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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ep Walking Oct 13. 2023

사차원 그녀(2)

 그녀는 약국에 잠깐 들러 보조약사로 일하는 김 선생님에게 약국을 맡기고 몇 주 전 예약해 놓은 정밀검사를 위해 가까운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정밀검사가 처음인 그녀에게는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간호사가 알려주는 대로 옷을 갈아입고 혈액검사를 하며 차분히 검사에 임했다.  검사는 자율신경계 검사, MRI, 뇌파검사 순으로 진행되었다. 자율신경계 검사는 몸 군데군데에 동그란 모양의 전선을 부착하고 심호흡을 반복하는 것으로 끝났다. 두 번째로 받은 MRI 검사는 검사실이 따로 있었다. 검사장치 내로 몸이 이동할 때는 약간의 두려움이 일었다. 그녀는 MRI검사 테이블에 누운 채 온몸으로 스며드는 기계 소음을 들었다. 다양한 두드림 소리가 반복적으로 계속되었고 차츰 폐쇄에 대한 공포가 찾아왔다. 그녀는 시종 눈을 감고 있었지만 웬일인지 현란하고 다양한 시공(時空)의 이미지들이 보였고 그런 이미지들이 별의 일주운동처럼 빠르게 원을 그리며 머리위로 지나갔다. 그 모습이 너무 생생해서 자신도 모르게 눈을 번쩍 떴다. 그러나 이미지들은 사라지지 않았고 더욱 또렷해졌다. 그 이미지들은 머릿속 표상이 아니라 실재한다고 느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착각에 빠졌고 MRI기계가 마치 타임머신처럼 느껴졌다. 폐쇄공포증은 점차 사라졌지만 빠르게 왔다가 지나가는 현란한 이미지들로 인해 현기증이 느껴질 즈음에 검사가 끝났다. 너무나 신기한 체험이었다. 머릿속으로만 떠오른 표상들이었는지 실제의 모습이었는지를 가늠하느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마지막 받은 뇌파검사가 어떻게 끝났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모든 검사를 마치고 결과에 대한 상담을 받기 위해 신경과 담당 의사를 기다렸다. 검사기간 동안 그녀에게 보였던 수많은 이미지들이 실재했던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일까? 자신의 뇌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그녀는 초조했다. 그가 보고 싶었다. 같이 올걸 그랬나 싶었다. 그는 분명히 그녀를 위로하며 의지가 되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에게 무슨 병이 있는지 자신도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그에게 자신의 상황을 알리고 싶진 않았다. 잠시 동안 그의 생각을 하면서 그와 같이 있는 생각을 하자 마음이 따뜻해지기 시작하고 초조함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잠시 후 간호사가 다가와 신경과 전문의 김 요한이라는 명패가 붙은 방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방안에는 50대로 보이는 한 남자가 흰 가운을 입은 채로 의자 뒤 벽면에 걸려있는 MRI 사진을 보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자 안경을 벗고 의자를 건넨 뒤 그녀에게 물었다.  

“음... 환자분은 언제부터 두통을 느끼기 시작했죠?” 날카로와 보이는인상과 달리 그의 말투는 부드럽고 친절했다. 

“글쎄요...세 달 전부터 두통이 시작된 거 같은데, 통증이 심해진 건 3주 정도 된 것 같아요” 그녀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것이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는 잠시 말이 없다가 다시 MRI 사진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환자분의 전전두 부위...아 그러니까 뇌의 앞부분, 여기 이쯤에...보이시나요? 이 부위쯤에 작은 종양이 자라고 있어요”

“......” 

 그녀는 갑자기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녀는 더욱 더 불안해진 눈빛으로 의사가 가리키는 부위를 자세히 살폈다. 뒤편의 백라이트 불빛이 사진을 비추고 있어서 MRI 사진은 또렷하게 보였다. 의사가 가리키는 부위의 콩알처럼 생긴 것이 그가 말한 종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크기로 보아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닌데... 가급적 빨리 제거하는 것이 안전하겠어요. 과거에는 이렇게 작은 크기의 종양도 제거하는 데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고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요즘은 절제술이 발달해서 이 정도 크기의 종양을 제거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제야 그녀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선생님. 제가 MRI검사를 받을 때 너무나 생생한 이미지들을 보았어요. 마치 다른 여러 세상이 스쳐가듯 보였어요. 다른 환자들도 검사를 받을 때 그런 경험을 하나요?”

“음...그렇진 않아요. 환자분의 종양이 자라고 있는 위치가 전전두 부위라서 인지 능력에 혼란을 주고 있는 거예요. 좀 전문적인 얘기인데...”

의사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어갔다. 

“인간의 인지(cognition)는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과정인데, 외부 사건에 대한 내적 표상을 만들고 이를 기억으로 저장함으로써 사고하거나 회상하고 행동에 사용하도록 합니다. 그런 능력을 담당하는 전전두 부위가 종양으로 인해 자극을 받으며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죠...그렇지만 수술로 종양을 제거하면 정상적인 인지가 가능합니다. 너무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그녀는 의사의 설명을 듣고 어느 정도 이해를 한 듯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종양을 제거하기 전까지는 산발적인 두통이 계속 될 것이고 사물을 인지하고 공간을 지각하는 것에 문제가 있을 수 있어요. 종양이 자라면서 이 부위에 계속 압박을 가하고 있어요...더 늦게 진료를  받으셨다면 심각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었답니다.”

“......”

“일단 두통 증상이 일어날 때 드실 약을 처방해 드릴게요. 절제수술을 받기 전까지는 약으로 치료를 하시고.....가만 있자... 오늘 오신 김에 수술날짜를 예약하고 가시는 게 좋겠네요. 수술이 밀려 있어서 오늘 예약해도 수술일자는 3개월 뒤에나 가능할 거예요”

“그렇게 늦어져도 괜찮을까요?”

“종양의 크기가 크지 않아서 3개월 내에 수술한다면 문제가 없습니다. 더 늦어진다면 모르겠지만......”

“수술 후 부작용 같은 것은 없을까요?” 그녀는 조심스레 의사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아마 10년이나 그 전쯤에 수술을 받으셨다면 수술 후 부작용이 있을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의학이 발달해서 수술 후 부작용이나 재발률은 거의 없다고 보셔도 됩니다.” 

 확신에 찬 그의 목소리가 그녀를 안심시켰다. 건강한 자신이 되어 그와의 만남을 이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며 갑작스레 명랑한 기분이 찾아왔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 그러면 오늘 예약을 하겠습니다.”

그녀는 3개월 후에 수술을 받기로 했다.     

 병원에서 나온 그녀는 두통의 확실한 원인을 알게 된 것에 한편으로 안심이 되기도 했지만 뇌종양이라는 병명이 주는 위압감에 불안감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어쩐지 그가 너무나 보고 싶어졌다. 그녀는 충동적으로 그에게 문자를 보내 만나자고 했다. 어디든 가고 싶다고 했다. 그에게서 곧바로 답장이 왔다. 무슨 일인지 이유를 묻는 말없이 약속장소만 적혀 있었다. 

 한 시간 후에 신촌 로타리 근처로 그가 차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연한 갈색의 폭스바겐 Phaeton을 몰았다. 은은하면서도 중후한 느낌의 이 중형차는 그의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고 그녀는 볼 때마다 생각했다. 그는 그녀를 옆 좌석에 태우고 안전벨트를 매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살폈다. 갑작스레 어디론가 가고 싶다는 그녀의 호출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걱정하는 눈빛이었지만 참을성 있게 말을 아끼고 있었다. 

“오늘 기분이 좀 우울했는데 당신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어요...” 

 그녀가 말했다. 걱정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살피다 뜻밖에 명랑한 목소리를 듣자 그가 안도했다.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건 아니지?” 그녀는 말없이 조용히 웃으며 그와 눈을 맞히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오케이... 그러면 바람도 쏘일 겸 드라이브 좀 해볼까?” 그의 목소리도 명랑해졌다. 

 부드러우면서도 중후한 연갈색의 Phaeton은 시내를 벗어나 강변북로를 질주했다. 그녀는 차 윈도우를 한껏 내렸다. 거칠게 밀고 들어오는 상쾌하고 시원한 바람이 두 사람의 대화소리를 삼켜버렸다. 바람소리를 이기려고 갑자기 큰 소리로 몇 마디 외치던 그가 호탕하게 웃다가 말을 그쳤다. 그녀는 정면을 주시하며 운전하다가 가끔씩 힐끗힐끗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행복한 마음으로 마주했다. 

 그는 항상 이런 식으로 자신을 배려해주었다. 지루할 수도 있는 그녀의 일상에 대한 얘기도 차분히 경청해 주었고 그녀가 화가 나는 일을 얘기했을 땐 같이 분개했고 즐거운 일을 얘기 했을 땐 진심으로 같이 즐거워했다. 그는 한마디로 중년의 부드러운 매력을 물씬 풍기는 그런 남자였다. 강변북로를 달리던 자동차는 김포대교 쪽으로 방향을 틀어 가장 가까이에 있는 바다로 가기 위해 대부도로 향했다. 시화방조제를 지나칠 때는 차창을 열어 바닷바람을 모두 들이켰다. 그녀는 한결 기분이 좋아졌고 갑작스레 허기를 느꼈다. 두 사람은 대부도에 있는 회집에서 맛있는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러 분위기 좋은 카페에 들었다. 바다가 보이는 창가 쪽 의자에 깊숙이 몸을 누이고 두 사람은 같은 방향으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젊을 적 사귀었던 여자 얘기 좀 해봐요” 느닷없이 그녀가 물었다.

“음... 지금도 젊은 데 당신 얘기를 해달라는 건가? 하하하”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고 그녀는 잠깐 눈을 흘겼다. 사실 그녀는 그의 과거가 궁금했다. 지금의 그가 혼자인 건 확실히 알고 있었지만 과거의 그에게 어떤 여자들이 있었는지 어떤 이유로 혼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얘기는 그로부터 들어보지 못했고 그녀 역시 묻지 않았었다. 그런데 오늘 문득 그와 인연이 있었던 여자들에 대한 궁금증이 발작처럼 커졌다.  “오늘은 얼렁뚱땅 못 넘어갈 거예요.” 짐짓 화가 난 듯 그녀는 팔짱을 끼고 그의 얼굴을 주시했다. 그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면서 커피 잔을 들어 입에 대었다 떼었다. 

“그런 건 잘 안 물어 봤었잖아? 이제 우리 많이 친해진 건가? 내 과거사가 궁금한 걸 보니...하하하...사실 난 기억할 만큼 인연이 깊었던 여자가 없었어. 믿어지지 않지? 이 나이되도록 그런 여자가 없다는 것이...믿거나 말거나지만 사실이야”

“에이 거짓말~” 그녀는 딱 한 번 그의 과거 여자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지만 그의 대답은 그 때도 이런 식이었다. 거짓말을 하는 거 같진 않았는데 믿기도 어려운 말이었다. 바람둥이 남자가 상투적으로 하는 거짓말 같아 보였지만 그런 말을 할 때의 그의 말투에는 감정이 묻어 있지 않은 너무 건조한 태도였기에 거짓말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마치 ‘과거의 여자? 난 그런 건 도통 관심 없이 살아왔어’ 라고 하는 듯한 태도였다. 그녀는 곧 그에게서 그런 비밀스런 추억담을 끌어내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 단념하고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좋아요. 그러면 과거 여자 얘기 해주는 대신에 옛날 젊을 적 사진 좀 보여 주세요”

말하고 나니 정말 그의 젊은 시절이 궁금했다. 지금은 중년의 나이가 되어 내면의 열정과 생각들이 세월에 연마되어 부드러워졌겠지만 과거 젊은 시절의 모습은 어땠을까? 가슴 속 정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을 그의 젊은 외모가 무척 궁금해졌다. 그녀는 계속해서 보챘고 그는 그대로 과거 여자 얘기에서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라도 적당한 젊은 시절 사진을 서둘러 찾아야 했다. 핸드폰 화면을 부리나케 스크롤하던 그가 어떤 사진을 발견하고 핸드폰을 건네며 말했다.  

“음... 이건 20년 전 사진인데 아직 저장이 되어 있었네? 20년 전이니까 아마 지금 당신과 비슷한 또래였겠네 하하하”

핸드폰을 건네받은 그녀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사진 속 젊은 그는 검은 슈트에 청색 남방을 입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얼굴 모습을 클로즈업 해서 찍은 사진이라 가슴 아랫부분은 사진 속에 잘 드러나지 않았다. 사진 속의 그는 어딘가를 정면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머리칼은 새까맸고 머리색과 똑같이 까만 눈썹이 매우 선명해서 인상적이었다. 면도가 깔끔하게 되지 않았는지 아주 짧은 수염들이 얼굴을 덮고 있어서 남성적인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턱 선도 강인해 보였다. 무엇보다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그의 강렬한 눈빛이었다. 세상에 대한 모험심을 드러내는 듯한 형형한 눈빛이 그녀를 정면으로 쏘아 보고 있었다. 그 눈빛과 마주했을 때 그녀는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느낌이 다시 오버랩 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 느낌은 훨씬 강렬했다. 

“어때, 내 젊을 적 모습이?” 

사진속의 눈빛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그가 물었지만 그녀는 사진 속 그에게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되돌아오는 말이 없자 그가 덧붙였다. 

“기억은 잘 안 나는데 뒤로 보이는 배경으로 봐선 서울역에서 찍은 사진 같네...” 그제야 그녀의 눈에도 서울역의 붉은 돔형 건물 배경이 보였다. 

“이땐 정말 훈남이었네요...이 사진...내게 보내주세요...” 그녀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그럴까? 오케이!” 그는 기꺼이 자신의 20년 전 사진을 그녀에게 보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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