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궁궐은 임금의 저택이자 집무실이었습니다. 따라서 임금의 생활반경은 궁궐 내에 한정되곤 했죠. 물론 임금이 원한다면 궁 밖에 나갈 수 있지만 궁 밖을 출입할 때에 드는 비용과 준비, 보안 등의 문제로 결코 일상적인 일은 아니었습니다. 임금에게도 가까운 곳에 마음 놓고 쉴 휴식의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조선시대 궁궐 속 후원이 만들어진 이유입니다.
특히 창덕궁의 후원은 한국의 뚜렷한 사계절의 아름다운 풍경을 담아내는 것으로 유명해서 우리나라 사람들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면 가기 어려울 뿐더러, 높은 경쟁률로 인해 예약조차 힘들다고 하니 창덕궁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는데요. 창덕궁은 실제 조선시대에도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경관과 아름다운 후원으로 인해 많은 왕들이 머무르며 사랑했던 궁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조선의 법궁이자 핵심 궁궐은 경복궁입니다. 그렇다면 법궁인 경복궁에는 왜 후원이 없는 걸까요? 실은 경복궁에도 후원이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오늘날 청와대 자리가 원래 경복궁의 후원이 있던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해방정국을 거치면서 경복궁 후원은 역사 속으로, 그리고 우리의 기억 속에서도 사라지고 말았죠.
그래서 본 글에서는 잊혀진 경복궁 후원의 광명을 찾아 떠나보려 합니다. 경복궁 후원이 만들어지고 또 사라지기까지의 역사, 그리고 오늘날 후원의 역사를 되찾기 위해 이뤄지는 논의까지 다뤄보겠습니다.
조선시대 전기에는 후원이 경복궁의 담장 내에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조선은 고려의 궁궐 전통을 이어받았는데, 이에 따르면 궁궐 후원은 기본적으로 설계에 포함되었습니다.
개경의 궁궐과 시가지 배치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행정 구획인 고려 경중 5부제는 도시구조를 중앙과 주변부로 나눴습니다. 이는 중심부에 정무 공간이 있고, 뒤편에 자연정원이 있는 궁궐의 설계 방식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에, 실제로 경복궁 궁궐 내에 후원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정원 및 자연 공간이 마련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따라서 당시 경복궁의 북문 바깥에 위치한 오늘날 청와대 지역에는 따로 후원이 없었고, 대신 공신과 공신의 적장자들이 왕에게 충성 서약을 하던 회맹단이 있었습니다. 다만 임금이 산책을 나가거나 큰 국가 행사가 있을 때마다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을 열어두었으니, 이는 궁궐 내 후원을 넘어 오늘날 청와대 지역, 그리고 이어지는 북악산까지도 큰 개념의 후원으로 활용됐음을 의미하지 않을까요?
경복궁은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 중에 전소됩니다. 약 250년간 방치되어 있다가 1868년이 되어서야 흥선대원군의 명령 하에 재건됩니다. 바로 이때 오늘날 청와대 자리에 경복궁의 후원이 조성되기 시작합니다.
경복궁이 재건되면서 이전보다 더 많은 전각이 지어졌고, 이로 인해 경복궁 내 후원의 영역이 협소해졌습니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북쪽에 궁궐 담장을 이어쌓아 경복궁 후원을 만들게 되는데, 이 북쪽의 후원이 바로 현재의 청와대 지역입니다.
당시 경복궁 후원의 모습을 살펴볼까요? 당시 경복궁 중건 배치도인 '북궐도형'과 '북궐후원도형'에 따르면 각 공간의 기능에 따라 크게 3가지 영역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수궁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휴식 공간, 서쪽에는 농경 공간, 동쪽에는 정치 공간이 위치했습니다. 참고로 현재 청와대 본관과 상춘재 사이 수궁의 터가 남아있답니다.
먼저 왕의 휴식 공간입니다. 경복궁 후원 북쪽에는 옥련정과 오운각이 마련되어 왕이 정자에 앉아 아름다운 자연을 조망하며 휴식했습니다. 경복궁 뒤에 자리잡은 북악산 자락의 물줄기를 따라 독특한 수로가 정비되기도 했습니다. 청와대 내 보물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 남쪽 암석에서 '천하제일복지'라는 각석이 확인되었는데요. 이 구역이 풍수지리적 명당이자 길지임을 나타내는 문구로, 약 삼사백년 전 새겨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 각석 주변으로 물이 흘러 넘치고, 옥련정과 오운각이 근처에 세워져 있는 모습이 그려지시나요?
다음은 농경 장려의 공간입니다. 조선시대 농업은 국가 경제의 근간이었습니다. 이에 풍년을 기원하는 재당인 경농재, 그리고 왕이 직접 농사를 지으며 모범을 보이는 농경지가 마련되었는데요. 특히 경복궁 후원에는 전국 8도의 풍흉을 살피는 의미로서 팔도배미가 조성되어 농경 국가의 왕으로서 책임을 되새기도록 했다고 전해집니다.
마지막으로 정치 공간입니다. 후원에 정치 공간이 있다는 것이 의아할 수 있지만, 실은 창덕궁 후원도 북쪽에는 임금을 위한 사적 공간을, 남쪽에는 정치적 공간을 두고 있습니다. 경복궁 후원 중건 당시 창덕궁 후원의 체제를 참고했기 때문에 경복궁 후원 역시 이러한 정치 공간을 살린 것으로 보입니다.
경복궁 후원 남쪽에는 과거시험이나 군사훈련, 연회 등 국가적 행사가 거행되는 넓은 마당을 마련하였습니다. 특히 국가의 인재를 뽑음으로써 왕의 권위를 드러내도록 과거시험장인 융문당과 무예시험장인 융무당이 건축되었습니다.
그러나 개항기,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을 거치면서 경복궁 후원은 점차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조선이 열강 국가들로부터 주권을 지키고자 마지막 불씨를 태웠던 시기인 개항기. 1895년,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시해됩니다. 황후의 시해사건으로 고종은 목숨의 위협을 느껴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하는데요. 이때부터 경복궁 후원은 왕의 휴식 공간이자 정치 공간으로서 후원의 기능을 상실한 채, 운동장 등으로 사용됩니다.
일제강점기, 경복궁 곳곳이 훼손되기 시작합니다. 1926년에는 조선총독부 청사를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 앞에 세웠습니다. 또한 경복궁의 본원과 후원을 분리하고 중간에 길을 낸 뒤, 1939년에는 일제 총독 관저를 경복궁보다 지대가 높은 경복궁 후원 위치에 세웠습니다. 이는 일제가 풍수적으로 중요한 용맥을 끊고, 과거시험장이 있던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조선의 기운과 정통성을 말살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경복궁 후원 위치에 세워졌던 관저는 후원 지역의 옛 지명이었던 경무대라 불렸고, 이때부터 경복궁 후원은 경무대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되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에서 경복궁 후원에 있던 융문당과 융무당은 용산에 일본인을 위한 사찰 용광사를 짓는데 사용되었고, 광복 후 원불교에서 두 건물을 인수해 사용하다가 2007년 영광으로 옮깁니다. 그래서 현재 융문당과 융무당은 전남 영광에 남아있습니다.
경무대는 해방 이후 미군정 사령관이었던 하지 중장의 관저로 사용되었고, 미군정이 끝난 이후에 이승만 전 대통령의 관저로 사용되었습니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하야한 후, 2대 대통령 윤보선은 일제강점기와 독재 시기의 관저라는 이미지를 씻고자 1960년 청와대로 이름을 바꿉니다.
청와대는 노태우 13대 대통령의 관저로까지 사용되다가, 1991년에 업무공간과 대통령 부부가 생활하는 공간, 대언론 창구공간으로 구성된 오늘날의 청와대로 탈바꿈하였습니다.
2022년 5월, 청와대가 국민에게 전격 개방되었습니다.
청와대가 개방되면서 그간 잊혀졌던 경복궁 후원을 살리는 일이 새로운 과제로 떠올랐습니다. 과거 청와대가 가진 특수성으로 인해 접근조차 어려웠던 권역들까지 개방되면서 역사, 건축, 고고, 조경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경복궁 후원 발굴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경복궁 후원은 중건 당시 배치도를 제외하고는 후원의 조성 방식이나 구성을 기록한 사료가 없어 많은 부분이 베일에 쌓여있었는데요. 청와대 개방 후 실시된 경복궁 후원 기초조사연구를 시작으로 역사 속 공백이 하나둘씩 메워지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경복궁 후원을 둘러싼 비밀이 밝혀질수록 우리는 새로운 난관을 마주합니다. 조선시대부터 대한민국까지 기나긴 역사를 살아오며 여러 차례 변화를 겪은 이곳. 이 독특한 이력 탓에 고민에 빠지게 되는데요. 이곳은 청와대일까요, 아니면 경복궁 후원일까요? 이곳이 가진 수많은 역사 중 어느 시기, 어떤 가치에 방점을 두어야 할지에 대해 목소리가 나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후기 고종이 조성한 경복궁 후원의 역사성이 회복되어야 할까요? 아니면 현대 정치사 산물로서의 청와대가 지켜져야 할까요? 이 논의는 청와대 권역이 사적으로 지정되어야 할지, 근대역사문화공간으로 지정되어야 할지에 대한 논의로 이어집니다.
과거 경복궁 후원의 모습이 새로 복원되어야 할까요? 아니면 현재 청와대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야 할까요? 이 논의는 문화유산을 보전하는 방법 중 복원을 선택할 것인지, 보존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요? 어떤 선택이 '올바른' 선택일까요? 어쩌면 우리가 진짜 결정해야 할 것은 '방식'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경복궁 후원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든, 중요한 건 잊지 않는 것. 결국, 잊지 않는 것만이 잊혀진 광명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요?
경복궁 후원의 이야기는 말해줍니다. 무엇이든, 누구든 역사 속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또 사람들에게 잊혀질 수 있다는 것을요. 하지만 우리가 끝내 기억해내고 더이상 잊지 않는다면 후원의 광명은 우리 곁에 언제까지나 빛날 것입니다.
혹시 다음에 청와대를 방문하게 된다면 마치 조선의 왕이 된 듯 후원을 산책해보는 건 어떠세요? 눈을 감고서, 잊고 지냈던 경복궁 후원의 이야기를 천천히 떠올려보세요. 그 순간, 어느새 후원의 잔잔한 흔적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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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정우진, 2015, <조선시대 궁궐 후원 체제와 운용 양상-후원 내 소영역의 공간구분 및 운영개념을 중심으로>, 한국조경학회 2015년도 춘계학술대회 논문집, 2015 Mar.27.
- 김기훈. (2021). “풍수 전문가 "경복궁 후원 복원하자, 청와대가 갈 곳은…"”. 조선일보. https://www.chosun.com/economy/economy_general/2021/06/23/GTSTVCABEZHVZGP5W7IR3TYDJM/
- 손장원. (2022). “[목요포럼] 청와대·경무대·경복궁 '후원'”. 인천일보. https://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143760
- 박상현, (2022). “사적이냐 근대역사공간이냐… 문화재 성격에 달린 청와대 활용법”. 연합뉴스. https://www.yna.co.kr/view/AKR20220517056900005
- 박상현. (2022). “청와대는 역사적으로 경복궁 후원…고종이 창덕궁 본떠 조성” 연합뉴스. https://www.yna.co.kr/view/AKR20220317124800005
- 국가유산청 보도자료, (2023). “청와대 권역(경복궁 후원지역)은 건축, 경관적 가치와 함께 역사의 보고” https://www.cha.go.kr/newsBbz/selectNewsBbzView.do?newsItemId=155703868§ionId=b_sec_1
- 양인억. (2023). “이곳이 경복궁 후원이었다고요? 역사로 살펴보는 청와대의 재발견!”. 내 손안에 서울. https://mediahub.seoul.go.kr/archives/2008770
- 이상주, (2023). “세종대왕은 왜 경복궁과 청와대를 구분했을까.” 세종대왕신문
https://www.sejongki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693
- 청와대, 국민 품으로. “경복궁 후원 청와대 속 문화유산”. https://www.opencheongwadae.kr/board/view?pageNum=1&rowCnt=9&menuId=MENU002030303000000&schType=0&schText=&categoryId=&continent=&country=&boardStyle=Gallery&linkId=aUqiuWVlf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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