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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상처받은 내면아이를 처음 만나다

Part 3. 마흔, 치유의 시간

by 김리사

안녕,

섬뜩한 눈빛의 그 아이가 나를 보며

무섭게 웃는다.


너는 이제야 나를 보는구나,

내가 얼마나 알아봐 주길 기다렸는데..





화장실에 가서도 거울을 보지 않은 시간이 몇 해가 흘렀다. 손을 씻으면서도 거울을 보는 것이 싫었다. 슬픔에 절은 뚱뚱하고 볼품없는 나, 봐주고 싶지 않은 나를 외면한 것이다. 그때부터 일 것이다. 내가 나를 지독하게 싫어하던 일상이 반복되었던 시간 말이다. 엄마와 아빠의 삶의 아픔을 다 내 것인 양 짊어진 채 행복한 순간에도 미안해하던 아이는 이제 어른이 되었다. 엄마가 되었다. 그런데 내면에는 이렇게 늘 상처투성이로 마음이 아픈 아이와 어른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아이, 둘로 나뉘어서 무겁게 살았다. 거울을 보는 것은 그 상처를 마주하는 것이고 아픈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일 만 같았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거울을 보면서 그 아이를 보았다. 너무나 지치고 슬픈 눈을 한 그 아이를 보면서 눈물이 났다. 처음에는 두려움을, 그러고 나서는 눈물을. 그렇게 그 아이의 존재를 처음으로 인정했던 밤을 잊지 않는다. 나는 하나가 아닌 둘이었으며 늘 목소리와 함께 살았던 것이다. 이렇게 나를 버리고 죽은 사람처럼 살았던 나는 책 한 권을 만나 그 아이를 마주 보게 되었다. 타라 웨스트오버의 <배움의 발견>, 이 책이 나와 그 아이를 마주 보게 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이유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내가 거울로 들어가고 나 대신 거울 속의 열여섯 살짜리 소녀를 내보내지 못한 그 순간이 바로 극의 절정이었다. 그 순간까지도 그 열여섯 살 소녀는 늘 거기 있었다. 내가 겉으로 아무리 변한 듯했어도 나는 여전히 그 소녀였다.


좋게 봐준다 해도 나는 두 사람이었고, 내 정신과 내 마음은 둘로 갈라져 있었다. 그 소녀가 늘 내 안에 있으면서, 아버지 집 문턱을 넘을 때마다 모습을 드러냈다. 그날 밤 나는 그 소녀를 불렀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를 떠난 것이다. 그 소녀는 거울 속에 머물렀다. 그 이후에 내가 내린 결정들은 그 소녀는 내리지 않을 결정들이었다. 그것들은 변화한 사람, 새로운 자아가 내린 결정들이었다. 이 자아는 여러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변신, 탈바꿈, 허위, 배신, 나는 그것을 교육이라 부른다.



<배움의 발견> 타라 웨스트오버





타라 웨스트오버처럼 가족 내에서 나는 신체적 학대를 받은 적도 없고 정상적인 학교교육을 받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가 이성적이지 않는 가족 구성원들 속에서 그녀 자신을 어떻게 분리시키고 스스로 설 수 있었는지를 보는 과정은 나에게 저 밑바닥에 깔려 있던 나의 가족 속에서 받은 슬픔을 내려놓고 나 자신로 살아가도록 힘과 용기를 주었음에 틀림없다.



나는 그토록 그곳에서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었으며, 때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늑대같은 밤의 시간을 펼치는 아빠를 끌어안아야 했다. 가난한 집의 굴레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과 부모님의 삶을 보란듯이 성공한 내가 대신 구해주고 싶은 자아가 있었다. 나 자신이 되지 못하고 그렇게 부모가 되어 버린 삶을 사는 어린아이가 거울 속에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처럼 이제 더 이상 그 예전의 자아로 살아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마흔이 되면서 겪은 수많은 방황은 내가 되기 위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거울 속의 그녀를 불러 보아도 더 이상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는 타라 웨스트오버처럼, 내 자아도 긴 시간에 걸쳐 탈바꿈한 자아가 되기 위해 많은 일을 겪었다. <아티스트웨이> 여정을 따라 내면아이와 단 둘이 떠나는 여행을 수차례하면서 나를 만났다.내면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글을 여과없이 쓰고 많이도 걷고 걸었다. 이 모든 시간 울어낸 눈물이 나를 치유하고 있었다.



남편과 성격차이로 극심한 불화로 이혼할 뻔한 일들도 내가 새로 서기 위한 자아의 역할이다. 그 전의 나는 문제가 있으면 회피하고 내 속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두려운 아이였다. 아빠, 엄마의 삶 속에서 나도 모르게 배운 것이 바로 묵묵히 견디고 참는 마음, 그것이었으니까. 불편하면 일단 내 쪽에서 참아버리는 것이 가장 편안했기에 나중에는 문제가 크게 터졌다. 그리고 내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배워가면서 하나씩 문제를 풀어가게 되었다.



모든 일들은 지나가고 나면 흐릿해지고 점점 사라져 간다. 그러나 내 내면아이가 두려움에서 풀려날 때 까지는 아마도 나는 편안할 수 없을 것같았다. 그래서 그렇게 나의 다른 자아를 만나게 해 준 <배움의 발견>의 타라 웨스트오버에게 깊은 감사를 표하고 싶다. 조금씩 벗어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글이기 때문이다. 글이라는 것의 위대함을 또 한번 느끼며 나도 글을 쓰며 나를 만나고 위로하고 싶어졌다. 그녀의 고통의 시간을 위로하며 나의 고통에도 이름을 붙이고 떠나보내려 하는 중이다.



모든 이름 붙여진 감정들은 그 존재를 알아봐 준 것이기에, 이제 다시 흩어지는 에너지가 되어 사라진다. 무시해 버린 부정적인 감정들은 무의식으로 들어가 다시 존재를 알아봐 줄때 까지 우리를 괴롭힌다. 모든 감정들이 이렇게 풀려나간다는 것을 마음공부 책을 통해 배웠다. 마음공부를 하면서 나는 무의식에 묶여있던 무거운 나의 마음을 어떻게 풀어내는지 배우고 또 배우며 실천했다.


오늘날 밝아진 내가 있는 것은 '이름 붙이기'라는 그 모든 마음 풀기 작업들이었고, 책을 통한 위로였고 글로서 분출하는 통쾌함이었다. 내가 지난 나의 그 힘겨운 시간에 붙인 이름은 '아빠의 슬픈 내면 아이를 껴안고 위로하기'였다. 아빠를 용서해야 나를 용서할 수 있으며 아빠를 위로하는 힘으로 나를 위로할 수 있을 것 같다.


엄마의 삶도 같이 치유받고 우리 가족들이 모두 아픔을 안은 상처받은 치유자로 또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나는 그 시간을 다시 위로한다. 아빠도 슬픈 내면아이를 안고서 그렇게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버렸고, 고단한 삶이지만, 아빠 나름대로 끝까지 살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다고 믿는다. 나도 아빠처럼 술을 마시는 어른이 되면서 더 많이 이해하게 된다. 술이 때로는 가족보다도 더 나를 존재로서 위로해주는 기분을 느낄때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치유가 일어날수록 나는 다시 아팠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그 아픈 상처에 이제 살이 차오른다. 이제는 올라오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도 안전하다는 것을 배운다. 그렇게 조금씩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되어간다. 얼마나 더 자라야 나를 떠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조금씩, 조금씩 자라기 시작한 거울 속의 어린 내 자아가 나를 보며 웃는다.



그것으로 시작이다. 나는 더 자유롭고 당당해질 수 있을 것이다. 엄마, 아빠에서 분리된 더 용감한 어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과도한 술이 없어도, 존재로서 위로받는 기분을 더 많이 느낄수 있다. 자기 안의 내면아이와 더 잘 소통한다면 말이다.



Love yourself. Be yourself.

내면아이가 웃는다. 나도 웃는다. 삶이 있는 그대로 당신처럼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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