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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ep Walking Oct 13. 2023

사차원 그녀(1)

 인간의 삶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의 시공(時空)에 귀속되도록 물리적으로 제한된다. 인간은 자신이 속한 시공 속 세상이 유일한 세상이라 믿으며 살아 왔고 그 세상 속에서 지속되는 시간이 절대적인 것이라 믿어왔다. 또한 이렇게 물리적으로 제한된 시공 속 인간은 또 다른 시공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인지하지 못한다. 시간의 흐름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상대적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인간의 오랜 역사에 비한다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최근의 일이다. 시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시간과 연결되어 있는 인간 삶의 공간, 즉 시공도 유일한 것이 아닐 수 있다. 비록 인간이 물리적인 제약으로 그의 삶 속에서 단지 하나의 시공 속 세상만을 경험하게 된다 하더라도, 사실 세상은 무수히 많은 시공이 존재할 수 있는 사차원의 시공이다. 

 만약 인간의 인지 능력이 지금과는 다르게 진화되어 다른 시공(세상)을 인지할 수 있도록 확장되었다면 시간과 공간에 대해 숙고할 때마다  우리가 맞닥뜨리게 되는 불가해성과 그로 인한 당혹감, 3차원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한계 등에 대한 문제가 극복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녀는 두통이 심해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요즘 들어 두통이 찾아오는 빈도가 잦아졌고 통증의 강도도 높아지고 있었다. 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두통이 찾아올 때마다 병원에 가봐야지 하고 생각만 하고 있다가 몇 주 전에 병원에 들러 진료를 받고 정밀검사가 필요하다는 소견을 받았다. 그 후 대학병원 정밀검사를 어렵게 예약했고 오늘이 바로 검사를 받기로 한 날이다. 난생 처음 큰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아야 하는 데서 오는 두려움과 스트레스가 컸지만 하루를 시작하는 일상은 다른 날과 변함이 없었고 이러한 일상의 지속이 인생에서 찾아오는 크고 작은 풍파를 담담히 견디게 하는 힘이 되기 마련이었다. 

 거실의 반쯤 열린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에 눈이 부셨다. 커튼을 열어 제치고 창문도 활짝 열었다. 신선한 아침 공기가 청량하게 지저귀는 새소리를 싣고 기분 좋게 밀려 들어왔다. 그녀의 집은 붐비는 도시로부터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 외곽 변두리에 위치해 있었다. 단독 전원주택들이 즐비한 부촌이었는데, 그녀는 5층 고급 빌라 건물의 4층에서 살았다. 건물을 나와 조금만 더 뒤로 오르면 도시 전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남산 타워에 오를 수 있는 등산로 입구와 연결된다. 창문을 열면 동네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아침 일찍 등산을 시작하는 부지런한 사람들이 보이고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내려가는 젊은이, 다양한 종류의 새소리들, 단독주택 집집마다 심어져 있는 커다란 나무들 사이로 부서지며 들어오는 아침 햇살들... 맑은 날씨의 아침에 늘 볼 수 있는 이 낯익은 풍경을 그녀는 사랑했다. 그러나 오늘은 왠지 이 풍경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공기는 더 맑고 상쾌했지만 늘 보아왔던 풍경과는 무엇인가 조금 어긋나 보였다. 어긋나 있다는 표현이 지금의 이 묘한 낯설음에 적절하게 어울리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어긋남이 무엇인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잦아진 두통 때문에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식탁위에 놓여 있던 두통약 한 알을 물과 함께 삼켰다. 두통이 올 때마다 그녀는 일부러 그를 생각했다. 그를 떠올리는 것은 진통에 도움이 되었다. 그를 생각할 때마다 우울했던 기분이 사라지며 가슴이 벅차오르고 삶의 환희가 찾아들었다. 그녀는 수개월 전 우연히 그 남자를 만났다. 2주마다 한번 꼴로 모이는 독서모임에서였다. 일반적인 독서모임과 달리 주로 심리학 서적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이었는데 그는 특히 인간의 뇌와 진화에 대한 주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녀는 그 분야에 대에 그와 얘기 나누는 것이 즐거웠다. 그러나 그가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들과는 달리 그의 직업은 엉뚱하게도 벤처 캐피탈리스트였다.  유망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스타트업 기업을 발굴하여 투자하고 그 기업의 성공을 이끌어내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에는 증권회사에서 경력을 쌓았고 지금은 독립하여 벤처캐피탈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 방면으로 꽤 성공한 사업가였다. 그는 다방면으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고 심리학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에서 독서량이 상당했다. 또한 나이에 비해 매우 젊은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그의 독특한 개성과 왕성한 지적 호기심이 그녀로 하여금 계속해서 그에 대한 궁금증을 일으켰고 그를 더 알고 싶은 욕망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그를 만나기 전과 만난 후로 나누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그와의 만남은 그녀의 인생에 대단한 사건이었고 그녀를 변하게 만든 계기였다. 그 남자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그녀를 깨지기 쉬운 유리 같은 여자라고 말했다. 왜 그가 그런 말을 했는지 정확한 진의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나름대로 그가 그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 지, 그의 눈에 어떻게 비추이는 지를 추측할 수 있었고 그런 추측을 할 때마다 그녀는 행복했다.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제까지 그녀 자신도 자신의 모습을 잘 알지 못했지만 그가 표현해주는 자신의 모습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정말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 보이고 실제로도 자신이 그런 성향의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곤 했다. 자신도 몰랐던 자신의 모습을 그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고 이해했다. 그는 그녀의 단점을 위로하려하였고 장점은 사랑해주고 격려해줄 줄 아는 남자였다. 그의 눈에 비친 그녀는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감정을 기꺼이 드러내지 못하는 가여운 사람이었다. 그는 그녀가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 이유가 상처를 경험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녀가 상처받게 된 이유마저도 그가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녀의 순수하고 솔직한 성격이 오히려 속물 같은 남자들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로 인해 20대에 상처받은 그녀의 아픔을 안타까워 해 주었다. 그녀는 그를 알게 되면서부터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잃었던 자존감을 회복해내고 있었다.   

 그녀는 집에서 차로 30분 거리의 번화한 시내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있다. 약대를 졸업하고 어머니가 운영하던 약국을 그대로 물려받아 어렵지 않게 자리를 잡았다. 약국은 대학병원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고 어머니께서 약사를 하시던 시절부터 찾아오는 고정고객들도 많아 불황이 없었고 늘 꾸준했다. 외동딸로 자란 그녀가 결혼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던 부모님이었지만 끝내 그런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한 채 부모님은 돌아가셨다. 그녀는 마흔이 가까운 나이였지만 혼자였다.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했던 그녀가 남자와 깊은 관계를 갖는 것을 피했기 때문에 결혼까지 갈 만한 일이 없었다. 누군가와 가까워지려 하면 어김없이 상대를 살피고 그로부터 멀어지려는 구실을 찾으려 애썼다. 대부분의 남자는 그런 모습에 질리게 되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결국 그녀가 멀어져갔다. 그런 그녀에게 그 남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그를 처음 보았을 때 어떤 운명 같은 인연을 느꼈다. 그의 강렬한 외모도 그녀의 기호를 사로잡고 마음속 깊은 곳을 울렸지만 외모에서 오는 거친 느낌과는 대조적으로 매우 지적인 면을 드러내는 그의 말투와 행동거지도 그녀를 매료시켰다. 이는 어느 정도 나이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젊은 시절 강렬하게 빛났던 개성적인 외모가 세월과 함께 부드러워지고 중후해진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이상형의 남자였다 하더라도 결국 그가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말 것이라는 고질적인 대인기피증은 여전히 그녀를 두려움으로 몰고 갔고 그로부터 자신을 멀어지게 하려는 구실을 찾아내려 끊임없이 그를 살피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숙함과 넓은 포용력은 그녀의 두려움을 이해하고 배려해 주었으며 그녀와의 거리를 좁혀나갔다. 그는 그녀보다 스무살 연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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