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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담 Mar 03. 2022

짧은 기록들.

꾸준히 행복할 순 없으나, 꾸준히 기록할 순 있기에.  

매일 아침 풍경! 


2년쯤 되었다. 습관이 굳어지기까지. 이제는 시계만큼 정확하게 몸과 마음이 단련된 것 같다. (학교를 가지 않는 날) 우리가 함께하는 오전 시간은 밤보다 고요하다. 대부분 조성진, 히사이시 조의 음악을 켜놓고 각자 해야 할 일들을 한다. 아이들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정해놓은 건 없다.) 쓰고 싶은 글을 쓴다. 그 시간에 내가 부산을 떨면 방해가 되니까, 나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간혹 빨래를 개기도 한다. 다만 돌아다니지 않는다. 언제든 아이들이 궁금점이 생기면 나에게 찾아올 수 있도록 자리를 지킨다.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시간을 정해두진 않았지만 자연스레 12시 반 정도까지 틀이 잡히는 듯했고, 그 이후부터는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1시가 조금 지나 점심을 먹으면 외출을 하거나 잠깐의 산책을 다녀오지만, 요즘처럼 그것도 여의치 않을 때는 반나절이나 노는 시간이 생기는 거지 뭐. 

학원을 가지 않는 아이들은 여유롭다. 심심하니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놀이를 만들고, 다시 멍하게 생각을 쉬기도 하고, 책을 읽다가 툭 치고 나오는 생각으로 다시 글을 쓴다. 그러니까 생각을 가지고 놀 줄 알게 된다. 소소한 습관들이 모여서 아이의 하루를 만들고 일 년을 지배하며 성장시킨다. 


진흙을 이겨 그릇을 만들지만, 그릇 안의 비어있음에 의해서 그릇의 쓰임새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있음'의 유익함은 '없음'의 작용에서 나오는 것이다. - 노자, 도덕경 - 






김밥과 만두는 흔한 음식이고 어디서든 사 먹을 수 있는 누구나 아는 맛이지만, 만들어먹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집집마다 맛이 다르고 특유의 감칠맛을 뽐낸다. 어떤 맛집에서도 낼 수 없는 집 김밥, 집 만두의 풍미가 있다. 간단히 사 먹기를 마다하고 수고로움을 자처하는 이유는 경험을 먹이고픈 바람이 있어서이기도 하다. 김밥을 말 때 옆에 와서 조잘거리는 아이들의 말이 정겹다. "엄마 참치도 넣어줘. 난 치즈김밥. 엄마 시금치는 넣지 말아 줘. 나는 당근이랑 계란 많이! " 한 줄을 싸기가 무섭게 다음 김밥의 종류를 정하고, 한 줄씩 말아보기도 한다. 김밥은 다 만들고 나면 이미 배가 부르다. 만들면서 먹는 음식이랄까. 




만두는 또 어떤가. 고기만두, 김치만두 소만 만들어두면 빚는 과정은 놀이가 된다. 소싯적에 아이클레이 좀 조물딱 거려본 아이들에게 만두 빚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갓 쪄낸 만두는 맛이 없기가 더 힘들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만두를 보면 입꼬리가 올라가고 호호 불어가며 손으로 집어먹는 재미가 있다. 


유년시절의 어떤 기억들은 몇십 년이 지나도 살아있다. 대단한 경험을 해서 오래 기억되는 게 아니라 그때의 마음이 동하였기에 깊게 각인이 되어 추억이 된 것이다.  시시콜콜하고 잔잔한 경험들을 많이 맛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언제든 집을 생각하면 마음이 부를 수 있도록. 







훌쩍 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아이가 입학하던 해에 찾아온 팬데믹은 입학식을 삼켜버렸고 아이의 첫 초등학교 등교일은 연기되었다. 선생님과 전화로 인사를 나누고 학교생활에 관련된 자료를 받기 위해 정해진 시간에 학교 주차장으로 가서 마치 드라이브 쓰루처럼 책과 서류들을 받았다. 마스크를 쓰고 첫 학교생활을 시작한 그 해의 아이들은 경험하지 못했다.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을 이용해 친구들과 숨이 차오르도록 뛰어놀며 얼굴이 발개지던 생기를, 종이 치면 후다다닥 뛰어가 자리에 앉아 키득거리는 짜릿함을,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걸어가며 먹던 문방구 불량식품의 맛을, 더운 여름날 길을 걸으며 먹던 소프트 아이스크림의 재미를, 급식을 먹고 나서 바로 양치할 수 있는 상쾌함을, 마음껏 숨을 내뱉고 삼킬 수 있는 공기의 맛을 모른다. 어렴풋이 알지만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다. 


공원에서 뛰어놀며 땀이 송송 맺히기 시작하면 아이는 마스크를 들썩였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는 마스크를 벗고 배드민턴을 치고 줄넘기를 하며 뛰어놀다가도 같은 이유로 야외를 찾은 사람들이 북적이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마스크로 코와 입을 봉인했다. 


종업식이 있는 마지막 날은 으레 반 아이들 각자의 이름이 적힌 종이 한 장을 돌려가며 친구에게 칭찬해주기를 한다. 딸아이는 늘 그랬듯, "넌 그림을 잘 그려. 넌 공부를 잘해. 너는 발표를 잘하고 목소리가 예뻐. 너는 만들기랑 영어를 잘해. 너는 친구를 잘 도와주고 착해."  칭찬들이 풍성했기에 다들 그런 줄만 알았다. 아들의 종이를 보고는 뜨악하며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는 정말 키가 커. 너는 우리 반에서 키가 제일 커. 어떻게 하면 너처럼 키가 클 수 있어? 알려줘. 키가 커서 부럽다. 너는 달리기를 제일 잘해. 너는 정말 빨리 달려. 나도 너처럼 빨리 달리고 싶어. 너는 잘 달려. 너는 키가 커....."의 반복. 그는 경주마인가. 나무인가. 


재능만 칭찬할 수 있는 건 아닌데, 나도 모르게 편견이 있었나 보다. 그렇지. 큰 키도 칭찬할 수 있고, 예쁜 눈과 귀여운 미소, 재빠름과 차분함도 모두 칭찬할 수 있지. 꼭 무얼 잘해야 칭찬받는 건 아닌데 말이야. 


그러고 보니 우리 집엔 무럭무럭 자라는 초록이가 있다. 온도와 습도를 잘 맞춰주고 환기를 자주 시켜주며, 한번 물을 줄 땐 듬뿍 줘야 한다. 그리고 나선 흙을 손으로 만져보면 말라 있을 때까지 뿌리에겐 가만히 시간을 주고, 메마른 잎은 한 번씩 분무기로 적셔준다. 요즘처럼 건조한 계절엔 화분 옆에 젖은 수건을 걸어놓기도 한다. 물을 적게 주어서가 아닌 과습으로 죽는 식물이 많다고 한다. 뿌리 아래까지 흘러나오도록 흠뻑 물을 준 뒤엔 일주일 정도 흙에 물을 뿌리지 않고 지켜본다. 과잉보호는 금물이다. 


식물을 그렇게 키우면 무럭무럭 자라듯 아이도 곁에서 온기를 주고 마음의 환기를 시켜주며, 때론 혼자만의 시간을 주고 사랑을 표현할 땐 확실히 듬뿍 뿌려주어야 한다. 


아이를 올바르게 키운다는 것은 과잉과 결핍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아야 하는 일이고, 빈 그릇에 무얼 채우려 들지 않고 어쩌면 가만히 바라보는 일이다. 그러다 툭, 하나가 담기면 소중히 모으면 된다.







좋아하는 자리가 마침 딱 비어 있을 때 기부니가 좋다. 조용하기까지 하면 마치 선물을 받은 것만 같으다.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와 앉고 장소에 어울리는 자잘한 소란스러움이 이어진다. 그러다가 툭, 어떤 소리는 이어지지 못한다. 한 사람이 계속 기침을 한다. 재채기라 믿고 싶었는데, 기침이 이어진다. 모든 소란을 뚫고 우렁찬 기침소리가 중심을 차지했다.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은 커피 탓이겠지. 다들 힐끗거렸다가 무심한 척 이내 고개를 돌리며 속으론 같은 마음일까.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 여유를 부리기엔 이미 망한 것 같다. 기어이 커피를 들고 일어선다. (기침을 하면서도 커피숍을 찾은 이는 도덕성이 부족하고, 참지 못하고 일어나는 나는 사회성이 부족했다.)  


이놈의 예민함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고 집에 와서 글을 쓰며 다시 쓸모를 찾는다. 2년의 시간 동안 우리가 잃은 것은 두려움이 야기한 도덕성과 사회성이지 않을까. 따뜻한 봄이 오면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 곤두서 있던 마음도 풀리겠지. 아무튼 봄은 올 테니까 커피라도 벤치에 앉아 먹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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