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선조들의 발걸음을 찾아 나서다

한국의 전통신 이야기

by YECCO

우리의 발은 오랜 시간 다양한 환경에 적응해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신발은 단순히 발을 보호하는 것을 넘어, 생활의 편리함과 변덕스러운 기후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특별한 도구로 진화했죠. 또한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 신발은 권력을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이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신발에 담긴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삶의 이야기,

그리고 신분에 따라 다채롭게 변화한 한국 전통 신발의 세계를 함께 알아볼까요?




기후가 빚어낸 한국의 전통 신발


나막신

KakaoTalk_Photo_2025-06-08-15-32-17.jpeg
완당선생.jpg
나막신 ©국립민속박물관 / 완당선생해천일립상 ©아모레퍼시픽미술관

나막신은 통나무로 만든 굽이 높은 신발로, 남녀노소 모두가 비나 눈이 오는 날에 신었습니다. 다만 무겁고 활동성이 떨어져서 먼 길을 가거나 말을 탈 때는 신지 않았습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의하면, 나막신을 신고 소리 내어 지나가는 것은 오만하며, 천인이나 젊은이는 양반이나 어른 앞에서는 감히 착용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조선 말기의 나막신은 욕심이 없는 청빈한 선비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짚신을 신기에는 신분이 높고 가죽신을 신기에는 형편이 어려워서 맑은 날에도 나막신을 신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특히 서울 남산골에는 가난한 선비가 많이 살아서 그들을 ‘남산골 딸깍발이’라고 불렀습니다. 나막신은 1910년 이후 고무신의 등장으로 차츰 쇠퇴하다, 1940년대를 전후로 거의 사라졌습니다.



멱신과 설피

멱신과 설피는 눈이 많이 내린 날 이동의 편리함을 위해 신었습니다.

멱신.jpg
설피.jpg
멱신 ©국립민속박물관 / 설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멱신은 ‘둥구미’라는 바구니처럼 울이 깊은 것이 특징이며, 겹이 두터워 뛰어난 보온 효과를 가졌습니다.


설피는 잘 휘는 특징을 가진 물푸레 또는 노간주나무로 만들어졌으며,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시베리아, 북미 선주민들도 사용했고 형태는 다르지만 서양의 아이젠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신분을 드러내는 한국의 전통 신발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 신발은 권력을 표시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석(舃)

먼저, 석(舃)은 왕과 왕비가 공식행사에 착용하는 의복에 맞춰 제작된 신발입니다.

KakaoTalk_Photo_2025-06-08-15-28-27.png
영친왕비.jpg
순정효황후 청석 ©국가유산청 / 영친왕비 청석 (오) ©국립고궁박물관

고려시대 종이 관복 제도를 도입한 이후 조선시대 말까지 신었으며, 옷이나 시대에 따라 색깔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고려시대 정종부터 의종 때까지는 붉은색의 ‘적석’을 신었고, 조선시대 세종대왕은 검은색의 ‘흑석’을 신었습니다.


특히 푸른색의 ‘청석’은 대한제국의 황후와 황태자비가 국가의 큰 제례나 혼례 때 착용하는 신발로 알려졌습니다. 대표적으로 순정효황후와 영친왕비의 ‘청석’은 오늘날에도 남아 있습니다.



화(靴)

다음으로는 화(靴)가 있습니다.

영친왕.jpg
풍속화(C)국립중앙박물관.jpg
영친왕 목화 ©국립고궁박물관 / 풍속화 ©국립중앙박물관

화는 원래 북방의 기마유목민족이 말을 탈 때 벗겨지지 않고 활동하기 편하게 신목을 길게 만든 신발입니다. 이외에도 주변 민족들에게 보급되면서 관복에 갖춰 신는 의례용 신발로 알려졌습니다.


재료와 색깔에 따라 흑피화, 백피화 등으로 구분되고, 전피화는 무두질한 양가죽으로 만든 화로 추정되며,

부드럽고 가벼운 재질이기 때문에 봄과 여름에 착용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1793년(정조 17)에는 사치를 방지하기 위해 백화 제작이 금지되었는데,

이를 통해 당시 멋을 내는 양반들이 백화 또는 백피화를 신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혜(鞋)

세 번째는 혜(鞋)가 있습니다.

KakaoTalk_Photo_2025-06-08-15-28-13.jpeg
안양예술공원.jpg
발목 낮은 혜 ©국립대구박물관 / 두 켤레의 혜 ©김민지

혜(鞋)는 조선시대 양반층의 남녀노소 착용하던 신발입니다. 착용자의 성별과 신분 계층 그리고 용도에 따라 다양한 종류로 세분되었으며, 문헌 기록에는 태사혜와 당혜 등 다양한 명칭의 혜가 있습니다.


조선시대 사대부의 편복에 신었던 태사혜는 조선 중기부터 양반층에 크게 유행했습니다. 특히 태사혜는 신는 사람의 연령에 따라 배색을 달리했습니다. 예를 들어 성인용으로는 검은색 울에 자주색 눈, 노인용은 흰색 울에 흰 눈을 장식했습니다.


당혜는 조선 특유의 형태미를 나타내며 뒤축으로 이어지는 날렵한 곡선의 아름다움이 특징입니다. 주로 조선시대 양반가 부녀자들이 신었고, 오늘날에는 영천왕비의 당혜 두 벌이 남아있습니다.



짚신과 미투리

짚신은 추수 이후 남은 볏짚을 엮어서 만든 서민들의 신발로, 산업화 이전에는 자급자족으로 제작했습니다.

짚신삼기.jpg
전통건물(C)짚신.jpg
짚신삼기 ©한국데이터베이스산업진흥원 / ©아사달

그렇지만, 지게 가득 짚신을 짊어지고 다니는 보부상이나 짚신을 펼쳐 놓고 판매하는 가게도 있었습니다. 짚은 튼튼하지 않은 재료이기에 자주 교체해야 하는 단점이 있습니다. 짚신을 삼는 도구로는 대량 생산을 위한 짚신틀이나 짚신 형태를 만들기 위해 끼우는 신골이 있습니다.


미투리는 짚신과 유사하지만 거친 짚 대신 왕골이나 삼실, 종이노끈 등을 사용하여 색이 깨끗하고 매끈한 형태가 특징입니다. 다만 재료가 부드럽고 약하기 때문에 선비들이 아껴 두었다가 날씨가 좋은 날 혹은 나들이할 때만 신었다고 합니다.


<성호사설유선>에 의하면 종이 미투리나 꽃장식 미투리는 조선시대 상류계급이나 부자들이 착용했다고 합니다.



고무신, 우리 민족혼이 피어난 신발


고무신

부산.png
대구.png
1952년 부산 시장의 신발가게 ©한국저작권위원회 / 1957년 대구 서문시장의 신발가게 ©한국저작권위원회

고무신은 버선과 양말 모두 신을 수 있는 신발입니다. 소재가 질기고 물이 새지 않아 실용성이 뛰어나며 도시 빈민이나 농민이 주로 애용했습니다. 특히 흰색 고무신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조선인 중에서도 최초로 고무신을 신은 사람이 존재하는데요, 이는 창덕궁에 유배된 순종으로, 흰색 고무신을 즐겨 신었다고 합니다. 특히 1920~1930년대 백의 착용이 금지되면서 흰색에 투영하는 민족의식이 뚜렷해지자 흰색 고무신은 우리 민족의 고유성을 대변하게 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png 일제강점기 신발 전단 ©국립민속박물관


우리가 신고 있는 신발 한 켤레에도 수많은 기술과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맞는 신발을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스포츠 선수는 더욱 탄탄한 운동화를 고를 것이고, 특수 작업자는 완벽하게 신뢰할 수 있는 안전화를 착용할 것입니다.


그렇게 새로운 기능과 디자인을 추구하는 열정은 신발의 무한한 가능성을 만들어냅니다. 우리는 신발의 전문화와 만들어지는 다양한 변화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문득 당신의 신발에는 어떤 추억이 담겨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당신에게 특별한 신발이 있다면, 그 특별함은 정확히 무엇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그리고 오늘날은 어디서든 신발을 쉽게 구할 수 있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왜 신발을 고를 때 신중해지는 것일까요?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며 우리 발과 함께한 신발, 그 속에 담긴 인류의 지혜와 삶의 발자취는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의미로써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당신의 신발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나요?

.

YECCO 콘텐츠팀 한희서



[참고]

한국민족대백과사전

keyword
작가의 이전글경복궁 후원의 잊혀진 광명을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