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그리고 그 후..
나르키소스가 죽었을 때 숲의 요정 오레이아스들이 호숫가에 왔고, 그들은 호수가 쓰디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대는 왜 울고 있나요?"
오레이아스들이 물었다.
"나르키소스를 애도하고 있어요."
호수가 대답했다.
"하긴 그렇겠네요. 우리는 나르키소스의 아름다움에 반해 숲에서 그를 쫓아다녔지만, 사실 그대야말로 그의 아름다움을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었을 테니까요."
숲속의 요정들이 말했다.
"나르키소스가 그렇게 아름다웠나요?
호수가 물었다.
"그대만큼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나르키소스는 날마다 그대의 물결 위로 몸을 구부리고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잖아요!"
놀란 요정들이 반문했다.
호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저는 지금 나르키소스를 애도하고 있지만, 그가 그토록 아름답다는 건 전혀 몰랐어요.
저는 그가 제 물결 위로 얼굴을 구부릴 때마다 그의 눈 속 깊은 곳에 비친 나 자신의 아름다운 영상을 볼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가 죽었으니 아, 이젠 그럴 수 없잖아요."
파울로 코엘료 장편소설 [연금술사] p.14쪽 본문
그 시절엔, 가랑비가 오랫동안 내렸다.
서서히, 서서히 그에게 젖어들었다.
가랑비는 어느새 폭우로 변해 있었다.
눈도 뜰 수 없이 내리던 그 폭우,
속수무책으로 흠뻑 젖어버렸던 그 수많은 낮과 밤들..
기묘하고 아름다웠던 첫사랑,
사랑한 그만큼 씁쓸하게 변해버린 그 추억들..
그 시간의 단상..
사랑이 떠난 자리에 남은 것은 이 질문 하나였다.
당신은 누구를 사랑했던가?
'그'인가, 아니면 '그를 사랑하는 당신 자신'인가?
내 삶의 인생 시계 안에서, 첫사랑이라는 이름을 가져갈 그는 누구일까?
문득, 첫사랑이라는 글감 앞에서 '쓴 미소'가 번진다.
달콤함이 아닌, 쓰디쓴 그 미소.
'첫사랑'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떠올리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첫사랑"
처음 해본 사랑 같은 사랑,
처음 강렬하게 느낀 어른끼리의 사랑,
모든 것을 줘도 아깝지 않다 느낀 첫사랑,
처음 느낀 열열한 감정, 그 사랑,
이뤄지지 않아 아픈 첫사랑,
떠올리면 가슴 시린 절절한 첫사랑.
머릿속에 떠오르는 다양한 정의를 두고
나는 다시 '첫사랑'이라는 단어 앞에 섰다.
내가 떠올린 '첫 사람'.
그는 미숙한 사람이었다.
인간관계에 서툴고 다정한 말을 할 줄도 모르는 그런 사람. 지독히도 자기애가 강하고 어딘가 마음 아픈 구석이 있는 것 같은 사람. 그걸 애써 숨기려 더 뾰족하게 구는 사람. 세지만 속은 여린 그런 사람.
나는 왜 그런 서툰 사람에게 사랑을 느끼는 사람인 걸까?
'서울 오빠'같은 말투의 다정다감한 남자 친구감에 대한 이상향과는 별개로 내가 사랑한 사람은 '서툰 사람'이다.
그렇게 서툰 사람이 나에게는 서툴지 않은 모습으로 사랑을 말하고, 진심을 다한 표정으로 다가올 때 나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린다.
그렇다.
내가 좋아한 건, 그 서툰 이 가 "오직 나에게" 좋은 사람이고자 한다는 것. "오직 나에게" 특별하고자 한다는 것. '속수무책'으로 나에게 무너져 내리는 사람. 나는 그 점이 좋았다. 어딘지 모르게 끌리고, 내 안에 그런 서툰 모습이 투영되기도 하였다.
나중에 마음공부를 하며 안 일이지만, 지금 떠올려보면, 그 "서툰 그이" 속에는 돌아가신 아빠의 모습이 많이 투영되어 있던 것 같다. 나는 애증관계였던 우리 아빠를 몹시 사랑하였고, 아빠는 그런 서툰 이 중 한 명이었다. 그런 아빠를 온전히 사랑할 수 없어 닫아 버린 공간이 있었고, 그 공간은 계속 빈 방이 되어 내 마음에 존재했다.
그러던 날, 어느 '첫사랑'이라는 이름의 서툰 이 가 가랑비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그 비를 함께 맞으며 조금씩 조금씩 그 방의 문을 열었다. 그를 통해 충족되던 마음이 있었고, 방은 온통 신비로움으로 가득 찼다. 살아있다는 것이 그렇게 뭉클하고 아름다운 일인 줄 몰랐다. 그가 빈 방을 온기로 채워주면 세상은 온통 그의 향이 퍼져나간다.
그만의 고유한 향,
늘 취해버리고야 마는 그의 향,
흉내 낼 수 없는 세상의 단 하나뿐인 향,
그에게도 나는 그런 향을 주었고,
하나로 섞여드는 향이 우주가 되고 세상 모든 것이 되어
멈춰버린 시간이 있었다.
진정으로 세상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방이 있었고,
늘 그 방은 우리 둘 만의 작은 우주였으며, 동시에 거대한 우주 전체였다.
그렇게 우주가 커지고 커질 때쯤,
사랑은 고통이 되어 있었다.
가슴을 쥐어뜯는 듯한 통증이 수시로 찾아왔다.
알 수 없는 슬픔과, 흐르는 눈물과 찌릿거리는 통증이
온몸을 훑고 지나간다.
사랑하지 않을 것을..
그를 사랑하지 말 것을..
연민을 느끼지 말 것을, 그는 내 아빠가 아닌 것을..
온갖 생각이 스치고 지나가며,
그의 행동이 이별을 말할 때..
깨달았다.
내가 사랑한 것은 그가 아니라, 그를 사랑하는 나였음을..
그는 내 삶에서 점점 사라져 갔다.
서툰 이를 사랑하던 그 방은 다시 텅 비어버렸고
우리가 좋아하던 서로의 향기도 서서히 빛바래 갔다.
온갖 날이 선 모진 말과, 눈빛과 행동으로,
나에게 씻을 수 없는 마음에 생채기를 내며,
어쩌면 나도 그에게 그런 상처를 주며,
동그랗게 내 마음에는 구멍이 뚫렸다.
구멍난 가슴으로 시린 바람이 불며, 아무것에도
즐거움을 찾을 수 없던 수많은 낮과 밤을
지났다.
사랑의 방으로 들어가는 길엔 둘이서 따뜻하고 축축하던 손을 꼭 마주 잡고 있었으나,
돌아 나오는 길은 지독히도 쓸쓸하고 고독한 혼자임을 아는 일,
그것이 내가 배운 첫사랑이었다.
첫사랑 후에 남는 것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심을 다해 사랑했다는 것이다.
다시 돌아가도 또 그렇게 사랑할 것이라는 것.
바보 등신처럼 이용당하는 느낌이 들어도
그를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는 이상,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내게 머무는 한,
똑같이 사랑할 것이었다.
그것이 삶의 이유였고, 살아있는 극강의 기쁨이었고,
지구별에 태어난 보람이었고, 사랑할 수 있어 눈물이 났으므로..
그리고 재촉하지 않아도 끝끝내 그 사랑은 내게서 떠나갈 것이었으므로.
그 사랑이 내게 남아 있는 한,
내가 그 사랑을 느낄 수 있는 한,
나는 나를 위해 그 사랑을 안고 있었을 것이었다.
그것이 지독히 내가 나를 사랑하던 방식의 사랑이었다.
지나고 보니,
나는 진심으로 사랑했었다.
나를 사랑하는 그를,
아니, 그를 사랑하는 나를,
나 자신을.. 그 사랑 안에 있던 황홀함을
몹시도 사랑했던 것이다.
다시는 없을 사랑이라 말하고 싶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의 탄생과 죽음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정면으로 따라가 본 시간이었으므로..
그 순수와 열정, 황홀과 허위, 배신과 기만, 쇠퇴와 소멸을 절절한 마음으로 따라가보았으므로..
쓰디 쓴 미소로 첫사랑을 기억하지만, 그 경험만큼은 가히 황홀이었다. 그렇게 나는 나 자신을 나를 몹시도 사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