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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리사 Oct 23. 2023

지금 순간을 살기 위한 철학 수업, 마흔에 읽는 니체

리사의 책과 마음공부

삶이 참 안 풀리고, 답답하고, 세상 밖으로 사라지고 싶을 때가 있었다. 혼자만의 망상에 빠져 피해의식에 허우적 대던 그 어린 날들의 나. 그때의 나에게 조금 지혜로워진 나는 니체 철학을 만나 통하는 미소를 지어보는 아침이다. 그때의 너에게도 지금의 나에게도 이 말은 참 속 시원하고 허탈하기도 한 미소를 머금게 한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



그렇다. 정답 같은 게 있는 줄 알고 계속 찾아 헤매니 속이 답답할 수밖에. 애초에 인생에 정답이란 건 없다. 니체의 철학은 허무주의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즉 무의미한 삶에서 벗어나는데에서 출발한 것이다. 아직도 나는 약간의 허무주의의 시선을 안고 삶을 본다. 그것도 내가 카르마적으로 가지고 온 삶에 대한 관념인 것 같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자기 자신만을 의지하며, 진정 나답게 사는 것'


그것을 위해 이 먼 길을 헤매며 온 것이다. 외롭고 고독하다는 느낌, 나 혼자 무인도에 떨어진 느낌을 안고 오래 살았다. 누군가 내 섬에 들어오고 마음이 통하면, 지독하게 의지하고 싶고 나를 구원해 주길 바라며 누군가를 찾았다. 연인, 혹은 절친한 친구. 마음이 맞고 나를 알아봐 주면 그렇게 그에게 모든 걸 다 내어줄 듯 기대곤 했다. 그러다 그가 부담스러워하거나 애정이 철회되는 느낌을 조금이라도 받으면 세상이 다 무너져 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답이 아니었다. 너무나 잘 알고 있고 홀로 됨이란 결코 문자 그대로 혼자는 아니다. 사실 마음공부가 더 깊어지면 혼자 잘 선다는 것은 일체가 나 자신이 되는 신비를 경험한다.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닌 일체감을 안고 로 서는 것이다.


"삶은 고통 그 자체"이니 "네 운명을 사랑하라"가 니체의 '운명애'다. 삶이 고통이라는 것에 공감해 버린 사십대가 되었다. 내 나이 마흔 즈음 나는 엄청난 사람이 되어 삶을 달관할 줄 알았다. 이십 대, 삼 십대 즈음의 어린 나는 사십 대가 되면 정말 큰 어른이 되는 건 줄 착각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은 전혀 없다. 그저 삶이 고통이라는 것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할까? 그리고 어떻게 내 운명을 사랑하게 되어 가는지 그 과정을 묵도하며 묵묵히 내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 그 정도가 내가 깨우친 사십 대의 어른 모습이다.


이 정도도 훌륭하다 생각한다. 지금은 거친 파도를 지나 잠잠하고 평온한 바다가 된 것 같다. 감사하게도 니체 철학은 나에게 그 방향이 옳은 것이라 말하며 한껏 들썩이던 나의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참 차분하다. 이런 삶도 참 훌륭하고 좋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바로 내 운명을 사랑하고 그저 지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니 늘 한껏 쓰던 인상을 풀고 몸에 힘을 빼고 터벅터벅 즐겁게 산책길 걷듯 걸어가게 된다.


달려야 꼭  사는 삶이 아니라는 것. 달리기가 즐거운 사람, 산책이 즐거운 사람, 빠른 걸음으로 걷는 것이 딱인 사람, 제각각 자기 삶의 모양, 운명이 다 다르다. 그리고 그 운명이란 녀석은 또한 정해진 바가 없다. 시시 각각 인연에 맞게 변해가는 것.


"역풍을 만나 보아야 어떤 바람에도 항해할 수 있다."


지금까지 만난 역풍을 헤아려 보았다. 나름대로 나는 그 험난한 일들을 역풍이라 여겼다. 지극히 주관적이다. 주관적인 것이 바로 삶이니까 비교는 하지 않는다. 내 기준에서 역풍들을 맞이하고 겪어내고 나니 이제 내게 불어오는 바람이 즐거워지기 시작한다.


어떤 바람이든 나는 잘 항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믿음은 역풍을 만나 본 자만이 아는 여유다. 그래, 까짓 껏, 그 역풍도 내가 이겨냈는데 이 정도 바람은 아무것도 아니지. 즐거운데, 정말 신선한 바람이구나. 이렇게 마음먹을 수도 있을 것이다.


"주사위가 던져진 그 순간이 우리의 인생"


우리 인생을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주사위가 던져진 그 순간이 우리 인생이라고. 주사위를 던지기 전, 던진 후, 과거와 미래에 사로잡히기보다 지금 이 순간, 늘 우리는 인생이라는 주사위를 던지고 그 순간에 춤추며 살면 된다. 어떤 숫자가 나올지 알 수 없기에 늘 기대되고 즐겁고 설렌다. 불안조차 행복할 수 있다. 마음만 바꿔 먹으면 말이다.


"죽음을 맞이하는 법"


죽음에 대하여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자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 제때에 죽도록 하라"라고 말한다. 제때에 죽는 것이란 자신이 원하는 죽음을 맞이하는 '자유로운 죽음'을 의미한다. 니체는 왜 우리가 원하는 때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라고 하는 것일까? 니체는 이어서 "결코 제때에 살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제때에 죽을 수가 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즉 제때에 살아 본 사람만이 제때에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제때에 사는 삶이란 바로 '초인'으로서의 삶이다. 자기 자신을 극복하려는 초인이야말로 제때에 살고 제때에 죽을 수 있는 것이다. 무미건조한 현실 안주적 삶을 영원히 살 것인지, 제때의 삶을 살 것인지는 이제 자신의 삶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의 문제가 될 것이다.


'메멘토 모리'가 제때에 살고 죽기 위한 답이다.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는 늘 이 순간순간 죽음을 기억하며 사는 것이 아닐까. 고대 로마인들은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메멘토 모리라는 말을 했다. 삶과 죽음은 이렇게 동전의 양면이 되어 우리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삶이 정말 힘들 때 죽음을 떠올려 보았다. 그랬더니 오히려 차분하고 명료하게 삶이 내 앞에 떠오르며 메시지를 주었다. 정말로 죽을 때까지는 죽은 것처럼 살지 말고 제대로 (니체의 말로는 '제때에') 살아야겠다고 말이다.



삶의 모든 것이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 오늘 나에게 힘을 주고 달콤한 말을 해주는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니체가 <이 사람을 보라>에서 "존재하는 것에서 빼 버릴 것은 하나도 없으며, 없어도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라고 말한다. 어떤 것은 너무나 보잘것없어서, 그래서 봐주기 싫은 자신의 내면의 세계가 있다. 좋은 것만 내 것으로 취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체는 존재속에서 이미 온전하고 하나이다. 빼 버릴 것이 어느 것 하나 없다는 말에서 나는 내 존재 또한 그런 속성들로 이뤄졌다는 위안을 받았다.


나의 모자람도, 결핍과 편협함도 모든 부조리와 관계에 서툰 모습도 다 이미 온전하고 하나로 충분히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모든 것들과 다 함께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삶과 마주하라". 그렇게 최고의 나를 만나러 가는 길이 바로 삶이다. 살면서 남긴 수많은 오점들 때문에 비참해지던 순간도 함께 간다. 그 순간들이 있어 최고의 영광된 순간이 있으니, 어느 것 하나 버리지 말고 함께 가자.


"우리가 경함 한 모든 것이 우리를 고귀한 인간으로 만든다."



오늘의 경험을 환영한다. 어제의 경험에도 박수를 보낸다. 비록 뼈아픈 경험이었지만 그 경험으로 오늘의 성숙한 내가 있는 것이다. 내일 다가 올 또 다른 경험에 설레며 주사위가 던져지 오늘의 시간에 깨어있다.


마흔에 읽는 니체는 나에게 두고두고 지혜로운 이야기들로 답답한 방황의 시간에 그만의 답을 전해 주었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 니체의 사상이 정답이 아니고  또 그 누구의 말도 정답은 아니다. 그저 내가 있다. 그 모든 것을 어떻게 수용할까 하는 내가 세상의 중심에 있다.


내가 되어 나답게 살아가는 연습을 한다. 연습처럼, 실전처럼 삶은 그렇게 지금 여기에 달려와 있다. 눈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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