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운기는 힘센 들짐승이다 / 배진성

― 이어도공화국 꿈삶글 0036

by 강산





경운기는 힘센 들짐승이다 / 배진성





그래서 나는 말했다 「스승이시여, 얼마나 심한/고통이기에 이토록 크게 울부짖는가요?」/그분이 대답하셨다 「간단히 말해 주겠다//저들에게는 죽음의 희망도 없고,/그들의 눈먼 삶은 지극히 낮아서/모든 다른 운명을 부러워한단다//세상은 그들의 명성을 허용하지 않고,/자비와 정의는 그들을 경멸하니, 그들에/대해 생각하지 말고 그냥 보고 지나가자」 주변을 둘러본 나는 깃발 하나를/보았는데, 아주 빨리 돌며 지나가서/아무리 보아도 알아볼 수 없었다// ― 단테의『신곡(神曲)』27


비 오는 날 저녁에 기왓장 내외/잃어버린 외아들 생각나선지/꼬부라진 잔등을 어루만지며/쭈룩쭈룩 구슬피 울음 웁니다//대궐 지붕 위에서 기왓장 내외/아름답던 옛날이 그리워선지/주름 잡힌 얼굴을 어루만지며/물끄러미 하늘만 쳐다봅니다// _ (1936년 초, 추정, 윤동주 19세)/14. 기왓장 내외(동요) _ 1집, 중판, 삼판// ―『윤동주』14


하늘과 땅은 영원한데/하늘과 땅이 영원한 까닭은/자기 스스로를 위해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그러기에 참삶을 사는 것입니다//성인도 마찬가지/자기를 앞세우지 않기에 앞서게 되고,/자기를 버리기에 자기를 보존합니다//나를 비우는 것이/진정으로 나를 완성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_ (제7장 하늘과 땅은 영원한데 - 스스로를 위해 살지 않는 삶 ―『도덕경(道德經)』7


모든 것이 태어나기 전/고요는 신의 얼굴이었다/움직임이 멈춘 그 순간/영원은 자신을 감췄다//고요의 심장 한가운데/파문 하나 일었다/그 미세한 흔들림이/시간의 맥박이 되었다//세상은 울림으로 생기지 않았다/멈춤으로 시작되었다// _ (『숨의 연대기』제1부 - 빛이 오기 전(창조의 어둠) 6 「고요의 문턱」) ―『청람 김왕식』7


들판에서는 늘 보리타작하는 소리가 들린다/정미소 주인이셨던 아버지가/벨트에 물려 끌려가던 날부터 축이 헛도는/천장에서 다시 떨어지듯 우리 식구들은/빈 들판으로 내쫓겼다 발동기 같은 큰 형은/발동기를 뜯어 짊어지고 논둑길을 넘어 다녔다/타맥기도 부서진 아버지 갈비뼈처럼 풀어/옮겨 맞추곤 했다 경운기들이/손쉽게 해치우고 들어가 쉬는 동안에도 우리는/들판에서 밤늦도록 이슬에 젖어야 했다/카바이드 불빛 아래서 카바이드를 녹이는 물처럼/우리 식구들의 가슴은 애타게 들끓었다/불이 꺼진 뒤에도/카바이드 깡통 속에는 몸살 나게 아름다운/사랑이 숨 쉬고 있었다 비 오는 날이면/보리 한 됫박 퍼내어 바꿔온 복숭아를/보리 창고에서 나눠먹곤 했다 큰 형 몸에서는/늘 기름 냄새가 났고 바뀐 논에 말뚝을 박을 때마다/우리들의 들판이 한꺼번에 흔들렸다 함부로/골병들어 거덜 난 보릿대를 곁에 쌓는 작은 형/보리 무덤에 검불을 쓸어내는 누이는/갈퀴와 고무래처럼 한없이 슬픔을 후볐다/가마니 한 장 크기의 그늘 속에서 조용히/기어 다니다 잠들곤 하던 나는 자연 숙제로 기르던/거꾸로 매달린 형의 무/그 속에서 싹트는 콩 거꾸로/자라던 허약한 순만 바라보며 그렇게 자랐다/그리고 많은 날들 다음으로 오는 오늘/털털털 탈탈탈 털털털털털 탈탈탈탈탈/들판을 온통 뒤집어엎어버리던 경운기가/골목마다 들쑤신다/추곡수매 공판날 줄서가는 아침/하곡수매처럼 저 멀리 노인들이 손수레 밀고/끌고 오신다 빈 들판에 바람이 껍질을 벗고/지나간다 그 길가로 바람의 껍질이 차갑게 쌓여/있다 월경리 사람들의 깊은 사랑을 실어 나르는/경운기는 힘센 들짐승이다 그러한 아침/나는 다른 계절 속으로 떠나 눈길에 경운기/발자국을 만들며 고향으로 가는 길을 걸어서 간다// (1988년 제22회 문학사상신인발굴 시 부문 당선작 「경운기」) ―『배진성』3




작은 은자는 산이나 수풀에 숨고, 큰 은자는 조정과 시장에 숨는다고 했다 나는 지금 작은 은자를 꿈꾸고 있는 것일까 큰 은자를 꿈꾸고 있는 것일까 나의 모든 문장에는 마침표가 없다 나는 아직 마침표를 찍을 수 없다 나의 문장은 나의 삶이다 그리하여 나는 아직 마침표를 찍을 수 없다 나의 마침표는 나의 삶이 끝나는 날 마침내 마침표는 찍힐 것이다 나의 무덤 하나가 내 문장의 마침표가 될 것이다


무서운 꿈을 꾸었다 정육점에서 고기를 부위별로 팔듯이 사람의 장기를 부위별로 팔고 있었다 장기마다 바코드가 찍혀 있었다 심장이 망가지면 심장을 사서 갈아 끼우고, 간이 망가지면 간을 사서 갈아 끼우고 사는 그런 세상이었다 줄기세포를 이용하여 새로운 장기를 만들어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유전자를 조작하여 아예 병에 걸리지 않도록 완벽하게 태어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자연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데, 인공으로 살아가는 시대에도 끝까지 자연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살아있는 다른 사람들의 장기로 갈아 끼우고 살고자 하였다 문제는 돈이었다 돈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장기를 떼어 팔고, 대신 값이 싼 인공장기로 대체하여 사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돈이 많은 사람들은 얼마든지 젊고 아름다운 몸으로 갈아 끼우고 살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나의 몸을 끝까지 팔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자꾸만 나의 장기와 몸통을 노리는 밀거래업자들이 있었다 결국, 무서운 그들에게 붙잡힌 나는, 나의 팔을 잘리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다가, 운이 좋게 겨우 잠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꿈이 하나 있었다 깊은 산속에서 숲을 가꾸며 조용히 살고 싶었다 깊고도 깊은 숲 속에서 나무를 가꾸며 나무처럼 살다가 나무로 다시 한번 태어나 살고 싶었다 옹달샘 곁에 오두막을 짓고 옹달샘처럼 살고 싶었다 그리하여 나는 오래전에 이런 글을 써서 붙여놓고 자주 읽어보곤 하였다 오래된 그 글을 떠올리고 있는 동안에도 자꾸만 손과 발이 저렸다 잠 밖에서도 나는 자꾸만 손과 팔이 저렸다


나는 오래된 꿈이 하나 있다 나는 아름다운 산을 하나 가꾸고 싶다 그 산에 나무를 심고 나무를 가꾸며, 나무처럼 살고 싶다 그 숲 속에 조촐한 집을 하나 짓고 싶다 삶에 지친 영혼들을 위한, 작은 쉼터를 만들고 싶다 그 쉼터에는 세상에서 실패한 사람들이, 가끔 찾아오면 좋겠다 절망이 너무 깊어서, 스스로 죽고 싶은 사람들이, 아주 가끔 찾아오면 좋겠다 아무런 부담 없이, 누구라도,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으면 더욱 좋겠다 그러면 나는 그들과 함께,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들의 억울함이 풀릴 때까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다 세상에 대하여, 너무나 분노한 사람들과, 한 때의 실수 때문에,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하여, 나는 그들과 함께, 그들의 나무를 심어주고 싶다 산에 나무를 함께 심으면서, 그들의 아픈 가슴에도, 또 다른 희망의 나무를 심고, 사랑의 씨앗을 뿌려주고 싶다 산 혹은 자연의 큰 거울 앞에서, 희망을 되찾은 그들이,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간 다음에도, 나는, 그들과 내가 함께 심었던, 그들의 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안부 편지와 함께 가끔 보내주고 싶다 세상으로 돌아간 그들은, 언제라도, 자신의 자라나는 나무를, 보기 위하여 올 수 있으면 좋겠다 직접 올 수 없더라도, 늘 가슴속에서 함께 자라나는, 자신의 그 나무 때문에, 더욱 힘을 얻을 수 있으면 참 좋겠다 그리하여 우리가 끝끝내, 함께 가야 할 길, 겨울이 깊을수록, 더 잘 보이는 길, 실패한 사람을, 함께 이끌어주고, 넘어진 사람을, 함께 일으켜 세워주고, 억울한 사람의 억울함을, 우리들이 함께 풀어주는, 그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데,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으면 나는 정말 좋겠다


나는 지금 그런 꿈의 실천을 위하여 연습을 하고 있다 방 문을 열고 나오니 안개가 가득하다 오늘 아침에는 하늘이 거대한 그릇처럼 느껴진다 그릇 가득 안개가 흘러넘친다 나도 안개 그릇에 담겨 안개에 젖는다 안개를 보면 알 수 있다 안개에 젖어보면 알 수 있다 검은 것만 어둠이 아니라 흰 것들도 어둠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알고 다시 보면 우리들의 눈이 어둠을 본다 어둠 속에서도 새소리는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사람은 확실히 눈 보다 귀가 더 밝다 밖으로 나오면서 나는 다시 한번 생각한다


쩨쩨하게 살지 말고 통 크게 살아보자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살아보자 목숨을 걸어볼 만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돈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무엇에 목숨을 걸어볼 것인가 내 평생의 소망에 목숨을 한 번 걸어보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 [이어도공화국]을 기필코 내 필생에 만들어보자


자꾸만 깊은 산속 옹달샘에서 살고 싶다 옹달샘의 샘물이 되고 싶다 그 옹달샘에는 가끔 병든 새들이 찾아오면 좋겠다 그 병든 새들이 옹달샘에서 나를 마시고, 기력을 회복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기력을 회복한 새들이 다시 창공으로 힘차게 날아오를 수 있으면 참 좋겠다 그리하여 이미, 그 새의 몸이 된 나 또한, 그와 함께 깊은 궁창이 될 수 있으면 더욱 좋겠다


나는 먼저 아름다운 산을 하나 확보하여 더욱 아름답고 의미 있게 가꾸고 싶다 그 산에 나무를 심고 나무를 가꾸며 나무처럼 살고 싶다 그 숲 속에 조촐한 오두막을 하나 짓고 싶다 삶에 지친 영혼들을 위한 작은 쉼터를 만들고 싶다 그 쉼터에는 세상에서 실패한 사람들이 가끔 찾아오면 좋겠다 절망이 너무 깊어서 스스로 죽고 싶은 그런 사람들이 아주 가끔 찾아오면 좋겠다


나무와 함께 살다가 나무로 부활하고 싶다 다른 많은 사람들도, 무덤 대신에 나무로 남을 수 있으면 좋겠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은 죽어서도 서로 사랑하는 나무로 다시 태어나면 좋겠다 죽어서도 서로 곁에서 오래도록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 바람 부는 날은 가끔 손이라도 잡아볼 수 있으면 참 좋겠다



경운기는-힘센-들짐승이다-_-배진성-001.png

https://youtu.be/l-FBPK9NJOI?si=7UDbYttv9obOOzBT


기와장 내외 2.jpg




동지(冬至)





노자와 장자가 달을 따라 걸었다

공자와 맹자가 해를 따라 걸었다


공자와 맹자가 붉은 팥죽 끓여 와

노자와 장자를 대접하고 떠난다


노자와 장자의 노랫소리 시들고

공자와 맹자가 주역 책을 읽는다





당신은 나의 베아트리체





당신은 나의 베아트리체

아주 먼 옛날부터 남몰래

짝사랑하던 베아트리체


당신은 나의 아프로디테

아주 먼 다음까지 남몰래

사랑하고 싶은 아프로디테


당신은 언제나 보고 싶은 항아

사랑에게 버려질까 두려워서

나는 오늘도 달빛만 보고 있네


달도 보지 못하고 달빛만 보네





사랑은 미친 짓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살지 못하면

자신이 사는 것만 생각하게 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은 미친 짓이다

그래도 나는 사랑으로 미쳐서 살겠다


이 세상에는 한 번 왔다 한 번 가는 것

이 세상에서 할만한 것은 오직 사랑뿐


사랑에 미쳤다고 손가락질하지 마라

지금 그 손가락도 사랑을 꿈꾸고 있다





시간은 누가 발명 했을까





시간은 누가 발명 했을까


하루는 빛과 어둠이 만들고

일주일은 하느님이 만들고

한 달은 달의 윙크가 만들고

일 년은 해의 귀환이 만든다


사람들은 이제

하루의 밤과 낮을 지우고

월화수목금토일만 살아간다

일주일은 왜 이렇게 힘이 셀까


하느님이 만든 일주일 작품은

언제쯤 별자리에게 자리를 줄까

계절은 여전히 별자리가 만들고

일주일은 아직도 힘이 너무 세다


시간은 과연 누가 묻을 수 있을까






https://youtu.be/9trUA2ASquY?si=Iohp02Vi4quHur70

은자의 꿈

06화 우리들의 고향

05화 경운기 외 6편

04화 징검다리

평생학교 서천꽃밭 달문moon

이어도공화국

모래 한 알의 꿈

취우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 전집』

배진성 시인의 꿈삶글 0006

0. 윤동주 시인의 <꿈삶글>

10. 병아리 (1~10)

사이버 예절서당(노자 도덕경 1강)

9. (동시) 고향집

책 소개 접기

7. 남(南)쪽 하늘

남(南)쪽 하늘

김왕식님의블로그 : 네이버 블로그

평론가 청람 김왕식의 브런치스토리

11. 오줌싸개 지도

13. 짝수갑

14. 기왓장 내외




기왓장 내외



비 오는 날 저녁에 기왓장 내외

잃어버린 외아들 생각나선지

꼬부라진 잔등을 어루만지며

쭈룩쭈룩 구슬피 울음 웁니다


대궐 지붕 위에서 기왓장 내외

아름답던 옛날이 그리워선지

주름 잡힌 얼굴을 어루만지며

물끄러미 하늘만 쳐다봅니다.


_ (1936년 초, 추정, 윤동주 20세)

14. 기왓장 내외(동요) _ 1집, 중판, 삼판



https://youtu.be/mQ0rC-jGqGs?si=7wwJo8scHkDOh9n2


이 시는 1936년에 쓰여진 시로 지붕의 건축 자재인 '기와'를 의인화한 시다. 서로 나란히 포개어져 있는 두 기와를 서로 어루만지며 위로하고 있다고 표현한 시인의 놀라운 상상력이 녹아든 시다. 시에서 표현되는 기왓장 내외는 외아들을 잃어버리고 아름답던 옛날을 그리워하는 노부부로 표현되는데, 이는 가장 소중했던 독립된 조국을 잃어버린 과거를 향수하는 시인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쭈글쭈글한 서로의 손을 잡고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지며 소곤소곤 대화하는 모습이 잘 그려져서 참 좋다. 그러면서도 어려운 시절을 함께 손 잡고 건너올 수 있었던 시간을 되돌아보면서 서로를 향하는 감사하는 마음과 쓸쓸한 정서가 잘 그려져 있다. 또한 대궐 지붕의 기왓장 내외를 함께 불러내서 권력과 인생의 무상함까지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준 면에서 이 시는 틀림없는 수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기와는 볼록한 둥근 모양이 하늘을 향하는 '수키와'와 반대로 둥근 모양이 아래를 향하는 '암키와'로 구분된다. 그런데 내가 본 대부분의 기와는 자웅동체로 되어 있어서 한쪽은 수키와이고 다른 쪽은 암키와로 되어있어 파도무늬의 바다를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 기와지붕은 바다가 출렁이는 모습으로 하늘 바다를 이루고 있다. 어쩌면 기와지붕 때문에 푸른 하늘이 더욱 아름답고 물결소리 들리는 듯 구름도 춤을 추며 흘러가는지도 모른다. 암키와와 수카와가 따로인 기와는 주로 부잣집에 사용되고 물결무늬모양의 기와는 서민들의 집에 사용되는 듯하다. 그러니까 같은 기와를 계속 연결해서 지붕을 만드는 서민들의 기와집을 많이 보고 자란 나의 상상력은 더욱 외설스러운 쪽으로 기울어지는 느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시를 동시로 분류하지만 동심을 잃어버린 나는 이 시를 동시가 아니라 그냥 시로 분류를 하고 싶다. 읽기에 따라서 너무나 성적으로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윤동주 시인은 동심을 잃지 않고 맑고 투명한 마음으로 외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모습을 따뜻하게 잘 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동심을 잃어버린 나는 자꾸만 아직도 너무나 외설적인 모습으로 보여서 더욱 부끄럽다. 기왓장 내외는 언제나 여성 상위 체형을 유지한 채 밤낮없이 성생활만 하는 면에서 낯이 뜨거워지기도 한다. 물론 성생활이 아니라 서로 손을 잡아주거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모습으로 볼 수도 있지만 기왓장 내외는 아무래도 고요 곁에서도 신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비가 오는 날은 온몸이 젖도록 땀을 뻘뻘 흘리며 들썩거리는 것이 자주 목격되기 때문에 내 눈에는 너무 외설스럽다는 생각을 접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나로서는 도저히 쓸 수 없는, 이렇게 따뜻하게 잘 쓴 이 시가 좋은 이유는 단순히 기와를 내외로 의인화에 그치지 않고 외아들을 잃은 서민들의 부부와 대궐에서 살았던 권력자의 삶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참으로 놀랍다.



* '잔등'이라는 표현은 현재는 표준어가 아닌 북한어로 분류되며 신체 부위인 '등'을 뜻한다. 현재는 '등'만 표준어로 삼는다.

* 원문표기

- '기왓장 내외' -> '기와장내외'

- '기왓장내외' -> '긔와장내외'

- '울음 웁니다' -> '울음움니다'

- '대궐지붕' -> '대궐집웅'

- '위에서' -> '우에서'

- '아름답던' -> '아름답든'

- '옛날이' -> '넷날이'

- '얼굴을' -> '얼골을'

- '물끄러미' -> '물끄럼이'

- '쳐다봅니다.' -> '처다봄니다.'





경운기





들판에서는 늘 보리타작하는 소리가 들린다

정미소 주인이셨던 아버지가

벨트에 물려 끌려가던 날부터 축이 헛도는

천장에서 다시 떨어지듯 우리 식구들은

빈 들판으로 내쫓겼다 발동기 같은 큰 형은

발동기를 뜯어 짊어지고 논둑길을 넘어 다녔다

타맥기도 부서진 아버지 갈비뼈처럼 풀어

옮겨 맞추곤 했다 경운기들이

손쉽게 해치우고 들어가 쉬는 동안에도 우리는

들판에서 밤늦도록 이슬에 젖어야 했다

카바이드 불빛 아래서 카바이드를 녹이는 물처럼

우리 식구들의 가슴은 애타게 들끓었다

불이 꺼진 뒤에도

카바이드 깡통 속에는 몸살 나게 아름다운

사랑이 숨 쉬고 있었다 비 오는 날이면

보리 한 됫박 퍼내어 바꿔온 복숭아를

보리 창고에서 나눠먹곤 했다 큰 형 몸에서는

늘 기름 냄새가 났고 바뀐 논에 말뚝을 박을 때마다

우리들의 들판이 한꺼번에 흔들렸다 함부로

골병들어 거덜 난 보릿대를 곁에 쌓는 작은 형

보리 무덤에 검불을 쓸어내는 누이는

갈퀴와 고무래처럼 한없이 슬픔을 후볐다

가마니 한 장 크기의 그늘 속에서 조용히

기어 다니다 잠들곤 하던 나는 자연 숙제로 기르던

거꾸로 매달린 형의 무

그 속에서 싹트는 콩 거꾸로

자라던 허약한 순만 바라보며 그렇게 자랐다

그리고 많은 날들 다음으로 오는 오늘

털털털 탈탈탈 털털털털털 탈탈탈탈탈

들판을 온통 뒤집어엎어버리던 경운기가

골목마다 들쑤신다

추곡수매 공판날 줄서가는 아침

하곡수매처럼 저 멀리 노인들이 손수레 밀고

끌고 오신다 빈 들판에 바람이 껍질을 벗고

지나간다 그 길가로 바람의 껍질이 차갑게 쌓여

있다 월경리 사람들의 깊은 사랑을 실어 나르는

경운기는 힘센 들짐승이다 그러한 아침

나는 다른 계절 속으로 떠나 눈길에 경운기

발자국을 만들며 고향으로 가는 길을 걸어서 간다




검은 고양이




어미에게 버림받은 것일까

하루 종일 내 주위를 맴돈다

이대로 두면 죽을 것만 같다


다음날 아침에 어쩔 수 없이

길고양이, 집으로 안고 간다

기운 없어 계단 못 내려온다


두 달 후에 문득 찾아서 가니

이 층 베란다 차지한 고양이

잃어버린 엄마처럼 달려든다




은자의 꿈

- 강산 시인의 꿈삶글 10




작은 은자는 산이나 수풀에 숨고

큰 은자는 조정과 시장에 숨는다


무서운 꿈을 꾸었다. 정육점에서 고기를 부위별로 팔듯이 사람의 장기를 부위별로 팔고 있었다. 장기마다 바코드가 찍혀 있었다. 심장이 망가지면 심장을 사서 갈아 끼우고, 간이 망가지면 간을 사서 갈아 끼우고 사는 그런 세상이었다. 줄기세포를 이용하여 새로운 장기를 만들어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유전자를 조작하여 아예 병에 걸리지 않도록 완벽하게 태어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자연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데, 인공으로 살아가는 시대에도 끝까지 자연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살아있는 다른 사람들의 장기로 갈아 끼우고 살고자 하였다. 문제는 돈이었다. 돈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장기를 떼어 팔고, 대신 값이 싼 인공장기로 대체하여 사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돈이 많은 사람들은 얼마든지 젊고 아름다운 몸으로 갈아 끼우고 살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나의 몸을 끝까지 팔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자꾸만 나의 장기와 몸통을 노리는 밀거래자들이 있었다. 결국, 무서운 그들에게 붙잡힌 나는, 나의 팔을 잘리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다가, 운이 좋게 겨우 잠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꿈이 하나 있었다. 깊은 산속에서 숲을 가꾸며 조용히 살고 싶었다. 깊고도 깊은 숲 속에서 나무를 가꾸며 나무처럼 살다가 나무로 다시 한번 태어나 살고 싶었다. 옹달샘 곁에 오두막을 짓고 옹달샘처럼 살고 싶었다. 그리하여 나는 오래전에 이런 글을 써서 붙여놓고 자주 읽어보곤 하였다. 오래된 그 글을 떠올리고 있는 동안에도 자꾸만 손과 발이 저렸다. 잠 밖에서도 나는 자꾸만 손과 팔이 저렸다.


나는 오래된 꿈이 하나 있다. 나는 아름다운 산을 하나 가꾸고 싶다. 그 산에 나무를 심고 나무를 가꾸며, 나무처럼 살고 싶다. 그 숲 속에 조촐한 집을 하나 짓고 싶다. 삶에 지친 영혼들을 위한, 작은 쉼터를 만들고 싶다. 그 쉼터에는 세상에서 실패한 사람들이, 가끔 찾아오면 좋겠다. 절망이 너무 깊어서, 스스로 죽고 싶은 사람들이, 아주 가끔 찾아오면 좋겠다. 아무런 부담 없이, 누구라도,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으면 더욱 좋겠다. 그러면 나는 그들과 함께,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들의 억울함이 풀릴 때까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다. 세상에 대하여, 너무나 분노한 사람들과, 한 때의 실수 때문에,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하여, 나는 그들과 함께, 그들의 나무를 심어주고 싶다. 산에 나무를 함께 심으면서, 그들의 아픈 가슴에도, 또 다른 희망의 나무를 심고, 사랑의 씨앗을 뿌려주고 싶다. 산 혹은 자연의 큰 거울 앞에서, 희망을 되찾은 그들이,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간 다음에도, 나는, 그들과 내가 함께 심었던, 그들의 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안부 편지와 함께 가끔 보내주고 싶다. 세상으로 돌아간 그들은, 언제라도, 자신의 자라나는 나무를, 보기 위하여 올 수 있으면 좋겠다. 직접 올 수 없더라도, 늘 가슴속에서 함께 자라나는, 자신의 그 나무 때문에, 더욱 힘을 얻을 수 있으면 참 좋겠다. 그리하여 우리가 끝끝내, 함께 가야 할 길, 겨울이 깊을수록, 더 잘 보이는 길, 실패한 사람을, 함께 이끌어주고, 넘어진 사람을, 함께 일으켜 세워주고, 억울한 사람의 억울함을, 우리들이 함께 풀어주는, 그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데,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으면 나는 정말 좋겠다.


나는 지금 그런 꿈의 실천을 위하여 연습을 하고 있다. 방 문을 열고 나오니 안개가 가득하다. 오늘 아침에는 하늘이 거대한 그릇처럼 느껴진다. 그릇 가득 안개가 흘러넘친다. 나도 안개 그릇에 담겨 안개에 젖는다. 안개를 보면 알 수 있다. 안개에 젖어보면 알 수 있다. 검은 것만 어둠이 아니라 흰 것들도 어둠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알고 다시 보면 우리들의 눈이 어둠을 본다. 어둠 속에서도 새소리는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사람은 확실히 눈 보다 귀가 더 밝다. 밖으로 나오면서 나는 다시 한번 생각한다.


쩨쩨하게 살지 말고 통 크게 살아보자.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살아보자. 목숨을 걸어볼 만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돈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무엇에 목숨을 걸어볼 것인가. 내 평생의 소망에 목숨을 한 번 걸어보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 [이어도 공화국]을 기필코 내 필생에 만들어보자.


자꾸만 깊은 산속 옹달샘에서 살고 싶다. 옹달샘의 샘물이 되고 싶다. 그 옹달샘에는 가끔 병든 새들이 찾아오면 좋겠다. 그 병든 새들이 옹달샘에서 나를 마시고, 기력을 회복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기력을 회복한 새들이 다시 창공으로 힘차게 날아오를 수 있으면 참 좋겠다. 그리하여 이미, 그 새의 몸이 된 나 또한, 그와 함께 깊은 궁창이 될 수 있으면 더욱 좋겠다.


나는 먼저 아름다운 산을 하나 확보하여 더욱 아름답고 의미 있게 가꾸고 싶다. 그 산에 나무를 심고 나무를 가꾸며 나무처럼 살고 싶다. 그 숲 속에 조촐한 오두막을 하나 짓고 싶다. 삶에 지친 영혼들을 위한 작은 쉼터를 만들고 싶다. 그 쉼터에는 세상에서 실패한 사람들이 가끔 찾아오면 좋겠다. 절망이 너무 깊어서 스스로 죽고 싶은 그런 사람들이 아주 가끔 찾아오면 좋겠다.


나무와 함께 살다가 나무로 부활하고 싶다. 다른 많은 사람들도, 무덤 대신에 나무로 남을 수 있으면 좋겠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은 죽어서도 서로 사랑하는 나무로 다시 태어나면 좋겠다. 죽어서도 서로 곁에서 오래도록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 바람 부는 날은 가끔 손이라도 잡아볼 수 있으면 참 좋겠다.


'달문 moon'을 둘러본다. '꿈 숲'을 둘러본다. 감귤꽃에 둘러싸인 아기 감귤이 막 눈을 뜨고 있다. 아주 작은 푸른 감귤이 다섯 장의 흰 꽃잎에 싸여 눈을 깜박거리고 있다. 올해는 복숭아가 많이 열렸다. 올해는 모과와 살구가 그리 많이 열리지는 않았다. 장미꽃도 곧 환하게 웃을 것만 같다. 노랑 창포꽃이 볼터치를 하고 있다. 나는 안갯속으로 흘러들어 간다. 안개 때문에 어두워진 길을 건너간다. 꿈 섬에서 연근을 뽑아서 쪼아 먹던 백조와 재두루미와 청둥오리들이 놀라서 날아오른다. 꿈 섬과 안덕계곡과 월라봉에는 새들이 너무 많다. 안개 가득한 산길에서 몸과 마음이 젖은 은자가 내려올 것만 같다.


진(晉) 나라의 왕강거(王康琚)가 《반초은시(反招隱詩)》에서 “小隱隱陵藪 大隱隱朝市(소은은릉수 대은은 조시)”라 하여 “작은 은자는 산이나 수풀에 숨고, 큰 은자는 조정과 시장에 숨는다.”라고 하였다.


한편, 《진서(晉書)》 등찬전(鄧粲傳)에서는 “무릇 숨어서 도를 행함에 조정에도 숨을 수 있고 저잣거리에 숨을 수도 있는 것이니, 숨는 것은 애초 나에게 있는 것이지 외물(外物)에 있는 것이 아니다. (夫隱之爲道 朝亦可隱 市亦可隱 隱初在我 不在於物)”라고도 하였다.


사마천의 사기 골계 열전 제66에 한 무제 때의 기인(奇人) 동방삭(東方朔) 이야기가 나온다. 무제 곁에서 벼슬을 하며 대단한 문장과 달변으로 유명했지만 그의 행동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동방삭 주변의 동료들은 동방삭의 행태에 대해 선비로서 품위가 없다는 등 미친 사람(狂人)이라고 수군거렸다고 한다. 한 번은 궁중에서 동료들과 술을 마시는데 누가 “사람들이 자네를 미친 자라고 한다네.”라고 하자 동방삭은 이에 “나는 말하자면 궁중 가운데에서 한가로이 숨어있는 사람이지(所謂避世於朝廷閒者也), 옛날의 은둔자들은 깊은 산속에서 세상을 피했지만(古之人, 乃避世於深山中)!”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또한 동방삭은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땅에 벌러덩 드러누워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르곤 했다고 한다.


陸沈於俗(육 침어 속) 避世金馬門(피 세금 마문) 宮殿中可以避世全身(궁전 중 가이 피 세전 신) 何必深山之中(하필 심산 지중) 蒿廬之下(호려지하)


- 속세에 푹 파묻혀, 궁궐 문 안에서 세상을 피한다네, 궁전 안에서도 세상을 피하고 몸을 온전히 할 수 있는데, 하필 깊은 산속, 쑥으로 엮은 초막 아래서만 피할까!


나는 또한 길게 접은 우산을 들고 가면서 강태공 이야기를 생각한다. 강태공의 빈 낚싯대를 생각하고 엎질러진 물에 대한 일화도 함께 생각한다.


은자라 함은 세속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깊은 산속에서 살 수도 있고, 밖의 세계로 나오지 않고 자기만의 공간에서 살 수도 있다. 그래서 은자는 좋은 의미보다는 자기중심적인 인물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하기도 한다.


공자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천하에 도가 있으면 나타나고, 도가 없으면 숨는다.” 출세는 세상에 나아가는 것인데, 그러한 세상에 도가 있어 순리대로 돌아간다면 세상에 나와 자신의 뜻을 펼 것이고, 도가 없어 모순된 사회나 앞뒤가 바뀐 세상이라면 그 뜻을 펼치지 않겠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옛말에 ‘작은 은자는 산이나 수풀에 숨고, 큰 은자는 조정과 시장에 숨는다.’라는 말이 있다. 그냥 보통 은자들은 사람들을 피하는 방법으로 살아가지만, 큰 은자들은 사람들과 부대끼는 세상을 현명하게 살아가는 자를 말한다.


그렇다면 나는 시끄러운 세상 속에서 큰 은자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산으로 들어가 작은 은자로 살아갈 것인가 이것이 문제로다. 앞에서 말했던, 내가 존경하는 당 태종 때 동방삭은 조정의 관료이지만 권력을 비웃고 자신의 뜻을 펼치며 살아갔다. 동박삭은 운이 좋아 당시 사회분위기는 이러한 동방삭의 기행을 관대하게 인정했다. 동방삭은 자신이 똑똑함을 드러내지 않고 광대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보였으나 그는 진정 큰 은자였다.


유방의 부하였던 장량은 ‘자신의 공을 자랑하지 않고 능력을 과신하지 않으며 공을 이루었으면 언제든지 깨끗하게 물러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장량이 이런 사람이었기에 논공행상에서 빠지고 조정을 떠나 은자로 살아서 자신의 자연적 수명을 다 누렸다. 은자라 함은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서 사는 사람 이라기보다는 세상의 흐름을 알고 뜻을 펼칠 때에는 뜻을 펼치지만 그렇지 못하면 자신의 분수에 맞게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 말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굴원의 어부사의 어부 이야기가 너무 마음에 든다. ‘창낭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탁하면 내 발을 씻으리라.’ 나는 안갯속에서도 맑은 노래를 부르며 흐르는 계곡 물소리에 내 귀를 씻으며 아침 산책을 계속한다.


그런데 아, 이것은 무엇인가? 안갯속 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광경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동양 달팽이와 육상 플라나리아의 이 땀나는 행위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사랑인가 전쟁인가 아니, 오늘 아침 동양 달팽이의 저 처절한 죽음은 복상사인가 전사인가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잘 알 수가 없다. 나는 다만 내가 오늘 아침에 한 시간 넘게 직접 지켜본 광경을 기록하고 두고두고 더 깊이 생각을 해 보아야만 하리라.


'김광종 영세불망비' 앞에 거미줄이 쳐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길을 더 이상 가지 못하고 잠시 그 자리에 앉아 쉬려고 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 길에서 문제의 동양 달팽이와 육상 플라나리아를 발견하였다. 형태가 완전히 다른 그들의 자세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어떻게 만났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이 어떤 인연으로 만나 얼마나 긴 시간을 함께하고 있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언뜻 보기에 그들은 이미 지쳐있는 것처럼 보였다. 주위의 나뭇잎들이 얼크러져 있고 분비물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꽤 많은 시간을 그렇게 함께 지내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나는 그동안 같은 종류의 동양 달팽이와 육상 플라나리아를 따로 따로 지내는 모습은 많이 보았지만 오늘처럼 함께 붙어있는 것은 처음 보았다. 그 달팽이의 정확한 이름과 육상 플라나리아의 이름도 사실은 오늘 처음으로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정확한 이름도 모르는 처지였으니 그들의 생활양식에 대한 정보도 아는 것이 없었다. 달팽이가 암수 한 몸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성생활에 대한 지식은 없었다. 민달팽이의 사랑하는 장면은 많이 보았지만 오늘처럼 달팽이와 다른 동물과의 성생활에 대한 정보는 아는 것이 없었다.


나는 처음에 그들이 사랑을 나누는 행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성행위가 아닐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시간 넘게 지켜본 결과 달팽이의 발을 비롯한 모든 하체가 검은 육상 플라나리아의 몸속에 들어가 있었다. 육상 플라나리아의 배 중간쯤에 구멍이 있었는데 그 구멍이 성기인지 아니면 입인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달팽이의 넓은 발이 그렇게 뾰족하고 둥그렇게 말려서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리고 한 시간쯤 지난 다음에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 시간쯤 지난 후에 육상 플라나리아는 달팽이의 하체를 토하고, 달팽이 주위를 한 바퀴 돌고는 낙엽이 쌓여있는 계단 구석으로 떠나가 버렸다. 그래서 나는 오늘의 공연은 그것으로 끝나는 줄로 알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려고 하였다. 그런데 아, 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죽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던 달팽이 껍데기가 뒤집어지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 달팽이집 안에서 또 다른 한 마리의 검은 육상 플라나리아가 기어 나오고 있었다. 동양달팽이의 또 다른 무엇인가가 그 육상 플라나리아 몸속에 들어가 있었다. 달팽이가 먼저 밀어 넣은 것인지 육상 플라나리아가 빨아들인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 달팽이집 속에 또 다른 한 마리의 육상 플라나리아가 숨어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들의 사랑이라면 한꺼번에 둘을 사랑하는 것이 되는 일이겠고, 그것이 전쟁이라면 동양달팽이는 오늘 아침 무서운 안팎의 적과 싸우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 처절한 사랑 혹은 전투가 끝난 다음에 달팽이는 끝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육상 플라나리아는 다시 만나서 계단 구석 나뭇잎 아래서 함께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렇게 오늘 아침에 꿈보다 더 꿈같은 광경을 지켜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사랑과 전쟁은 동전의 앞뒤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