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대중교통수단은 버스와 지하철이 대표적입니다. 과거, 버스와 지하철이 교통수단으로 자리 잡기 전에는 어떤 교통수단이 활용되었을까요?
전차는 1899년부터 1968년까지 서울의 중심지를 이으며 운행되었습니다. 전차가 발전해온 과정을 들여다보면, 대한제국의 근대화 정책부터 일제강점기의 아픔까지 우리나라의 역사가 함께 보입니다.
전차시대의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 살펴보며 70년간 서울을 달렸던 전차, 그 속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알아봅시다.
고종은 1870년 후반-1880년 초에 과학기술 정보를 얻고, 근대화 정책 추진에 도움을 받기 위해 미국, 일본, 중국으로 사절단을 여러 차례 보냅니다. 특히 1883년 미국으로 향했던 보빙사를 통해 전등과 전차 사업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지요. 결국 1887년, 경복궁 건청궁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전깃불을 밝혔습니다.
점등식 이후 대한제국의 전력 사업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사업을 주관하고 운영할 한성전기회사가 설립됩니다. 한성전기회사는 고종의 출자로 설립된 민간회사로, 사실상 황실회사로 인식됩니다. 미국의 콜브란-보스트윅 상사가 공사를 수주받으며 실질적으로 기술 및 경영을 책임졌다고 하지요. 한성전기회사는 현재 한국전력공사의 모태가 됩니다.
한성전기회사는 출범 이후 곧바로 전차 사업에 돌입합니다.
사실 고종은 1891년 주한미국공사관 서기관인 알렌을 통해 전차를 도입하려고 했지만, 중국의 간섭으로 실패합니다. 1896년 한성부 도시 개조 사업으로 황도를 조성하며 전차 선로의 기반을 다지고, 한성전기회사의 설립으로 안정적인 전기 공급의 기반을 만듭니다.
전차의 초기 노선은 서대문과 청량리를 잇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홍릉으로 자주 행차했던 고종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지요. 홍릉은 명성황후의 묘소로, 현재는 남양주에 고종과 명성황후의 능이 합장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청량리에 홍릉이 위치했습니다. 궁에서 홍릉까지 행차하는 데는 약 10만 원이 들었는데, 이는 당시 쌀 만 가마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습니다. 행차에 드는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서대문과 청량리를 이은 것입니다.
1899년 개통식, 청량리 노선 개통 이후 전차는 큰 주목을 받으며 노선을 확장하게 됩니다. 도성 내의 최대 상업지인 종로, 칠패, 이현을 지나는 노선뿐만 아니라, 당시 상공업이 새롭게 부흥하던 용산까지 이어지는 노선을 신설합니다.
용산선이 운행되며 전환국, 정미소, 평식원 등 관련 근대 기관이 용산으로 이전 및 설치되고, 민간 공장이 들어서며 용산은 빠르게 공업지대로서 발전하게 됩니다.
1900년, 남대문-서대문 순환 노선이 개통됩니다. 당시 경인철도의 완전 개통과 경부철도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경부철도는 남대문, 경인철도는 서대문이 출발역이었습니다. 철도 노선과 전차 노선을 잇기 위해 철도역과 전차 종점을 맞춘 것이었습니다.
이후 이 순환 노선은 이용객 저조로 폐지되었고, 노선의 종점이자 경부철도의 출발역인 남대문 정거장은 훗날 경성역이 됩니다.
1904년, 채무 분규, 국내 권력 투쟁, 전차 여론 악화 등으로 한성전기회사는 한미전기회사가 됩니다. 국내에서는 황실 측근 세력과 친미개화파가 대립하였고, 채무상환이 이루어지지 않아 콜브란 측과의 채무 분규가 장기화됩니다. 또한, 1903년 한 소년이 전차 사고로 사망하자 국내 여론도 악화됩니다. 개통 직후 있었던 전차 사고, 상여와 닮은 생김새로 오명을 썼다가 대중교통으로서 인식되기 시작한 전차가, 다시금 부정적인 시선을 받게 된 것이지요. 결국 콜브란 측과 계약을 맺어 한성전기회사의 모든 권리와 자산을 한미전기회사로 인계하게 됩니다.
이후 일본의 일한와사회사가 한미전기회사를 압박하며 한미전기회사 인수에 성공했고, 이에 따라 서울의 전기, 전차, 가스 사업 독점 기반을 만들어 나갑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며 전차는 철저히 일본인의 필요에 따라 운행됩니다. 이에 따라 전차 도로 건설을 명분으로 월대, 성벽, 성문 등 많은 역사적 건축물이 파괴됩니다. 1907년, 황태자 방문 시 전차 도로 건설을 명분으로 숭례문 성벽이 헐립니다. 1911년 흥인지문, 1912년 왕십리선 개통으로 광화문 성벽이 철거되며 1914년 소의문, 1915년 돈의문이 철거됩니다. 1923년 조선부업품공진회를 위해 경복궁 서십자각을 없애고, 광화문 월대를 해체했습니다. 이후 전차의 진동으로 영추문은 붕괴됩니다.
한편, 일제강점기 일제의 도시계획에 따라 전차 노선이 대폭 확장됩니다. 일본인들이 다수 거주했던 남촌을 시작으로, 뚝섬으로 가는 전차까지 개통됩니다. 이 시기에 서울 외에도 부산, 평양 내의 전차 노선이 생기기도 합니다. 전차가 본격적으로 대중교통수단으로 자리잡은 것이지요.
해방 이후 서울 인구는 급격히 증가하였고, 대중교통수단에 대한 수요가 크게 올라갔습니다. 1930년대부터 이어진 만원 전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시는 선로 공사가 필요하지 않은 버스를 활용했지요. 버스 이용이 늘어남에 따라 전차 수요는 감소하였고 결국 1968년, 전차시대는 막을 내렸습니다.
현재 서울역사박물관 앞에는 전차 381호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1930년부터 1968년까지 운행되었던 것으로, 서울에 남아있는 두 대의 노면전차 중 하나입니다.
이처럼 전차는 근대화의 상징물로서,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에 따라 시작과 끝을 가졌습니다.
내년 하반기 서울에서는 위례선 트램이 개통될 예정입니다. 1968년 마지막으로 운행된 지 58년 만에 전차가 다시 달리게 된 것입니다.
트램이 개통되기 전, 70년간 전차가 다녔던 길들을 따라 걸으며 전차가 달렸던 그때의 서울을 떠올려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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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CCO 콘텐츠팀 차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