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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ep Walking Oct 13. 2023

사차원 그녀(4)

 그와 헤어진 후 그녀는 찻집에서 나와 집까지 걷기로 했다. 그녀의 마음속 흥분이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 그녀가 열망했던 젊은 민준을 실제로 만나 그의 눈빛을 보며 얘기를 나눴고 그의 숨소리를 듣고 목소리를 들었으며 온전히 그를 느꼈던 것이다. 그녀는 지금의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그녀는 남산아래 집으로 향해 있는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마주쳐 불어오는 바람이 차가왔다. 좀 전에 느꼈던 더위는 사라지고 체감되는 쌀쌀한 기온으로 외투를 여며야 했다. 주변을 지나치는 사람들 중에도 반팔차림의 여름옷을 입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두 개의 세상을 동시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대학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이 얘기해 준 인지능력에 이상이 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이상이라기보다는 인지능력의 확장이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전전두 부위에서 자라는 종양이 자신의 인지 능력을 확장시켜 놓은 것이다. 보통의 인간이 현재 살고 있는 세상만 인지할 수 있는 것에 비해 그녀는 두 개의 시공을 인지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MRI검사를 했을 때 별의 일주 운동처럼 스쳐 지나가던 수많은 시공의 이미지들이 실재한다고 느껴졌던 이유도 그 순간 수많은 시공을 자신이 인지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세상은 사차원의 시공으로 모든(every) 시간대의 세상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지만, 단지 인간이 하나의 시공에 귀속되어 존재하는 유기체이기에 느끼지 못할 뿐, 모든 시공은 현재 이 곳에 겹쳐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녀는 가끔씩 풍경이 어긋나게 느껴졌던 이유가 시공의 전환에 따른 자신의 인지 부작용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런 어긋남의 부자연스러운 느낌도 이제는 거의 사라졌다. 그녀는 오버랩 되어 있는 시공 속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 오갈 수 있었지만, 그녀의 무의식속에 자리 잡은 본능이 그 선택에 더 크게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며칠 후 그녀는 민준을 다시 만났다. 처음 만났던 버스 정류장에서였다. 거기에서 서성이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민준을 버스 안에 타고 있던 그녀가 먼저 발견하고 버스에서 내린 것이다. 민준은 그녀가 어디에서 내리는지를 알 수 없었기에 그녀를 처음 만났던 장소에서 무작정 기다렸던 것이다. 그만큼 그녀를 만나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는 놀라움과 반가움으로 그녀를 맞았다. 그녀도 두 번째로 보는 젊은 민준이 무척 반갑고 좋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는 왜 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알고 있었지만 짐짓 모른 체 하며 물었다.

“여기에서 무얼 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을 만나기 위해 며칠 동안 여기서 이 시간대에 기다리고 있었어요”

“저를요?”

그는 주변을 살피다가 그녀의 손을 낚아채듯 끌고 처음 만났던 찻집에 들어가 앉혔다. 그녀는 당황하며 끌려가긴 했지만 자신의 손을 꼭 잡은 그의 손이 싫지 않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민준이 흥분한 어조로 다짜고짜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거예요?” 

“혹시 당신도 펀드 매니저에요?”

“어떻게 분석했기에 이 종목들이 뜰 거라는 걸 안 거죠?”

“알려준 종목들이 모두 며칠씩 상한가를 치는 건 우연치고는 너무나  희박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실제로 일어났어요. 도대체 어떻게 분석한 거죠? 미래에서 살다 오지 않는 한 이런 일은 절대 가능하지 않아요.”

민준은 쉴 새 없이 질문을 퍼부어댔지만 그녀는 뭐라 딱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다가 말했다.

“...미래에서 살다 온 걸로 해 두죠...그럼”

“뭐라고요?” 민준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그녀를 보고 있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잠깐 동안의 침묵이 흐른 뒤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제가 종목에 대해 분석한 방법을 알려드릴 수는 없어요. 왜냐하면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 

무엇인가를 생각하던 민준이 다시 물었다.

“좋아요...그러면 하나만 묻죠. 나를 도와주려는 이유가 뭐죠?”

“그것은...그것은...” 그녀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당신을 도와주는 데는 이유가 없다. 그저 당신을 사랑하기에 당신을 돕고 싶을 뿐이다. 이렇게 당신을 도와주는 구실로 나는 당신을 계속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 당신을 잘 아는 분이 당신을 돕고 싶어 하기 때문이에요”

그녀가 자주 언급하는 ‘자신을 잘 아는 분’의 정체가 궁금하긴 했지만 그는 더 묻지 않기로 했다. 그녀를 계속 만나가면서 알아나가자고 생각했다. 미스테리하게 자신의 일상에 갑자기 나타난 그녀가 사차원 세상에서 온 것처럼 느껴졌지만 처음부터 그는 그녀에게 호감이 갔고 그녀에게 끌렸다. 그는 만남을 이어가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당신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핸드폰 번호라도 서로 알아야 하지 않아요?”

“핸드폰으로는 연락할 수 없어요. 단지 저만 당신에게 연락할 수 있어요. 우리 이렇게 해요...제가 먼저 당신에게 연락을 할게요. 그때 만나는 걸로 해요. 헤어지기 전에는 다음에 만날 날과 장소를 약속하자고요”

민준은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녀의 제안에 동의하고 그녀에게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알려주었다. 그의 핸드폰 번호는 그녀가 이미 알고 있던 번호와 일치했다.      

 그로부터 한동안 그녀가 사는 세상은 20년 전의 시공이었다. 그녀는 일주일에 서너 번 씩 젊은 민준을 만났고 간간히 주식종목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그러나 만남의 목적이 주식정보 교환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사실 그 목적은 구실에 불과했다. 주식 투자로 젊은 민준이 큰 부를 쌓은 것도 사실이지만 두 사람은 더 큰 것을 쌓아갔다.

 만남이 이어지면서 두 사람은 급속도로 서로에게 빠져 들어갔다. 그녀는 젊은 민준의 육체와 정신을 모두 사랑했고 민준 역시 지금껏 만나보지 못했던 자신의 이상에 딱 들어맞는 여인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간혹 중년의 그를 만났다. 그도 여전히 민준이었지만,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뜨거움이 아쉬웠다. 그러나 중년의 민준에게는 부드러움과 관대함이 있었고 그녀를 편안하게 해주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녀는 한 남자로부터 젊음의 열정과 패기, 중년의 포용력과 이해심을 모두 느낄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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