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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지 못했던 광복의 순간들

by YECCO

오늘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 지 8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빛날 광, 되찾을 복, 빛을 되찾은 날인 광복.


그 시기, 한반도는 나라를 되찾은 기쁨에 태극기 물결과 환호로 가득 찼었습니다.


하지만, 나라가 주권을 되찾았던 날은 누군가의 장례식이 예정되어 있었고, 모두가 해방의 기쁨을 누릴 때 혹독한 추위 속에서 고강도의 노동을 강요받던 사람들도 있었으며, 고국으로 끝내 돌아오지 못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광복, 그날과 그 이후엔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숨어 있습니다. 지금부터, 80년 전 그날의 또 다른 모습을, 우리가 알지 못했던 광복의 순간을 만나보겠습니다.




조선 왕자의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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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왕자 ©


1945년 8월 15일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히로시마에서 일본군으로 복무 중 핵폭탄에 의한 피폭으로 목숨을 잃은 이우 왕자의 장례식이 치러진 날이기도 했습니다.


훤칠하신 외모로 많이 알려져 있는 이우 왕자는 고종의 아들인 의친왕의 차남으로서, 고종의 손자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되게 영민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영민하신지 벌써 일본어도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의 반 정도는 아시고 창가도 매우 잘하신다. 재주와 위엄, 풍채 모두 나무랄 수 없는 훌륭한 귀공자이시다. 기운차고 침착하시며 영리하시고 남에게는 결코 지지 아니하시려 하는 굳센 성미이시지만 어린 아이들을 매우 잘 돌보아주신다.”

- 경성유치원의 보모 교구치 사다코


하지만 한일 강제병합 이후 제정 및 공포되었던 일본 황실의 법에 따르면, 왕·왕세자·왕세손·공은 만 18세가 되면 육군이나 해군 무관으로 임관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기에 이우왕자께서는 1929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일본에서 군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항일정신과 한국의 독립을 위한 마음가짐은 굳건했다고 합니다.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고 항상 마음속으로 새기고 있었기 때문에 이우는 일본인에게 결코 뒤지거나 양보하는 일 없이 무엇이든지 앞서려고 노력했다. 또한 이우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화나면 조선어를 사용했다. 글자 쓰기도 능숙했고 노래도 잘 불렀는데 일본 노래도 했고 조선 노래도 불렀다. 싸우면 바로 조선어를 쓰니까 종잡을 수가 없었다.”

- 육군사관학교 동기 일본황족 아사카 다케히코


또한, 그는 암암리에 교육사업과 항일독립투쟁도 지원하며 고국의 독립을 돕고자 하였습니다. 1938년경에 여성운동가이자 교육자인 황신덕이 교육사업을 위한 이우왕자의 소유 부동산의 하사를 요청했을 때, 왕자는 이를 흔쾌히 승낙했고, 1940년 그녀는 이곳에 경성가정여숙(현 중앙여자고등학교-추계예술대학)을 설립해 교육사업을 진행했습니다.


1942년 중국 산서성 태원으로 전출되었을 때, 거의 3년 동안 항일독립투쟁을 준비하였고, 인근 주둔 독립군 및 일본군 내 한국병사와 연합하여 일본 관동군을 토벌할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이를 눈치채 그를 교육참모로 보직을 바꿔 히로시마로 발령했습니다.


1945년 태평양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진 일본군은 이우에게 본토 결전을 위해 일본으로 전출을 명합니다. 그는 일본의 패전을 예감하며 전역 신청도 하고 조선에 머물고자 했지만 모두 거절되었고, 결국 일본 히로시마로 전출을 가게 됩니다.


하지만, 모두가 아는 것처럼 1945년 8월 6일 미국이 일본의 항복을 받고자 원자폭탄 리틀보이를 히로시마에 투하했습니다. 당시 이우 왕자는 엉덩이에 부스럼이 난 일본인 수행 무관에게는 자동차로 출근하게 했고, 본인은 말을 타고 출근하다가 그대로 원자폭탄에 피폭되었습니다. 얼굴에서 가슴까지 피부가 문드러질 정도로 화상을 입어 그날 밤 해군병원으로 후송되었지만, 8월 7일 새벽 고열로 신음하시다 훙서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장례식은 고국에 해방이 찾아온 1945년 8월 15일 오후 1시에 조선육군사령부의 주관으로 경성운동장에서 치러졌습니다. 원래 장례식은 12시에 예정되었으나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으로 1시간 늦춰진 것입니다. 또한, 경성운동장은 1925년 일본 황태자인 히로히토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어진 상징적 공간이라고 합니다.


즉, 장례식은 일본 천황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공간에서 역설적으로 일본 천황이 항복 방송을 하는 비슷한 시간에 이뤄진 것입니다.


그가 일본군으로 강제복무를 하면서도 굳건히 지켰던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가 실현된 것이 아닐까요?



하루 늦게 실감한 광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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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왕 히로히토, 1945년 8월 16일에 촬영된 만세 행렬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일왕의 항복 방송 내용에는 일본 왕실에서나 사용할 법한 굉장히 어려운 용어들이 많이 있었을뿐더러, 녹음의 질 자체가 굉장히 안 좋았습니다. 일본 측에서 항복 방송을 해설하는 방송을 준비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에 광복을 맞이한 8월 15일이 아닌 하루가 지난 8월 16일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억울하게 수감된 조선인들이 석방되어서야 진정으로 광복이 찾아온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광복 당일에 찍은 것으로 알고 있던 해당 사진도 실은 하루가 지난 16일에 촬영된 사진입니다.


아래는 일왕 히로히토의 항복 방송 내용입니다.

짐(朕)은 깊이 세계의 대세와 일본제국의 현실을 생각하여 비상조치로써 이 사태를 수습하고자 이에 충성스럽고 선량한 너희 신하와 백성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국, 영국, 중국, 소련 4개국에 대하여 그 공동선언을 수락할 뜻을 통보하게 하였다.

무릇 제국 신하와 백성의 안녕을 꾀하고 세상과 번영의 즐거움을 함께 하는 것은 황실 역대조상의 남겨진 규범으로서 짐은 이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고, 앞서 미국과 영국 두 나라에 대하여 선전 포고한 이유도 실은 일본제국의 자존과 동아시아의 안정을 이룩하기 위하여 나온 것으로, 타국의 주권을 배제하고 영토를 침탈하려는 것은 애초부터 짐의 뜻이 아니었다. 그런데 교전을 치른 지난 4년을 살펴보니, 짐의 육해군 장병들의 용감한 싸움, 짐의 관료들의 성실함과, 짐의 일억 백성의 봉사 등 각각 최선을 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국면은 마침내 호전되지 않았다. 세계의 대세 또한 우리에게 이롭지 않고 게다가 적은 새로이 잔학한 폭탄을 사용하여 빈번히 무고한 사람들을 살상하는 참해를 벌이는 등 진실로 예측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전쟁을 계속한다는 것은 마침내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인류 문명을 파괴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짐이 어떻게 우리 수많은 백성들을 보전하며 황실 역대 조상에게 용서를 드릴 수 있겠는가. 이것이 짐이 제국 정부로 하여금 공동선언에 응하도록 하게 됨에 이른 까닭이다.

짐은 제국과 함께 시종일관 동아시아의 해방에 협력한 여러 동맹국들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제국의 신하와 백성으로서 전선에서 전사하고, 맡은 바를 하다 순직하고, 비명에 죽어간 자와 그 유족에 생각이 미치면 오장이 찢어지는 듯하다. 또한 전투로 상처를 입고, 재화를 당해 가업을 잃어버린 자들의 후생을 생각한다면 깊은 걱정이 되는 바이다. 생각하건대, 이제부터 제국이 받아야 할 고난은 진실로 심상치가 않다. 너희 신하와 백성의 충정은 짐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짐은 시운이 움직이는 대로 우리가 감당해야 할 곤란을 감당해내고, 참아야 할 곤란을 참음으로써 만대를 위한 태평시대를 열고자 한다.

짐은 이에 국체(國體)를 수호하여, 충성스럽고 선량한 너희 신하와 백성의 진실된 정성에 기대어 항상 너희 신하와 백성과 함께 보낼 것이다. 혹여 누군가가 감정에 북받쳐 함부로 사단(事端)을 일으킨다거나 혹은 동포를 배제하거나 서로 시국을 어지럽혀 대도(大道)를 그르치는 것과 같이 신의를 잃게 됨을 짐은 무엇보다도 경계하는 바이다. 부디 국가를 한 가족으로 하여 자손에 잘 전하라. 신주(神州)가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우리 임무가 매우 무겁고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유념해 달라. 모든 힘을 장래 건설에 기울이고, 도의를 두텁게 하고 지조를 굳게 다져 국가체제의 정화를 뿜어내어 세계의 추세에 뒤지지 않도록 기해야 한다.

너희 신민은 능히 짐의 뜻을 몸에 익혀야 할 것이다.

©우리역사넷



어수룩하지만 진심이 담긴 태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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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당시 거리와 데니태극기 ©우리역사넷, 국립중앙박물관

일제강점기 후기 민족말살정책으로 태극기를 보는 것이 매우 제한되어, 광복 이후의 만세 행렬에서 사람들이 직접 만들어 흔들고 다녔던 태극기에는 괘가 없거나 서투르게 그려진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또한, 당시에 많은 사람이 일장기에 페인트를 칠해 태극기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전에는 태극기라는 게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죠.
- 박문재, 당시 치안대원

태극기는 못 봤지요. 우리들은 못 봤지요.
- 김영대, 당시 학생

일본 사람이 그런 거 태극기를 가르쳐주나? 안 가르쳐주거든.
- 이영수, 당시 농민

일본의 일장기를 페인트로 파랗게 반만 칠하고, 괘는 그리지도 못하고...
- 이순복, 당시 기관사

옛날 부채를 꺼내와요, 부채에 태극마크가 있으니까. 그걸 가지고 엉터리로 그렸지.
- 손진, 당시 일본 유학생

©KBS다큐 ‘[8.15의 기억 1부] 전세계 40인의 생생한 증언을 토대로 입체적으로 재구성한 1945년 8월 15일 그날의 기억 | 광복 60년 특별기획 (KBS 050809 방송)’



광복 이후에도 이어진 일제의 억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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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의 일장기와 성조기 ©국사편찬위원회


광복 이후에도 1945년 9월 8일 미군이 인천항으로 들어와 미군정이 시작되기 전까지 일본군은 조선에 거주중인 일본인과 일본군의 무사귀환을 위해 조선을 억압하였습니다.


광복 직후, 조선총독부는 한반도 내에서의 혼란이 가중되고, 이에 따른 조선인들의 보복을 막기 위한 대응책을 마련하고자 일본 정부에 여러 차례 연락을 취하지만 패전을 앞두고 극도로 혼란스러운 정부는 아무런 응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조선인으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고 있으며, 이 혼란스러운 당국에서 이들의 분노를 통제해줄 독립운동가를 찾게 되고, 그렇게 조선총독부에서 접촉한 독립운동가는 몽양 여운형이었습니다.


8월 15일 오전 8시, 조선총독부 2인자였던 엔도 정무총감은 여운형을 만나 조선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과 일본군이 무사히 빠져나갈 때까지 치안협조를 해달라는 부탁을 하게 됩니다. 여운형도 혼란스러운 정국 속 유혈 사태는 막고자 제안을 받아들였으나, 조건 5가지를 요구했습니다.

1. 정치범과 경제범을 즉시 석방할 것.
2. 3개월간 식량을 보장할 것.
3. 치안 유지와 건국을 위한 정치활동에 절대 간섭하지 말 것.
4. 청년과 학생을 조직 훈련하는데 간섭하지 말 것.
5. 근로자와 농민을 건국 사업에 동원하는데 간섭하지 말 것.


엔도 정무총감은 이를 승낙했고, 광복과 함께 자유가 찾아오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합의는 조선 식민지배의 다른 한 축이었던 일본군과 상의되지 않았던 것이었고, 일본군은 조선인들과 합의가 아닌 조선인들을 억압해 무사 귀환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완전무장한 일본 헌병을 동원하여 다시 언론기관을 포함한 경성 곳곳을 점거했고, 종로 일대에는 기관총까지 설치되었습니다. 광복 직후 2,600여 명이었던 일제 헌병은 한 달여 만에 16,000명까지 증원되게 됩니다.


“방송국은 지금부터 일본군이 접수한다. 점령한 곳의 주민은 포로나 마찬가지 처분을 받는 게 통상적이다.”
- 당시 경성 방송국에서의 일본군


그렇게 광복 이후에도 일본군에 의해 억압받았던 조선인들은 미군이 한반도에 들어온 9월 이후가 되어서야 진정한 자유를 되찾게 됩니다.



일본군 포로생활을 해야 했던 조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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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의 포로가 된 일본군에는 강제징병된 조선인들도 많았는데, 많은 이들이 말이 통하지 않아 조선인임을 밝히지 못해 몇 년간의 포로생활을 하고 귀국했다고 합니다.


조선인 억류자들의 총수는 통계마다 차이가 있지만, 소련 내무부 군사포로 역류총국 보고에는 1만 206명이며, 억류 문제 전문가인 갈리츠키 러시아 해군대령이 <군사역사 잡지> 90년 9월 호에 발표한 통계에는 7,785명으로 나오는 만큼 수천 명의 조선인 포로가 있었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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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생존자들은 1991년 ‘시베리아 삭풍회’라는 모임을 결성해 일본정부에 정신적·육체적 피해 보상과 사과를 요구했으나 모두 거절당했습니다. 일본은 시베리아 포로 출신 일본군에게는 위로금을 지급했지만, 한국을 포함한 외국인에 대한 지급은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현재 삭풍회 회원들 대부분은 고령으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일제에 의해 강제징병되어 전선에서 생사를 넘나들다, 소련군 포로가 되어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돌아온 고국에서는 소련에서 왔다는 이유로 감시, 통제, 침묵을 강요받았던 삭풍회 회원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합니다.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강제 동원 피해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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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수천 명의 일제에 의해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을 실어 조선으로 출발한 우키시마호가 일본 연안에서 폭발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1945년 8월 22일 일제에 의해 강제 동원되었던 조선인들을 실어 오미나토 항을 출발한 우키시마호는 일본 연안에서 폭발해 바닷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생존자의 증언을 따르면 승선 정원이 4천 명인 우키시마호에 최소 정원의 2배 이상이 탔다고 합니다.


폭발 이유에 대해 일본 정부는 이에 대해서 미국이 설치한 기뢰 때문이라고 주장했지만, 일본 군부가 설치한 폭탄이 터져 수송선 침몰했다는 자폭설이 더 큰 신빙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양된 우키시마호의 폭발 지점 구멍이 선체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뚫려있는데, 이는 폭발이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발생한 것을 의미합니다.


즉, 외부에서의 기뢰의 폭발이 아닌 내부에서의 폭발이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우키시마호가 오미나토 항을 출발할 무렵, 일본 해군 병사들이 갑판 위에 모여 있었는데 그때 해군 중위 한 사람이 갑자기 “일본군이 배 안에 폭탄을 설치했다!”라고 소리치며 바다로 뛰어내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일제는 왜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을 죽이고자 했던 것일까요? 강제징용된 많은 조선인이 비밀 군사시설 건설에 동원되거나 기밀 정보를 접했을 수 있기 때문에, 기밀이 유출되는 것을 막고자 이러한 만행을 저지른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온 광복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지 않나요?


광복은 하루아침에 완전한 자유를 안겨주지 않았습니다. 기쁨과 함께 억압, 상실, 그리고 잊힌 이야기가 공존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역시 광복의 역사이며, 우리가 그 다양한 장면을 깨닫고 기억할 때 비로소 광복의 역사는 온전히 빛날 수 있습니다.


올해는 광복 80주년입니다.


이번 카드뉴스와 브런치 글이 여러분께 광복의 순간을 더 다양한 이야기와 함께 새롭게 느끼는 계기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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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대한황실문화원 공식홈페이지

신현배, 한국인 징용자들을 희생시킨 우키시마호 침몰 사건, 독립기념관, https://www.i815.or.kr/upload/kr/magazine/magazine/13/post-131.html

김형우. (2021.01.02.). [특파원 시선]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들…'삭풍회'를 아시나요, https://www.yna.co.kr/view/AKR20201228141100096

KBS 다큐. (2005.08.09). [8.15의 기억 1부] 전세계 40인의 생생한 증언을 토대로 입체적으로 재구성한 1945년 8월 15일 그날의 기억 | 광복 60년 특별기획 (KBS 050809 방송), https://www.youtube.com/watch?v=XLmCEZrLXks&t=2002s

디글 :Diggle. (2023.08.30). [#벌거벗은한국사] (100분) 광복에도 환호할 수 없었던 이유?? 미처 몰랐던 광복 이후의 시간들. https://www.youtube.com/watch?v=DGi54rLnjWM&t=3079s

김효순, (2008.08.15.). 강제징병 포로들 영하 40도 배 곯은채 중노동에 내몰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0449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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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CCO 콘텐츠팀 이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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