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 특별기획 | 제579돌 한글날을 맞이하여
2025년 10월 9일, 한글날.
한글 창제 및 반포를 기념하고, 그 우수성을 기리기 위한 날입니다.
훈민정음이 지금, 당신에게, 한글이라는 소중한 문자가 되기까지 많은 수난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 험난함 속에서 민족의 뿌리를 지켜낸 것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연하게 사용해왔던 한글이, 사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손길을 타고 온전히 이어져 왔음을 알고 계셨나요?
579번째 한글날을 맞이하여, 한글이 당신 곁에 머물기까지 얼마나 많은 손길이 보태어졌는지 헤아려 보세요.
1443년, 세종은 발음 구조와 천지자연의 원리를 기반으로 쉬운 글자 체계인 훈민정음을 완성합니다.
훈민정음의 제자 원리
◦ 자음의 기본자 5개 ‘ㄱ, ㄴ, ㅁ, ㅅ, ㅇ’은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음.
나머지 자음 글자는 기본자에 획을 더하여 만듦.
◦ 모음의 기본자 3개 ‘ㆍ, ㅡ, ㅣ’는 각각 하늘, 땅, 사람의 모습을 본뜬 것.
나머지 모음 글자는 기본자를 합하여 만듦.
그리고 3년 후,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이 이 새로운 문자를 잘 익힐 수 있도록 창제 원리와 용법을 자세하게 풀어 적은 해설서, 『훈민정음 해례본』을 발표합니다.
광화문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을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있나요? 왼손 위에 펼쳐져 있는 책이 바로 우리나라 국보 제70호 『훈민정음 해례본』입니다. 다섯 개의 해설(글자를 만든 원리에 대한 해설;제자해, 초성·중성·종성에 대한 해설;초성해·중성해·종성해, 초·중·성 세 글자를 합쳐 쓰는 방법에 대한 해설;합자해)과 하나의 예시(훈민정음 글자의 사용 예를 정리한 것;용자례)로 구성된 이 책은, 현재 문자 창제에 대한 유일한 기록으로 1997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동상에서 펼쳐져 있는 쪽은 용자례의 첫 부분입니다. 상단 우측 사진에 보이는 쪽이지요.
1446년 훈민정음이 반포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널리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한자를 사용하던 사대부 계층은 한자 사용을 고집하였습니다. 때문에 한글은 공식적인 문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언문이라는 명칭으로 낮추어 칭해집니다. 한자와 다르게 평민이나 상민, 부녀자들이 사용하는 저급한 문자라는 의미였지요. 그렇지만 세종이 꿈꾸었던 것처럼 훈민정음은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문자였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새로운 문자는 서서히 사람들 사이로 퍼져 나갑니다.
창제 초기, 국가 주도의 언해 사업이 진행됩니다. 언해란 본래 한글을 언문이라 부르던 조선 시대에 한문으로 된 원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을 말합니다. 가장 먼저는 조선의 통치 이념인 유교 경전과, 민간의 일반적인 종교였던 불교의 경전이 우리 글로 옮겨 보급됩니다. 이후에는 외국어 학습이나 의학, 병법 등 각종 실용 분야로 확대됩니다. 즉, 다양한 지식을 전하는 용도로 사용이 되었던 것이죠.
시간이 지나며 한글은 지식 전달을 넘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고 삶을 기록하는 기능을 하게 됩니다. 한글로 적힌 토지 매매 문서와 상언(上言; 왕에게 올린 문서)은 물론이고, 한글 편지, 한글 요리책, 한글 소설이 그러한 변화 흐름을 보여주지요.
정조가 원손이던 4-5살 무렵과 세손 시절, 큰외숙모 여흥 민씨에게 보낸 한글 편지들입니다. 조선 시대의 한글 편지 가운데 어린이의 필체로 쓴 편지가 드문 데다가 연령에 따른 글씨체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는 자료입니다.
요리와 관련된 서적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은 1670년경 장계향(張桂香)이 조선 양반가의 음식 조리 방법을 한글로 기록한 조리서,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입니다.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거나 저자 스스로 개발한 조리법을 기록한 문헌으로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여성이 쓴 조리서이자 모든 내용이 한글로만 적힌 최초의 음식 조리서입니다. 진달래전, 잡채, 집돼지고기볶음 등 총 146가지의 조리법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한국 음식사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지요.
위의 책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소설, 『홍길동전』입니다. 조선 후기에는 한글 소설이 상업적으로 판매 및 대여되며, 민간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전에는 양반들을 중심으로 한문 소설만 유통되었던 것과는 다르게요! 한글의 탄생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대를 열어준 것입니다. 같은 제목이 붙은 소설이라도, 지역과 시기, 필사자 등에 따라 내용이 천차만별로 달라졌습니다. 한글 소설들은 유튜브나 넷플릭스가 지금 우리의 여가 시간을 담당하는 것처럼, 조선 사람들의 도파민을 책임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사례를 통해 남성과 여성, 양반과 서민, 임금과 노비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의 일상에 새로운 문자가 스며든 모습을 확인하였습니다. 이처럼 한글은 사람들의 손끝에서 생명력을 얻고,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며 조선인들의 생활 전반에 영향력을 뻗치게 됩니다.
일제강점기, 우리말은 탄압과 고초를 겪었습니다.
1911년 조선교육령이 발표되며 일본어가 국어의 지위를 갖게 됩니다. 우리의 말은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게 되었죠. 행정·법률 관련 문서도 일본어로 작성되며 우리말은 생활어로 전락합니다. 교육령 제5조에서 교육의 목적을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국민된 성격을 함양함’. 다시 말해, 조선인에게 일본어를 통해 일본의 문화와 정체성을 주입하는 것이 목적이라고요. 그래서일까요? 교과서도 모두 일본어로 발행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렇게 민족의 뿌리를 빼앗길 수는 없었습니다.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린다”
한글학자 주시경은 제자 김두봉, 권덕규, 이규영 등과 함께 최초의 한글 사전 말모이 편찬에 뛰어듭니다. 말모이 원고에는 한글을 통해 민족의 얼을 살려 나라의 주권을 회복하고자 한 바람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살아생전 이 작업을 완성하지 못했지만, 뜻을 이어받은 조선어학회 후학들이 1947년 『조선말큰사전』을 내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름을 빼앗긴 우리 문자에 ‘한글’이라는 명칭을 처음 제시한 것도 주시경입니다. 한민족의 글이라는 뜻이지요.
조선어연구회와 신민회는 1926년 11월 4일 첫 한글날 기념식을 개최합니다. 당시에는 가갸날이라고 불리었지요. 한글을 처음 배울 때 내는 ‘가갸거겨…’ 외우는 소리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일제 치하에서도 우리말과 글을 지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수호하고자 한 이들의 굳건한 의지를 보여준 행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올해는 이 첫 번째 기념식으로부터 99번째 한글날입니다. 내년이면 벌써 100주년을 앞두고 있는데요, 그래서인지 이번 한글날이 더욱 의미 있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1930년대, 민족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어와 한글 사용은 완전히 금지됩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한글은 창제 원리가 밝혀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문자를 단순히 모방했다거나 창호의 격자 무늬를 본떴다는 등의 주장에 의해 그 의미가 평가절하 되고 있었습니다. 한글이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질 때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지요.
이 혼란한 시기에 아주 기적처럼, 행적을 감춘 지 500년 만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등장합니다. 1940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발견되었는데, 책 주인은 그 값으로 1천 원을 불렀습니다. 10배인 1만 원을 주고 서둘러 『훈민정음 해례본』을 구매한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간송 전형필입니다.
“훈민정음 같은 보물은 적어도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지 않겠소?”
전형필은 한국의 전통 문화 유산 수집을 통해 독립운동을 한 인물입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우리의 문화재가 나라 밖으로 빠져나가는 상황을 두고 볼 수 없어 전 재산을 쏟아 부어 막대한 양의 문화재를 구매했습니다. 1938년에는 수집한 유물을 연구하기 위해 보화각(葆華閣, 현재의 간송미술관)을 세웠습니다.
전형필이 『훈민정음 해례본』 구매에 지불한 돈, 1만 원은 당시 기와집 열 채를 살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현대 물가로 환산하면 무려 30억 원에 해당하는 금액이지요. 전형필은 일제가 이 책의 존재를 알아채기 전에 먼저 해례본의 가치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소중한 책을 빼앗기게 될까 두려워, 광복이 될 때까지 해례본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비밀로 하였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피란을 가게 되었을 때에도 수많은 수집품 중 해례본만은 챙겼습니다. 오동나무 상자에 넣어 낮에는 가슴에 품고 다녔고 밤에는 베개로 삼아 잠에 들었습니다.
해례본을 통해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와 사용법이 밝혀지면서 한글의 유래를 둘러싼 수많은 논란이 사라졌습니다. 반포 시기가 기록되어 있어, 10월 9일이 한글날로 지정될 수 있었던 근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등장 덕분에 오늘날 한글은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원리에 기반해 탄생한 문자라는 점에서 그 위상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한글의 숨결을 이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지금 당신 곁에 한글이 머물 수 있는 것이겠지요.
오늘은 훈민정음 탄생을 기념하는 579번째 날입니다. 전국 곳곳에서 다채로운 한글문화행사가 개최되고 있습니다. 특히,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한글박물관, 국립국어원이 주관하는 2025 한글 한마당은 오늘(9일)부터 18일까지 운영된다고 하니, 방문하여 한글과 함께한 수많은 이들의 뜨거운 손길을 떠올려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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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CCO 콘텐츠팀 이승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