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와 손주

And smile

by 예담

아버님은 여전하시다. (아니, 겉으론 여전해 보이신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치매노인처럼 황당한 요구를 하거나, 했던 말을 반복하고 식사를 하고 돌아서서 "밥 언제 먹냐"는 말씀을 하시지도 않는다. 그저 느리시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점잖은 노인으로 비칠 뿐이지만 자세히 보면 눈에 초점이 흐리시다.


정기적으로 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보고 계시며 갈 때마다 같은 말을 듣는다. 치매는 빠르게 진행되고 있으며, 인지능력이 떨어지고 있다. 일반적인 알츠하이머와는 조금 다른 케이스로 전두엽 측면이 쪼그라들고 있다고 한다. 언어기능이 점차 상실되며 행동을 통제하는 기능에도 문제가 생기게 된다. 이유 없는 불안과 초조함이 지속되고 공격성과 폭력성이 나타날 수 있다고 하였으나, 아버님은 공격성과 폭력성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감정 기복이 심해질 수 있다고 하였으나, 아버님의 감정엔 그저 느리고 차분한 클래식이 흐르는 것 같다. 교수님은 보아왔던 치매환자들과 다른 양상이라며 고개를 갸웃거리신다. 치매가 시작되고 몇 년이 흐른 지금도 같은 증상이 느리게 머물고 있다.


아버님의 시계는 멈추었고 눈빛은 한없이 느리며 온화하게 빛을 타고 흐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를 쳐다볼 때의 눈빛은 다르다는 확신, 다른 사람을 느리게 쳐다보다가도 아이들이 가서 종알거리면 고개를 천천히 돌려 아이의 세계를 담으신다. 마치 온 힘과 마음을 다해 아이를 쳐다보시는 듯하다. 미소를 지으시며 아이에게 고정시킨 눈에는 한없는 애틋함이 담겨있다. 모든 걸 다 기억하시는 것만 같다. 한 문장만 말씀해 주시길, 한마디만이라도 하시길, 대답만 해주시길, 우리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연신 말을 건다.


"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옛날에 서예를 매일 쓰고 계셨잖아요. 한자 가르쳐주세요."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그림을 잘 그렸어요. 박에다가 새우도 그려 주셨는데 그거 우리 집에 있어요. 또 그려주세요."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써준 우리 집 가훈 액자에 담겨 있어요. 생각나요?"

"할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 대답 좀 해봐요."

"할아버지 그럼 알겠으면 고개를 끄덕여봐요. 자 봐요 이렇게요!"

"아 할아버지 자꾸 웃고만 있지 말고요. "

"할아버지 귓밥이 많네. 으 털도 있다. 내가 파줄까요? "

"할아버지 여기 앉아요. 할아버지 나랑 바둑 할래요?"



장난기 많은 손자는 할아버지를 움직이게 하려고 간지러움을 태우며 반응을 살핀다. 아버님은 활짝 웃으신다. 초등학생 아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몸을 만져드리며 친밀감을 표한다. 아무리 물어도 대답이 없으신 할아버지에게 거리를 두지 않고, 눈을 맞추며 내내 장난을 치는 손주 덕분에 아버님은 한참을 웃으셨다. 만개한 봄꽃처럼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으시다가 다시 미소를 머금으시며 아이들을 지켜보신다.

어른인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무수한 행복이 터져 나왔다. 계산하지 않고 마음을 다루는 아이들만의 비법. 기어이 아버님은 노래도 부르신다. 아버님이 감정을 드려내고 표현하시는 유일한 방법이 노래인 것 같다. 의사표현은 쉽지 않지만 노래는 잘 기억하고 부르신다. 그 옛날 노래들이 멈춘 기억을 되살려, 거슬러 흘러나온다.


치매환자를 위해 병원에서 해줄 수 있는 건 환자의 합병증의 유무에 따라 약을 조절해 처방해 주는 것과 적절한 조언뿐이다. 정기검진을 가면 의사가 해주는 말은 비슷하다. 지금 상태에서 호전되기는 어렵다. 꾸준히 손과 머리를 써야 하는 취미를 조금씩 하면 좋다. 걷기 운동은 매일 하고 처방약은 하루 세 번 꼭 드시게 해라.


아버님은 당뇨가 있으시고 소화기능도 떨어지셔서 그에 따른 약을 함께 드시고 있다. 작년에 몇 달간은 표정이 내내 어두우시고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강해져서 산책을 하다 담배 피우는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일들이 생기곤 했다. 요즘 사람들은 노인의 조언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기에, 길에서 담배 피우는 이에게 한소리를 하거나 마땅치 않게 쳐다보는 노인이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일에 무심한 듯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며 있으시다가도 어긋난 규칙이나, 매너가 없는 사람들은 그냥 넘어가지 못하셨다. 난처한 상황이 생길 때마다 가서 보호자는 죄송하다는 말씀을 건네지만, 실은 하나도 죄송하지가 않다. 모두 맞는 말씀만 하셨기 때문이다. 담담 교수님은 강도가 센 약 때문일 수도 있다며 약을 줄여주셨는데, 용량이 적은 약을 드시면 의식이 먼 구름 사이로 들어가는 느낌으로 멍해지셨다. 이래도 쿵. 저래도 쿵. 정답이 없기에 아득하고 적막하다.


부모님과 함께 이야기 나누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 웃음을 터뜨리는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귀한 순간이다.


다만 우리는 웃는다.

슬픔 속에도 웃으며, 사랑을 전한다.


keyword
이전 10화읽으며 우는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