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자글자글
내가 좋아했던 어떤 사람은 무책임하고 제멋대로였지만 아이 같은 솔직한 면이 있었다. 어떤 때는 아빠같이 자상하다가도 어떤 때는 자기 콜라 한입을 먹는다고 기분 나빠했다. 그런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 싫을 때도 있었지만 좋을 때는 많이 좋아하고 싫을 때는 얼굴에 확연히 드러나는 그 모습이 좋았다. 지금도 나는 아이 같은 사람이 좋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거짓말하지 않고 기쁠 때 진심으로 기뻐하고 한 번에 한 가지만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이 사랑스럽다.
나는 교회학교에서 유치부를 해 보통 사람들보다 아이들을 자주 만난다. 주로 3-4세 아이들을 맡는데 3살 아이들은 집에서는 곧잘 말을 해도 밖에 나오면 말하려 하지 않는다. 낯을 가리며 슬며시 분위기를 보다가 필요한 게 생기면 갑자기 단어로 말하기 시작한다. 좀 더 커서 4살이 되면 모든 일에 질문을 하고 갑자기 자기 근황을 들려주기도 한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너무너무 사랑스럽다. 엄마는 늘 자식은 이때의 사랑스러운 기억으로 평생 키우는 거라고 했다.
아이들은 모든 일에 진심이다. 그래서 가끔은 너무 당연해서 잊고 있던 것들을 알려주기도 한다. 하루는 4살짜리 여자아이와 아무 의미 없는 계단 오르기를 하고 있었다. 계단 끝에 나타난 남의 집 대문을 보며 아이는 갑자기 ‘나 여기 들어가고 싶어’라고 했다. 나는 안 되는 이유를 말해주기 위해 ‘안돼, 남의 집은 초대받아야만 갈 수 있는 거야’라고 했다. 아이의 질문에 반사적으로 나온 대답이었을 뿐인데 같이 계단을 내려오며 '아, 우리가 아무 집에나 들어갈 수 없는 건 초대받지 않았기 때문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겁이 없다. 저 문안에 뭐가 있을 줄 알고.
아이들은 무지하기 때문에 겁이 없고 또 같은 이유로 겁을 낸다. 무언가를 해본 경험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봐온 바로는 처음 하는 건 무조건 못한다고 한다. '선생님, 나 이런 거 못해요.' 그때 할 수 있다고 격려하면서 아주 작은 성장이라도 크게 칭찬해 주면 아이는 도전하기 시작한다. 조금씩 용기를 내며 뿌듯해하는 모습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아이들은 무지하지만 나약하지는 않다.
도전에 여러 번 성공하면 아이들은 잘난척하기 시작한다. 나도 이런 걸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며 어른을 이기고 싶어 한다. 사랑하는 조카는 어디선가 어설프게 덧셈, 뺄셈을 배워오더니 ‘이모, 가-10 +5’는 뭔지 알아?라는 말 같지도 않은 질문으로 잘난 척을 시작했다. (답이 뭔데?라고 했더니 자기도 모른단다.) 그때 '우와 대단하다'라고 해주면 입이 찢어질 듯 웃으며 행복해하고 어른의 시선으로 '그거 이상해'라고 하면 엄청나게 삐진다. 아이들은 매일 더 강해지고자 한다. 나는 그래서 아이들이 좋다. 해맑음이 좋고 변해가는 모습이 좋고 뭐든지 이기려고 덤비는 강인함이 좋다.
어른들의 사회에서는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아이 같다는 말이 좋게 쓰이지는 않는 거 같다. '어머, 어쩜 이렇게 아이 같아'라는 말은 때 묻지 않아 보인다, 어려 보인다 등등의 의미가 있지만 결론적으로는 '이제부터 난 널 무시할 거야'라는 말이 함축되어 있기도 하다. 그래서 사회에서는 서로 얕보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사실 어른처럼 보이기 위해 애쓰는 사람은 가장 미성숙한 사람이다. 덜 자란 어른은 나약하고 무지하고 이기적이다. 자신이 약한 걸 인정하지도 않고 무지한 것에 대해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그저 권리만 주장하는 존재로 남는다. 조그만 자극에도 공격적으로 반응하고 자기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게 탄로 나면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할 거라 생각한다. 겁에 질려 있기 때문에 모르는 건 아는 척하고 알 수 있는 건 애써 모른척하려 한다.
어른의 삶은 고단하다. 책임도 져야 하고 조율도 해야 하고 참을 줄도 알아야 한다. 겪어보기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 중의 고통이다. 그 와중에 더 강해 보이기 위해 서로 거짓말까지 해야 한다면 어른처럼 보이려 하는 게 꼭 필요한 일일까 싶다.
나는 부러질 듯이 나약한 것들이 싫다. 조금도 자라지 않은 새가슴을 부여잡고 겁에 질려 이기적으로 변하는 그 모습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 성인이 되면 그 누구도 용기를 심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도전도 성장도 함께 멈추는 거 같다. 어른이라고 으스대는 사람일수록 더 자라지 않은 사람이다.
그래서 아이들을 볼 때면 감탄하게 된다. 아이들은 재밌고 배울 점도 많고 언제나 성장하니까. 나는 아이 같은 사람이 좋다. 어른들의 무기인 가식과 허영 같은 걸 장착하지 않고도 잘 지낼 수 있는 그런 사람. 어른들의 세상은 무섭고 살벌하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용기를 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