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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리사 Aug 31. 2022

좀 쉬어가도 될까요.13년만의 쉼표.

Part 3.마흔, 치유의 시간





소중한 무언가를 잃었다. 그리고 마음이 얼었다. 웃을 일도 없고, 웃어도 웃는 것이 아닌 유령 같은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영어교육이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을 하면서 나는 수도 없이 웃었지만 내 마음은 차가운 얼음나라였음을 알게 된 것은 그 아이의 목소리였다. 어느 날 불쑥 찾아온 목소리, "나 사라지고 싶어." 당황스러운 목소리에 나는 거울을 한 번 더 쳐다보았다.



거울 속에서 차갑게 쓰린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보는 그 아이가 있었다. "나, 이제 그만할래." 뭘 그만한다는 건지 나는 나를 뚫어지게 오랫동안 보았다. 아주 오랜만에 나는 나를 봐주었다. 그 아이가 말을 걸어와서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마침내. 내가 나를 보게 된 것이다. 나는 그 시절 지독한 자기혐오에 빠져 있었다. 살찐 나를 회피하려 거울을 보지 않았고, 슬픔으로 술을 거의 매일 마셨으며 자주 울었다.



아빠가 긴 세월 아프셨고 긴 기간 온갖 궂은일들을 겪으며,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것이 내가 사라지고 싶은 이유였을까? 아니면 내가 아빠를 잃은 슬픔을 충분히 애도할 시간을 갖지 못하였을까? 아니면, 아빠만큼 나이가 들어 가면서 나도 이 세상에서 아프고 병들면서 언젠가 사라져 존재라는 것이 슬픈 것일까? 나는 그 목소리의 이유를 찾아 오랫동안 헤매었다. 술을 마시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걷고 또 걸으며 답을 찾아서 목소리를 내 보낼 생각을 하였다.



내 내면으로 깊이깊이 들어갈수록 눈물이 하염없이 났다. 긴 세월 알코올 중독과 암투병으로 아픈 아빠 사이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감을 안은 어린아이를 만났다. 엄마의 힘겨운 삶은 고스란히 내 삶이 되어, 내가 엄마가 되고 아빠가 내가 되어 한없이 마음이 무거운 그 아이가 거기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내 삶을 살았다. 성공하면, 부자가 되면 그들을 고통 속에서 구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나를 살려낼 기대로 그렇게 내가 없이 나는 나의 하루를 견뎠다.



미친 듯이 영어를 했고, 강사가 되었고 인정을 받았고 돈도 벌었다. 여러 기업체에서 유능하고 부족할데 없어 보이는 직원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뭔가 어릴적 꿈꾸던 모습의 내가 된 것 같아 벅찼다. 30대에는 공부방을 운영하고 더 큰돈을 벌고 싶어, 네트워크 사업도 해 보고, 과외에 외부 출강에 내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지경으로 나를 굴렸다. 비록 어릴적 우리 집은 이렇게 어려웠어도 어른이 된 나는 이렇게 멋지게 잘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큰 부를 이루고자는 목적에 1번이 어쩌면 부모님이었으리라.



그런데 그런 큰 부를 이루기에 내 마음 그릇이 너무 작았던 걸까.. 해가 갈수록 내면에서 해결되지 않는 슬픔이 나를 수시로 덮쳤다. 아빠는 갈수록 무너져갔고, 세상에서 조금씩 사라져 갔으며 나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우울과 무기력으로 힘겹게 내 일을 해 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빠는 소세포 폐암으로 어느날,  말 그대로 세상에서 증발해 버렸고, 가까운  이의 죽음을 처음 겪은 나는, 말로는 표현할 길이 없는 그 감정에 잠식당했다. 그 어디에서도 아빠를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 참을수 없이 황망하고 슬펐다. 불러 보아도, 아빠의 번호로 전화를 걸어도, 친정집에 찾아가 보아도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아빠. 가족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처음으로 온몸으로 느끼며 사는게 무언이지 다시 곱씹었다.


사랑하는 대상을 상실하고 치유하기 위해서는 저마다의 애도의 기간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도대체 얼마의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나는 아빠가 가신지 5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때때로 어떤 기억의 한 조각을 만나면 마음이 미어진다. 아픈 시간이 많았던 아빠라서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행복한 추억도 있지만 아프고 외로웠던 아빠의 시간이 그 비슷한 결을 따라갈 때마다 느껴져서 가슴이 저민다. 



슬픔과 우울을 나도 모르게 안아버린 어른으로, 나도 이제 마흔 나기를 하고 있다. 아빠의 마흔을 나도 통과하며, 엄마의 마흔을 살아본다. 엄마 아빠가 행복했던 시간의 기억으로 거슬러가, 아이인 내가 다시 웃고 있다. 엄마 아빠가 함께 식사를 하며 따뜻한 웃음을 짓는다. 최고의 자녀 교육은 부모가 먼저 행복해지는 것이라는 말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런 이유로 나는 행복해지기로 결심하며, 이제 거대한 슬픔을 애도하고 떠나보내려 한다. 글을 쓰며 나를 본다. 걸으면서 내 이야기를 듣고, 눈물로 슬픔을 씻는다. 아주 오래오래 긴 시간이 걸리더라도 마침내. 나는 행복에 이를 것이다. 평온에 이를 것이다.



우리 아이들의 마흔에 나의 슬픔을 지워내기 위해 나의 슬픔을 마주한다. 꾹꾹 참아왔던 시간을 뒤로하고, 처음으로 내가 나를 쉬게 해 준다. "나 좀 지친 것 같은데 쉬어도 될까? 그래, 그동안 애 많이 썼어. 좀 쉬어가자. 너 참 열심히 살았잖아. 내가 널 인정해 줄게." 이렇게 내가 나에게 내어주는 쉼의 시간을 받아 들고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나를 쉬지 못하게 했던 것은 남편의 돈 걱정 가득 담긴 야속한 말도 아닌, 바로 나 스스로의 채찍질과 같은 목소리였다. '지금 쉬면 너는 무능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그 지겨운 가난으로부터 영영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그러니 조금 더 참고 일을 하라고.'



그렇게 달려온 시간에 나는 그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멈춰 섰다. "사라지고 싶다고 하지 않아도 내가 너를 알아봐 줄게. 쉬고 싶을 땐 쉬어가고, 울고 싶을 땐 마음껏 울자. 기쁜 날엔 한없이 기뻐하고 무기력이 찾아오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 여유를 주자. 나의 우울증이 내게 건넨 목소리는 '나 좀 쉬고 싶어'였으며, 그럼에도 맘 편히 쉬지 못하고 있는 나를 끌어안으려 이 글을 쓴다. 제대로 쉬어 본 적이 없다. 항상 미래를 걱정하고 돈 걱정을 하며, 일 걱정을 하며 나는 현재에 살지 못했다.



이제 그런 나를 바라보며 사랑스럽게 끌어안는다. 너는 좀 쉬어 가도 괜찮다고. 네가 그 무엇을 이루지 못해도 너는 존재 그 자체로, 지금 있는 그 모습 그대로 훌륭하고 온전하다 말해 준다. 내가 그토록 원했던 평온한 안정감을 다른 누구의 존재도 아닌 내 존재가 건네 오는 위로로 채운다. 결국 사람에게 기대어 더 상처가 컸던 시간을 떠올리며, 아무리 힘들어도 다른 사람에게 기대지 않는 지혜를 얻었다. 나를 가장 잘 알고 위로해 줄 존재는 이 세상에 나 밖에 없다.


이제 제대로 쉬기 위해, 더 치열하게 여기에 머무르자. 혹시 당신도 나처럼 조금 지쳤다면, 스스로에게 휘두르던 채찍질을 멈추고 따뜻하게 자기 안으로 들어가자. 모든 감정은 그럴만해서 우리에게 찾아와 말을 건네는 것이니 당신도 나처럼, 어떤 작은 목소리가 들려온다면 그때는 꼭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길 바란다. 당신이 사라진다면 이 세상 모든 것들이 함께 사라지는 것이니까..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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