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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ep Walking Oct 13. 2023

사차원 그녀(3)


 대부도에 다녀온 후로 며칠이 지났다. 병원에서 처방한 진통제 덕분인지 간헐적으로 찾아오던 두통이 말끔히 사라졌다. 약국 달력에는 3개월 후 수술을 받기로 예정되어 있는 날짜에 빨간 동그라미를 쳐놨다. 퇴근시간이 되어 김 선생님에게 약국을 맡기고 밖으로 나왔다. 출퇴근을 할 때는 교통체증을 피해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약국에서 서울역까지는 전철을 타고 왔다가 서울역 환승센터에서 버스를 한 번 더 갈아타고 집으로 간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서울역 환승센터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비었고 그녀도 자신의 버스가 정차하는 플랫폼에 줄을 서고 있었다. 잠시 후 기다리던 버스가 도착했다. 그녀는 버스에 올라 마침 비어있는 뒤편의 마지막 한자리에 가서 앉았다. 버스가 막 출발하려는 찰나, 앞문으로 헐레벌떡 뛰어 온 남자가 버스에 올라섰다. 그는 검은 슈트를 입고 있었다. 그는 버스 안을 두리번거리며 걸어오다 그녀가 앉은 좌석 앞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위쪽에 붙어있는 손잡이를 잡고 섰다. 무심결에 그의 얼굴을 올려다 본 그녀는 숨이 멎을 듯 놀라고 말았다. 

 그는 그였다. 

 젊은 그.  

 검은 슈트에 청색 남방을 입은 사진 속의 그 젊은 남자였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남들에게 들키지 않게 숨을 고르고 최대한 자연스러운 태도로 다시 한 번 그를 올려다보았다. 형형한 눈빛과 짧게 자란 수염, 짙은 눈썹, 강인해 보이는 턱 선. 분명 사진속의 남자였다. 사실 그녀는 대부도에서 사진을 전송받은 이후로 자주 사진을 들여다보며 그를 욕망했다. 그것은 육체적인 욕망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녀로 하여금 그를 사랑하게 만들었던 그의 매력이 젊은 시절의 그에게서 더 강하게 발산되고 있었기에 그 시절의 모습을 보고 싶은 욕망이었다. 그러나 시간을 거슬러 젊은 그를 볼 수 없음에 안타까워하며 하염없이 사진을 들여다보곤 했었다. 그렇기에 젊은 그의 모습은 그녀에게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는 지방 출장을 다녀오는 듯 제법 큰 가방을 메고 있었고 사진 속 모습처럼 청색 남방에 검은 슈트를 입고 있었다. 서울역에서 버스를 같이 탔으니 사진 속의 뒷 배경인 서울역과도 일치했다! 이럴수가!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왠지 그가 자신을 알아보고 말을 걸기라도 할지 모른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며 숨을 죽이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버스가 남산 쪽으로 진입하여 그녀의 집을 두 정거장쯤 남겨두었을 쯤 그가 버스에서 내렸다. 그는 한남동 인근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그가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버스 창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며칠 후, 그녀는 한강진역 근처에서 중년의 그를 만났다.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전에 내게 보여준 젊을 적 사진...그 때가 아마 20년 전 쯤이라고 했죠?”

“으응?” 그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아...대부도에서 보내준 사진? 맞아...20년 정도 되었지...그러니까 지금의 당신과 비슷한 나이였을 거야.”

그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다 장난기어린 말투로 덧붙였다.

“그 시절에 당신을 만났다면 아마 지금보다 훨씬 더 당신에게 빠져들었을 텐데...하하하”

“혹시 그때 어디에서 살았었어요?” 그녀는 그의 장난스런 말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진지하게 다그치며 물었다.

“글쎄...오래된 일이라...기억이 가물가물한데 ?”

“잘 생각해봐요...이상한 일을 겪어서 그래요.” 그녀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상한 일?” 그제야 그는 걱정이 되는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살피며 정신을 집중하여 과거를 떠올려보기 시작했다. 

“한남동...”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한마디 단어에 그녀의 얼굴이 긴장과 놀라움으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래, 한남동에서 살았던 거 같아.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한남동이 확실해” 그녀의 놀라하는 모습에 걱정스러워진 그가 물었다.

“왜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영문을 모른 채 눈이 동그래진 그가 재차 물었지만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한남동에 살고 있을 때는 내가 아직 증권회사를 다니며 월급쟁이 생활을 하고 있었던 시절이지.”        

 며칠 뒤 어느 날. 그녀는 퇴근할 때 집에서 두 정거장 앞선, 검은 슈트의 남자가 내렸던 정류장에서 내렸다. 집과 약간의 거리가 있긴 하지만 이 동네도 그녀에겐 익숙한 곳이었다. 그러나 어쩐지 이곳의 풍경이 평소에 느끼던 모습과는 무엇인가 어긋나 있는 듯 보였다. 어긋나 있다는 표현이 지금의 이 묘한 낯설음에 적절하게 어울리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어긋남이 무엇인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두통이 시작되었던 때부터 나타났던 이 어긋난 느낌은 전보다 더 잦아졌다. 

 혹시 며칠 전 만났던 젊은 그를 또 볼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이곳에 내리긴 했지만 내린 곳으로부터 집으로 걸어가는 것 이외엔 달리 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집으로 가지 않았다. 이곳에서 그를 기다려보기로 했다. 정류장 벤치에 무작정 앉아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녀는 막바지 꽃샘추위가 올 것이라는 아침 날씨예보에 조금 두터운 봄 외투를 입고 출근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차림은 한여름 반팔차림이었던 것이다. 그녀도 버스에서 내리며 덥다는 생각을 했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저쪽에서 버스가 다가와 그녀가 앉아있는 정류장에 멈추어 섰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버스가 토해내는 승객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가 나타났다. 나타났다는 말이 어울린다. 거짓말처럼 무리에 섞여 버스에 내리고 있는 그를 발견했다. 옷차림이 바뀌긴 했지만 그는 남과 혼동되지 않는 마스크의 소유자였다. 체크무늬 반팔남방 차림의 그가 버스에서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당황스러움에 어찌할 바를 몰라 정류장 부스 안을 서성거렸다. 젊은 그는 그녀를 지나쳐 뚜벅뚜벅 멀어져갔다. 여기서 그를 놓쳐버리면 영영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그의 뒤를 쫓다가 소리쳤다.

“여보세요, 잠깐만요” 그가 못 들었는지 가던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걸었다. 

“여보세요... 민준씨!” 그녀가 소리쳤다.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늘 불러보고 싶은 이름이었지만 부르기가 어려운 이름이었다. 그녀는 그를 만날 때마다 속으로만 그의 이름을 되 뇌이며 차마 부를 수 없음에 아쉬워했던 적이 많았다. 그러나 그가 젊은 민준이 맞다면 나이 차이에서 오는 어색함으로 그를 부를 수 없었던 어려움은 사라질 것이다. 그녀는 멀어져가는 그를 불러 세워야 한다는 다급한 마음에 그를 젊은 시절의 민준이라 확신하고 큰 소리로 불렀던 것이다. 바쁜 걸음으로 앞서가던 남자가 걸음을 멈췄다. 그는 뒤를 돌아보며,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허겁지겁 자신을 따라오는 여자를 기다렸다가 마주했다. 그는 그녀를 살피며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누구시죠? 누구신데...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죠?”

그의 이름은 역시 민준 이었나보다. 그녀는 또 한번 놀랐지만 이젠 그 놀라움이 그렇게 충격적이진 않았다. 

“저는 당신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나를 알고 있죠?”

“......”

길을 가던 몇몇 사람들이 어색하게 마주하고 있는 두 사람을 힐끗거리며 지나쳤다. 그녀는 모퉁이에 있는 찻집을 가리키며 그에게 잠깐 시간을 내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는 의심스러운 표정이었지만 한편으론 그녀의 정체가 궁금하기도 했고 그녀가 그다지 위협적으로 보이지도 않았기에 그녀의 제안을 순순히 따랐다.  

 찻집에서는 그녀가 고교시절에 들었던, 성시경이 리메이크한 김광석의 발라드풍 가요, ‘거리에서’ 가 은은하게 흐르고 있었다. 무더운 바깥 날씨와 대조적으로 실내는 에어컨 바람으로 시원했다. 외투를 의자 팔걸이에 내려놓고 상기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그녀가 어딘가 모르게 엉뚱해 보인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녀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참을성 있게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당신을 잘 아는 분이 당신을 제게 소개해 주었어요 그리고 여기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알려 주었어요” 

“나를 잘 아는 사람이요? 그게 누굽니까?”

“그 사람이 누군지는 말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민준 씨가 알 수 없는 분이에요”

“나를 잘 아는 사람인데 내가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민준은 그녀의 말이 답답했지만 지금의 상황이 짜증이 나거나 불쾌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의 눈에 비친 그녀는 엉뚱해 보였지만 왠지 자꾸 호감이 갔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그 분에 대해 알려드릴게요...저는 이상한 사람은 아니에요. 저도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고 약국을 운영하고 있어요”  

“알겠어요...그런데 나는 왜 만나려고 한 거죠?”

“.......”

 중년의 당신을 만나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고 당신의 젊은 시절의 모습을 너무나 보고 싶어서 이렇게 만나고 싶었다. 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당신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요.”  

“도움이라뇨? 내게 어떻게 도움이 된다는 거죠?”

그가 따지듯이 물을 때는 사진속의 도전적인 눈빛이 그대로 드러났다. 아니 사진보다 훨씬 생생했다. 그는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쏘아보는 그 눈빛에 흠칫했지만 실제 그 눈빛을 느끼자 가슴이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지금 증권회사에 근무하고 계시죠? 펀드매니저...맞죠?”

그녀는 젊은 민준의 현재 직업에 대해 들었기 때문에 그가 하는 일을 알고 있었다. 민준은 놀랐다. 중년의 그는 놀랄 때마다 눈을 깜박이는 버릇이 있었다. 그 버릇은 젊은 민준에게도 있었다.  

“아니 내가 하는 일을 어떻게 알았죠? 그것도 나를 소개해준 그 사람에게 들었나요?” 그는 눈을 자주 깜박거리며 물었고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어떻게 도와줄 수 있다는 거죠?”

잠시 머뭇거리다 그녀가 말했다.

“...제가 어떤 종목이 유망한지 민준 씨에게 알려줄 수 있어요”

민준은 자신의 직업상 이렇게 종목을 알려주겠다는 사람을 많이 보아왔고 자신의 돈을 그 종목에 반드시 투자하라고 압박하는 고객들도 수없이 접해왔다. 그는 갑작스레 그녀에 대한 신뢰가 추락하는 것을 느꼈다. 그녀에 대한 호감이 점점 커지고 있던 차라 아쉬웠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런 목적으로 날 만나려고 한 거였군요? 나는 그런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 

출입문으로 향하는 그를 다급하게 쫓아가서 그녀가 메모지 하나를 건넸다. 

“지금은 안 믿으셔도 좋아요. 다만 지금 전해드리는 이 종목들을 꼭 확인해 보세요.” 메모지에는 몇 개의 주식 종목이 적혀있었다. 민준은 무시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애정 어린 눈빛에 깃든 호의와 그가 처음부터 느꼈던 그녀에 대한 호감이 메모지를 받아 쥐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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