불사한다.’는 내용의 답서를 1월 18일 오후 2시 평남 도지사에게 제출하였다. 다음은 맥큔 교장이 그에게 요구된 두 가지 문제에 대하여 평남 도지사에게 보낸 마지막 회신이다.


존경하는 각하


1936년 1월 16일자 각하의 요구에 의하여 나는 다음과 같은 회신을 제출합니다. (중략) 나는 당신에게 다음과 같이 알려드리게 됨을 매우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1) 현재 봉재하고 행하는 신사의식들은 나에게는 분명히 종교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2) 대부분의 일반인들이 실제로 거기서 신령들을 예배한다고 믿기 때문에 (3) 기독교인들은 효도와 구분하여 조상숭배는 하나님께 대한 죄라고 믿기 때문에 그리고 (4) 나도 하나님의 말씀(성경)에 의해 기독교인들에게 그 같은 것이 금지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나는 당신이 학교교장인 나에게 요구한 행위를 한 개인으로서 양심적으로 행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내 자신이 개인으로서 신사에 참배할 수 없기 때문에 나의 학생들에게도 그것을 하도록 할 수 없음도 알려드리게 됨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하략)


그가 답신에 천명한 신사참배 반대 이유는 다음 네 가지이다. ‘1) 신도의 의식(儀式)이 명백한 종교적 중요성을 포함하고 있다. 2) 많은 사람들이 신사에서 영령에 대한 제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3) 기독교인들이 조상숭배는 하나님에게 죄를 짓는 것으로 인식하며 4) 성경도 그것을 금하고 있다. 따라서 자신만이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신사참배를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신사참배가 국민의례일 뿐 종교의식이 아니라는 총독부 측의 주장과 상반 대립하는 것이었다.


맥큔 교장 개인은 물론 학교장으로서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의사를 명확히 함에 따라 야스다케 지사는 1월 18일자로 맥큔 선교사의 숭실중학교장 인가를 취소하였다. 그리고 맥큔 선교사는 숭실전문학교 교장직도 겸하였기 때문에 이의 취소를 위하여 야스다케 지사가 미리 작성해 두었던 ‘사립학교 규칙에 의한 학교장 인가 취소 요청’의 공문을 1936년 1월 16일자 인비(人秘) 제 15호로 조선총독에게 발송하였다. 이 공문을 접수한 조선총독부는 1936년 1월 20일자로 학무국장의 이름으로 ‘숭실학교장 파면에 대한 언급’과 더불어 조선총독부 총독의 명의로 맥큔 교장 인가 취소 공문을 북장로교 한국선교부 유지재단 대표자 밀러(E.H. Miller, 한국명 밀의두) 앞으로 발송하였다.


9. 맥큔 교장 해임에 반대하는 숭실중학생들의 동맹휴교


1936년 1월 20일자로 맥큔 선교사의 교장직 인가가 취소되자 이 사실이 즉시 일반에 알려졌다. 이 사실에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북장로교 선교사들과 그 계통의 학교 관계자들, 그리고 누구보다도 숭실중학교 학생들이었다. 동년 2월 초순의 주일날 숭실학교 YMCA, 즉 학생회 종교부가 운영하는 평양시 서북부의 인흥리교회에서 봉사하는 동문과 재학생들을 중심으로 논의가 시작되었다. 교회학교의 구흥남(1936卒), 장이규(1935卒), 장윤홍(1935卒), 유성복(당시 4학년), 강춘희(당시 4학년), 김희영, 이종완(당시 4학년) 등이 논의를 주도했다.


학생들은 이 사건이 맥큔 교장 개인의 사건이 아니라 숭실중학교의 장래문제에 직결된다고 보았다. 신사참배와 관련하여 자신들의 신앙 고수와 학업 여부가 걸린 문제라는 데 인식을 같이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제의 신사에 참배하는 것은 자신들의 혼(魂)이라고 할 수 있는 신앙을 포기하는 행위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들은 그 다음날 아침 기도회 때 이것을 공식 문제화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누가 철야기도를 하자고 특별히 제안한 것도 아닌데 함께 모여 기도하고 묵상을 하면서 밤을 새웠다. 새벽이 가까워오자 당일의 거사를 위하여 새벽기도회를 열기 위하여 장대현교회로 갔다. 장대현교회에는 관서지방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핵심 인물인 주기철 목사와 숭실동문 고당 조만식 장로가 시무하는 곳이었다. 이들은 ‘오늘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을 통하여 자신들이 한국교회의 재생을 위한 희생 제물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하였다.


드디어 거사 당일 2교시가 끝난 후 전교생은 기도회를 하기 위하여 강당에 집결하였다. 강단에는 이사장 마펫 박사와 미국인 선교사 1명, 정재호 목사가 좌정했고, 그 왼쪽에는 김성찬 학감, 강봉우 교무부장 등이 앉아 있었다.


예배가 끝날 무렵, 마펫 박사는 무언가 중대한 발표를 하려는 듯이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는 긴장된 모습이었고, 학생들 앞에서 마음속의 괴로움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그의 훤칠한 모습이 평소와는 달리 불안정해 보였다. 먼저 유성복이 일어났다. “맥큔 교장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큰 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강춘희가 일어났다. “윤산온(한국명) 교장님은 왜 학교에 나오시지 않습니까?” 다소 격앙된 목소리였다.


마펫 박사는 어쩔 줄을 몰랐다. 그는 손을 저으면서 “안 될 것인데는…”을 되풀이하였다. 장내가 약간 소란해지면서 이번에는 이종완이 일어났다. “우리 믿음의 아버지 윤산온 교장님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외치자 같은 내용의 질문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러나 장내가 소란스러워지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강단 쪽에는 벌써 약 4, 50명의 고등계 형사들이 버젓이 서서 학생들을 감시하였고, 뒤 출입문 좌우에도 10여 명의 사복 경관들이 학생들의 동태를 날카롭게 주시하고 있었다. 강당 옆 기숙사와 학교 정문 사이의 길에는 수십 명의 기마경찰이 출동하여 숭실 교정을 완전히 에워싸 버렸다.


이때 이종완이 다시 일어나 “맥큔 교장님은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는데 이제 그는 가고 대신 들어오는 다른 교장은 우리에게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말해 주시오.”하고 문제의 핵심을 찔렀다. 그러나 아무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학생들의 흥분은 더욱 고조되고 “윤 교장을 내놓으시오.”하는 고함소리가 여기저기서 일어나 학생 대중의 흥분은 이미 그 도가 넘은 듯했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부르고 용기를 얻었다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하는 찬미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어서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 앞에 가신 주를 따라 갑시다.”하는 찬송들을 연이어 우렁차게 불렀다.


이종완은 다시 일어나 “학교 당국이 아무 태도가 없는 것은 우리에게 신사참배를 시키기 위하여 맥큔 교장을 파면한 당국의 입장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까?” 하고 결정적인 포문을 연 뒤 다른 학생들을 향하여 “너희는 남아서 신사참배를 하며 학교에 더 다니겠느냐? 다니려면 잘 다녀라. 나는 그런 학교엔 다시 다닐 수 없다.”고 고함치며 먼저 강당을 뛰쳐나갔다. 이것을 신호라도 삼듯이 학생들이 무더기로 밀려나갔다. 저지하던 경찰들도 이를 당하지 못했다. 기숙사 앞에서는 길을 열려는 학생들과 이를 제지하려는 경찰들 사이에 큰 충돌이 일어났다. 경찰 모자가 땅에 떨어지고 경찰복 소매가 찢기는 격투가 벌어졌으나 학생들의 물결을 막지는 못했다. 5백 명 숭실중학생들과 교사들은 순식간에 숭실전문학교 앞마당을 꽉 채워 긴장한 모습으로 웅성댔다.


잠시 후에 담장 밖을 에워쌌던 기마경찰들이 교정 안에까지 들어왔다. 이들이 군도를 빼어들고 휘두르며 시위학생들 속으로 들어가니 일부 학생들은 운동장가로 피해 달아나고 일부는 일경들에게 달려들어 육박전을 벌였다. 그들의 모자와 옷을 벗겨 땅에 내팽개치고 칼도 빼앗아 부러뜨렸다.


그러나 시위 학생들과 교사들은 교정 밖으로 진출하지 못하고 기마경찰에 둘러싸여 몇 시간을 대치한 끝에 해가 저물자 지쳐버렸다. 새로운 연락이 있을 때까지 ‘동맹휴교’를 선언하고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경찰은 많은 학생들을 검거하지는 않고 주동자인 이종완 외 4학년생들을 트럭에 싣고 경찰서로 연행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처벌은 없이 장시간의 설유를 듣고 훈방되었다.


이날 학생들의 시위는 ‘숭실중학생들은 맥큔 교장의 신사참배 거부에 생명을 걸고 동참한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이 시위는 일제로서는 유혈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고, 학생 측에서는 무기 동맹휴교라는 선에서 모호하게 마무리되어, 교회에 경각심을 일으키게 한다는 당초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신사참배 거부를 확고히 하여 숭실중학교가 장차 일제의 계교대로 신앙을 팔아 학교를 운영하지 않고 당당하게 폐교를 선택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었다.


10. 윤동주의 자퇴와 숭실중학교의 폐교


윤동주가 당시 맥큔 교장의 해임을 반대하는 시위 현장에 있었는지의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유혈 독립 투쟁이 전개되었던 만주에서 태어나 성장했던 윤동주가 그 자리를 피했을 리는 만무하다. 누구보다도 일제의 부당한 신사참배 강요와 맥큔 교장이 강제 해임된 것을 적극적으로 규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당시 맥큔 교장의 해임에 항의한 여러 학생들이 동맹퇴학을 감행하였는데 윤동주, 문익환 등도 이때 함께 자퇴하였다.


숭실중학교에 대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민족감정과 기독교 신앙을 한꺼번에 짓밟는 사건이었다. 동주와 나는 서로의 심정을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다 아는 듯 우리는 말없이 짐을 꾸려가지고 북간도로 돌아가고 말았다.


- 문익환 목사, 「학창시절의 윤동주」, ‘윤동주기념사업회’


제일 큰 사건은 3학년 끝나고 나서 신사참배 문제가 나왔어요. 그래서 이제 우리 학생들 가운데 신사참배를 하고도 학교를 계속 가느냐, 교장선생님도 다 물러나고 그러니까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학교를 떠나느냐, 그 문제가 제일 컸었지요. 친구였던 윤동주 시인은 만주에서 숭실중학교로 왔다가 ‘나는 다시 만주로 가면 된다, 그러면 신사참배 안 해도 된다.’는 결론을 내렸지요.


- 김형석(전 연세대 교수), ‘동문인터뷰’ 중에서, 『숭실교지』 제 149호, 9쪽, 2016.


문익환과 김형석의 증언을 통해 볼 때 윤동주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고 자퇴를 결행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때는 숭실중학교가 폐교되기 전이었다.


숭실이사회에서는 1936년 3월 5일, 제 5대 숭실중학교의 교장으로 정두현(鄭斗鉉) 숭전 교수를 선임하였다. 숭실중학교에 한국인 교장이 부임하게 된 것은 평안남도 학무과의 강압에 의한 것으로 외국인 교장보다는 한국인 교장이 다루기가 용이하다는 당국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정두현 교장의 부임 후에 북장로교 한국선교부는 1936년 6월 학교의 인퇴를 결정하고 선교본부의 승인을 얻었다. 따라서 정두현 교장이 담당했던 것은 학교의 폐쇄와 이에 따른 한국인의 후계 경영에 관한 업무 등이었다.


1936년 7월 서울에서 열린 북장로교 선교사대회에서 ‘1938년 3월말까지 새로운 경영자가 나서지 아니하면 학교를 폐쇄하자.’고 결의했다. 그 뒤에 ‘어쨌든 학교는 그대로 계속하여야만 하겠다.’는 공통된 희망을 가지고 후계를 위한 움직임이 계속되었으나 결국 무산되었고, 북장로교 선교부에서는 숭실중학교를 폐교하기로 결정했다.


1897년 설립되어 40년 역사의 종막을 닫는 숭실중학교는 1938년 3월 3일 오전 10시 30분 숭실 대강당에서 숭실중학교 졸업식을 거행하였고, 3월 12일 최후의 방학식을 거행하고 해산하였다. 실로 이는 방학이 아닌 해산으로서 12일 아침 9시 30분부터 대강당에서 3백 명의 재적생과 교직원이 참집, 눈물의 예배를 드린 후 정두현 교장의 마지막 고별사로 해산식을 마치고 서로 작별을 하였다. 그리고 1938년 3월 19일, 숭실중학교는 마침내 폐교되었다.


닫는 글


올해로 윤동주는 탄생 100주년, 숭실중학교는 설립 120주년을 맞이했다. 윤동주는 100세, 숭실중학교는 120세이다. 그 나이의 윤동주와 숭실중학교의 얼굴을 각각 떠올려 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끝내 불가능했다. 숭실중학교의 얼굴을 떠올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쳐도, 실존 인물이었던 윤동주의 100세 된 얼굴도 전혀 떠올릴 수 없었다.


윤동주는 항상 청년의 얼굴이다. ‘청년 윤동주!’이다, 죽은 사람의 이름 앞에 희귀하게 ‘청년’이 붙는 경우가 있다. 요절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 앞에 ‘청년’이라는 수식어가 오지 않는다. ‘청년’이라는 말은 물리적인 나이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어떤 의미도 포함한다. 즉, 정신의 ‘동정성(童貞性)’을 끝까지 지킨 사람을 ‘청년’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비록 신체는 죽었으나, 사람들의 기억 속에 정신이 깨끗하게 살아 있는 존재를 ‘청년’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꽃답다’는 말과 ‘청년’이라는 말은 동의어이다. 윤동주는 꽃답게 죽었다. 숭실중학교도 꽃답게 죽었다. 그들은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그들은 하나님이라는 진리, 하나님이라는 절대가치를 믿고 신봉한 존재들이다. 일제는 그들에게 신사에 참배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의 지조를 지켜 결단코 신사에 참배하지 않았다. 숭실중학교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항하여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학교의 문을 닫았고, 윤동주는 그보다도 앞서 학교를 자퇴했다.


윤동주는 시인이기에 앞서 애국자였다. 진실로 나라를 사랑한 청년시인으로서 모국어로 시를 쓰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인식했고, 죽기까지 추호도 굽힘이 없었다. 기독교학교인 숭실중학교가 끝까지 고수한 것도 민족 교육이었다. 일제 강점 치하에서 삶과 죽음이 모두 부끄러웠던 존재가 허다하다. 그러나 윤동주와 숭실중학교는 죄 없이 고통당했던 삶과 비명(非命)에 맞은 죽음이 모두 ‘가시면류관’처럼 영예로웠다. 윤동주와 숭실중학교는 일제의 야만과 무력에 무참히 희생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 겨레는 물론 인류의 마음과 역사 속에 깨끗하게, 꽃답게, 그리고 영원히 부활했다.


숭실중학교는 1948년 동문들에 의해서 서울에서 재건되었다. 1997년 개교 100주년 때, 숭실에서는 윤동주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다. ‘청년’ 윤동주와 숭실중학교의 고귀한 정신을 기린다.


너는 스물아홉에 영원이 되고

나는 어느새 일흔 고개에 올라섰구나

너는 분명 나보다 여섯 달 먼저 났지만

나한테 아직도 새파란 젊은이다.

너의 영원한 젊음 안에서

이렇게 구지구질 늙어가는 게 억울하지 않느냐고

그냥 오기로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할 수야 있다만

네가 나와 같이 늙어가지 않는다는 게

여간만 다행이 아니구나

너마저 늙어간다면 이 땅의 꽃잎들

누굴 쳐다보며 젊음을 불사르겠니

김상진 박래전만이 아니다

너의 ‘서시’를 뇌까리며

민족의 제단에 몸을 바치는 젊은이들은

후쿠오카 형무소

너를 통째로 집어삼킨 어둠

네 살 속에서 흐느끼며 빠져나간 꿈들

온몸 짓뭉개지던 노래들

화장터의 연기로 사라져버릴 줄 알았던 너의 피 묻은 가락들

이제 하나둘 젊은 시인들의 안테나에 잡히고 있다.


- 문익환, 「동주야」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