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지켜낸 선조들의 지혜
부쩍 더워진 요즘, 얼음을 가득 띄운 시원한 음식이 떠오르곤 합니다.
쉽게 얼음을 구할 수 있는 오늘날과는 달리, 과거에는 얼음이 매우 귀한 자원이었는데요.
조선시대, 우리 선조들은 국가가 직접 운영하던 얼음 창고 빙고(氷庫)에 얼음을 저장하고 나누어 주었습니다.
얼음을 여름에 나눠 주는 일은 조선에서 국가의 중요한 복지 정책이었습니다.
이 전통은 삼국시대부터 이어졌으며, 조선은 이를 더욱 체계적으로 운영했죠.
나라에서는 예조 소속으로 빙고를 설치해 운영했으며, 용도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누었습니다.
동빙고: 국가 제사에 쓰일 가장 질 좋은 얼음을 보관
서빙고: 고위 관료에게 하사할 얼음을 저장
내빙고(2곳): 왕실에서 사용하는 얼음을 보관
이렇게 조선은 한여름의 더위를 견디기 위한 국가적인 냉장 시스템을 만들어냈습니다.
겨울 한강 위에서 얼음을 쪼개던 사람들을 채빙공(採氷公)이라 불렸습니다.
그들이 잘라낸 두께 20cm의 얼음은 ‘좋은 얼음’으로 여겨졌으며,
얼음 한 덩이는 ‘정(丁)’이라 불렸고, 무게는 20kg에 달했습니다.
귀한 얼음인 만큼 옮기는 일도 아무나 할 수 없었습니다.
운빙역(運氷役)이라는 전문 인력이 동빙고, 서빙고, 내빙고로 얼음을 날랐죠.
빙고에 도착한 얼음은 숙련된 저장공이 정해진 방식에 따라 차곡차곡 쌓아 올렸습니다.
얼음은 단지 더위를 식히는 덩어리가 아니었습니다.
국가의 통치력과 권위를 상징하는 물자였고,
그 뒤에는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노동이 숨어 있었습니다.
조선의 겨울이 따뜻하면, 얼음이 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늘에 기도를 통해 간절한 마음을 드러냈죠.
이러한 제사를 사한제(司獻祭)라 했습니다.
‘기한제(祈寒祭)’ 또는 ‘동빙제(凍氷祭)’라고도 불렸으며
한강의 수신(水神)인 ‘현명’에게 지내는 제사였습니다.
『국조오례의』와 『춘관통고』에 따르면, 이 제사는 단순한 기원이 아닌
정식 국가 의례로서 철저히 준비되었습니다.
제사를 준비하기 위해,
먼저 제관은 3일간 마음과 몸을 맑게 하는 재계(齋戒)와,
제사 전날 제물과 제기를 꼼꼼히 점검하는 성생기(省牲器)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제사 당일엔 초헌 – 아헌 – 종헌의 순서로 잔을 올리고,
음복(飮福)과 철변두(徹籩豆)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이 모든 절차는 동빙고나 서빙고 앞마당에서 거행되었죠.
이렇듯, 얼음은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국가와 백성이 함께 정성을 들이던 의례적 자원이었습니다.
궁궐에 있던 내빙고가 양화진으로 이전하면서 얼음 저장 방식에도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이전엔 백성들을 동원해 직접 얼음을 채취했지만, 이제는 민간에서 얼음을 사서 저장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죠.
이 제도를 무빙제(貿氷制)라 합니다.
이를 계기로 빙계공인(氷契貢人), 민간 장빙업자 등이 등장하며
동빙고와 서빙고 역시, 이 방식으로 얼음을 들여오기 시작합니다.
빙고의 소속도 달라집니다.
예조 소속이었던 빙고는 1894년 갑오개혁기, 궁내부 산하의 사옹원(司饔院)으로 이관됩니다.
그 이후 정확히 언제 폐지되었는지는 기록이 불분명하지만,
조선 후기, 얼음은 점차 국가 복지의 상징에서 민간 거래의 상품으로 변화해 갔습니다.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빙고는 대부분 목재 구조로, 여름까지 얼음을 보관하는 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고자 조선 후기에는 돌로 만든 석빙고가 등장합니다.
석빙고는 주로 지방 관청과 민간에서 사용되었으며, 내구성이 뛰어나
오늘날까지 그 형태가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경주 석빙고를 비롯해 안동, 창녕, 청도, 현풍, 영산 등
총 여섯 곳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요,
무더운 여름, 이 유산들을 따라 걸으며 조선의 여름을 지켜낸 지혜를 떠올려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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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CCO 콘텐츠팀 권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