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예순셋, 정윤의 책장이 막 덮이려는 순간이다. 정윤이라는 책이 펼쳐지기 전, 그 모든 순간부터 함께 한 존재가 온화하게 미소를 보낸다. 정윤에게..
그동안 참 멋진 삶을 펼쳐내었다고 따스히 안아주는 것이다. 너는 누구보다 훌륭하게 너의 삶에 최선을 다하였다고 누구보다 따뜻하게 그를 끌어안아 준다. 정윤은 그제야, 깊고 포근한 숨, 그 한 숨, 을 제대로 쉬어 본다. 그동안 무겁게 그를 짓누르던 죄책감과 우울, 불안과 공황을 다 껴안고서 제대로 숨을 쉬어 본 적이 없었던 정윤은, 그제야 그 존재의 품 안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숨을 쉬었다. 빛이었다. 그의 삶은 파노라마처럼 흐르며 빛과 함께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너무 아프고 힘들었지만..
정말, 멋진 삶이었어요.."
정윤이 말이 아닌 느낌으로 존재에게 전한다.
"저에게 이런 삶을 주셔서 감사해요.."
존재는 그저 따뜻하게 정윤을 안아 줄 뿐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그곳에서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온전한 사랑 속에 머문다. 빛이었다. 늘 그와 함께 했으나 느끼지 못한 그 빛 속에서 지구별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도 빛이 되어서 말이다..
작별의 시
먼 ~~ 길 떠나려고
긴 ~~ 한 숨 몰아 쉬며
작별을
신음으로 노래하네..
그대여
부디 날개 달고
천상을 향하여
무지개 타고
영원한 그곳에
완주해 다오..
-송옥례-
정윤의 아내가 정윤의 병상에서 시를 쓴다. 그녀는 정윤이 가장 사랑하고 동시에 미안한 존재이다. 정윤의 아내의 시는 정윤의 마음에 보석처럼 들어와 박혀 아픈 마음을 치유한다. 그녀는 평생 아팠던 그를 언제나 치유해 주고 보호해준 존재였다. 그녀의 시는 순수하고 맑은 어린 소녀의 감수성과 같아서 그의 소년 시절 상처들이 씻겨나가는 것 같았다. 정윤의 수많은 소년 시절의 상처가 고스란히 그의 가정으로 가서 폭탄처럼 터졌고 정윤의 아내는 시를 썼다. 시는 그녀를 살아있게 했고 희망을 주었다. 아픔을 위로하고 맑은 눈물로 상처를 씻어주었다
정윤의 신음소리와 또 다른 환자들의 신음 소리가 교차하며 슬픈 하모니를 펼친다. 병동내의 의료기계장치의 '뚜뚜'소리와 그들의 신음소리, 기침소리, 얕은 숨소리와 앓는 소리들.. 무지개다리 건너 먼길을 가기 전 그들이 '생의 마지막 장'을 펼쳐내는 장엄한 오케스트라 같다. 호스피스 병동에는 이렇게 정윤처럼 생과 사를 오가는 사람들이 하루를 일 년처럼 그렇게 애를 태운다. 혹여나 기적을 만나 살아날까, 아니면 혹여나 죽지 않고 더 오래 살까 노심초사하는 그 많은 이들의 마음이 슬프게 오간다. 슬픈 일이다. 누군가는 그의 죽음을 원하고 또 누군가는 하루만, 한 달만, 일 년만, 그렇게 더 살기를 원하고 있다.
언제나 죽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술버릇처럼 말하던 정윤이었다. 죽음이 그의 머릿속을 떠난 적이 없었으나 막상 죽음 문턱 앞에 선 정윤은 만감이 교차하는 심정이다. '죽고 싶다'는 말은 사실 '살고 싶다' 였음을 그는 고백한다. 삶을 돌아보며 후회와 회환이 쓰나미처럼 밀려와 '정윤'이라는 바다를 온통 덮치고 할퀴고 때린다. 그를 바라보는 가족들의 마음도 거센 바다의 파도처럼 잠잠할 날이 없었다. 한 생명이 왔다가 가는 것은 이렇게 장엄하고도 쓸쓸한 일임을 호스피스 병동에서 느낀다. 정윤은 세상에서 사라져 갔지만 또한 알게 되었다. 그의 사라짐은 사라짐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정윤은 이제 그의 예순세해동안, 그 파란만장한 시간을 뒤로하고 영원히 고통이 없는 평온이 자리에 이르렀
다. 위대하고 장엄한 빛.. 아름다운 사람들에 대해서... 아름다운 인생에 대해서..그는 온 삶으로 지켜낸 소중한 것들을 바라보며, 뜨껍게 흐르는 눈물로 작별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