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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떠났다-초록색 병과 아빠

사라지고 싶은 너에게 보내는 위로

by 김리사

좁다란 골목길에 오토바이 소리가 울린다. 작은 구멍가게를 하고 있는 우리 집 앞에 그 소리가 다다른다.


부릉부릉 부웅~~~



오토바이는 이미 얼큰하게 취한 소리를 낸다. 온 집안이 차갑게 얼어붙는 시간이다. 어릴 적 나는 이렇게

오토바이 소리만 나면 일단 한번 놀란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들으며 아빠의 음주 상태를 가늠하는 것이다.

오늘은 무탈히 넘어갔으면.. 정말 나의 학창 시절은 아빠의 술로 인해 늘 좌불안석이었음을 고백한다. 지금

마흔이 된 나는 여전히 오토바이 소리나 큰 소리가 오가면 흠칫 놀란다. 어릴 적 집안에서 펼쳐진 불안한 소리

에서 기인하는 트라우마인 것 같다.



아빠는 오토바이를 타고 집에서 장사를 하시는 어머니의 장 본 물건들을 집까지 날라주시기도 하였다.

미장일을 하시며 건설현장에서 집을 오갈 때 오토바이를 주로 타고 다니셨는데, 미장일이 굉장히 힘든 일이

라 힘든 작업 끝에 늘 술을 즐겨 드셨던 기억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오토바이는 어김없이 취한 부르릉 소리를

내며 집 앞으로 도착한다. 온 가족이 참 싫어했던 순간들이 수없이 반복이 되는 여러 해가 있었다. 도대체 누가 술이라는 악마를 만들어 내었는지 찾아가서 죽이고 싶다. 그러나 뜻밖에도 행운인지 불운인지 그렇지 않은 여러 해를 또 보내게 되었다.



그 평온한 여러 해는 아빠의 위암 소식으로 시작되었다. 평온하다는 말을 쓴 이유는, 수술 후 몇 년간 아빠는 술과 멀어진 삶에서 착하고 순한 양이 되셨기 때문이다. 아빠는 마흔이라는 젊은 나이에 위암 선고를

받으셨다. 내가 마흔이라는 나이를 지나오면서 느낀 것은, 참 스스로 아직 어른이라는 생각이 잘 들지

않는 어리고 어린 나이인 것 같다는 것이다. 그렇게 젊은 나이에 위암, 그것도 3기를 넘어선 위암 선고를 받은

면 정말 절망적인 생각뿐일 것이다. 아내와 1남 2녀의 자식이 있고 아직 한참 때의 자식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의 무게는 상상 너머의 그것일 것이다. 지금 내 나이가 아빠의 그 시절 나이가 지나간 후 다시 돌아보니 아빠가 얼마나 그때 암담하고 두려웠을지 조금은 상상이 간다.



아빠는 그렇게 위암 첫 수술을 하셨고 두해 후에는 재발하여 재수술을 하며 위를 거의 다 잘라내셨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아빠는 위암이 완치되어 예순셋까지 사셨다. 비록 여러 가지 병증으로 오랫동안 아프셨지만 위암으로부터 벗어나 그 후로 20년을 더 우리와 함께 하셔서 감사했다. 아빠의 마지막은 또 다른 종류의 암, 소세포 폐암이었다. 아빠의 마지막 모습은 상당히 고통스러웠다. 폐가 망가지니 호흡하기가 힘들어서 호흡기를 달고 간신히 숨을 몰아쉬던 아빠의 병상의 모습을 기억한다.


잘 먹지 못하니 온 몸이 비쩍 마르고 앙상해진 아빠를 보는 것이 고통스러워 눈길을 피해버렸다. 사람의 다리가 그렇게 가늘어질 수 있는지 아빠의 마지막 모습에서 알게 되었다. 위암 수술 이후로도 아빠는 거의 하루에 평균 2~3병의 초록색 병과 친하게 지내셨고 지금도 돌이켜 보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술을 드실 수 있는지 아빠의 간은 특수한 간을 타고난 것이 아닌가 신기하고 신기할 따름이다. 물론 돌아가실 때는 잦은 음주로 건강이 나빠져 고생을 많이 하신 것이 분명하다.



아빠의 삶에서 술이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해 본 적이 많다. 지금 떠오르는 한 단어는, '외로움'이었으리라. 짙은 외로움과 내면 아이의 슬픔. 그것이 내가 훗날 아빠의 마음의 병을 이해하며 내린 결론이다. 아빠의 외로움이 커져갈수록 아빠가 소비하는 초록색 병은 더 긴 줄을 지어 아빠를 따라다녔다. 아빠의 그림자는 초록색이었다. 초록색 슬픔과 초록색 위로가 늘 아빠를 교차하며 우리 가족들의 마음에도 초록색 멍을 들였다.



알코올 중독증 부모가 있는 집에서 자란 자녀들은 둘 중하나라고 한다. 술을 아예 멀리 하던지, 술과 정말 친해지던지. 나는 후자 쪽의 삶을 살았다. 아빠처럼 술로 가족들을 언어폭력으로 괴롭히지는 않았지만, 나의 몸을 괴롭히고 나의 마음을 몹시도 괴롭히는 어른이 되어갔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아빠처럼 나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어른이 된 것이다. 오늘날 내가 마흔이 다 되어 들려온 목소리가 없었다면 나는 아빠처럼 슬프고 외롭게 살다 갔을지 도 모르겠다. 그래서 오히려 나의 심리적 마흔 앓이가 고맙기도 하다.



내면에서 올라오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나의 마음에 다가가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아빠도 아픈 어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말이다. 아빠의 내면에도 나처럼 바들바들, 슬픔에 떠는

내면 아이가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아빠의 우울에 뒤늦은 위로를 보낸다. 아빠의 '나 홀로 외로운 섬' 인생에 깊은 위로를 보내며 나의 뿌리 깊은 마음의 상처도 치유가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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