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하는 마음의 키
"엄마, 내가 새벽에 깼는데 너무 예뻤어. 해가 뜰 때는 하늘의 색이 그라데이션 되잖아. 물감으로 어떤 색을 쓰면 될지 한참을 보고 있었어. 정말 예쁘고 황홀했어."
아이는 부스스한 머리에 말랑하고 보드라운 얼굴 근육을 들썩이며 싱긋 웃었다. 작은 입으로 종알종알 새벽을 이야기하며 반짝이는 눈빛이 감동을 대신 전해주는 듯했다. 이야기를 하고도 아쉬움이 남는지 연신 생각을 되살리려 애쓰는 기색이었다. "음... 그리고 잠깐만, 또 생각한 거 있었는데... 뭐였더라. 아아아 적어둘걸! "
마음이 정중앙에 있을 때 쓸 수 있다면, 그릴 수 있다면, 표현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찰나의 마음은 보란 듯이 스친다. 좋은 것은 종종 그렇게 지나가 버리기도 하지.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다가.
새벽에 깬 너는 더 이상 잠결에 엄마를 찾지 않고, 홀연히 찾아온 고요한 시간도 즐길 줄 아는 나이가 되었구나. 어슴푸레 밝아오는 새벽의 아름다움을 향유하며 아이는 깨어있었다.
모두가 잠든 시간에 홀로 깨어있는 힘은 결코 작지 않아서 아이는 그저 새벽에 깼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지만 나는 차오른 뭉클함이 쉬이 가라앉질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깜깜한 새벽에 잠이 깨면 안방 침대로 와서 품을 파고들던 아이였다. 나는 새벽에 찾아온 아이를 꼭 안고 다시 잠이 들거나, 이불을 꼼꼼히 덮어주고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곤 했다. 품을 파고드는 아이의 어리광이 달았다. 제법 커서 안방에 오지 않는 날들이 늘어나며 어떤 날엔 내가 아이의 침대로 슬며시 가서 꼭 안아주며 잠들기도 했다. 덩치가 커져서 침대가 좁아지면 그마저 못할까 아쉬움이 밀려와 쑥쑥 커가는 아이를 품에 꼭 안고 토닥이고 있노라면 남편이 와서 기어이 한마디를 던진다.
" 신생아 재우는 거야? "
한 번은 새벽에 안방으로 찾아온 둘째 아이를 어루만지며 자고 있었는데 남편의 키득거리는 소리에 깨어보니 글쎄! 내 손이 남편의 발을 어루만지고 있는 것이었다. 왓?!! 빛의 속도로 발을 던지듯 뿌리치고 깜짝 놀라서 쳐다보니 하는 말이 가당찮다. 너무나 정성껏 아이를 쓰다듬길래 장난을 쳐봤다고... 나도 그렇게 안아달라고...
푸 하하하하하하! 저 리 가!
시답잖은 농담을 하는 아빠가 귀엽다고 아이들은 한바탕 웃음꽃이 피었다. 덕분에 다같이 한참을 웃었다.
아기 때는 남들 다한다는 통잠이 왜 안 되는 건지, 리드미컬하게 깨어 울던 아이를 재우느라 밤을 꼴딱 새웠던 기억이 선연하다. 유모차를 태워 거실을 뱅뱅 돌고, 아기띠도 했다가, 가만히 누워 토닥토닥거리다가, 도무지 잠들 기색이 없는 아이를 카시트에 태우고 동네를 한 바퀴 돌면 어김없이 아이는 잠이 들었다. 조심스레 안고 침대에 눕히면 눈을 말똥말똥 뜨고 쳐다볼 땐 그야말로 '식겁 대잔치'였다. 개운하게 한잠을 자고 일어난 아이의 눈빛은 초롱해지고 남편과 나의 눈은 초점을 잃어갔다. 누구보다 많은 육아서를 읽었노라 자부하며 정답을 줄줄 외워봤자 현실은 다르다. 새벽에 일어나 출근하는 남편은 재우고, 아이는 재우지 못했던 무수한 밤이 지나갔다.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이 그렇듯 추억이 되어 애틋해지기에 홀로 지샜던 모유수유의 밤은 고통은 걸러진 채 찐한 모성의 추억으로 가라앉았다. 지금은 알겠지만 그때는 몰랐던 것들은 시간과 함께 내가 성숙해서 알게 된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서 벗어나 먼 곳에서 감정을 배제한 채 차분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언어영역 공부를 할 때 수없이 들었던 말,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봐라.' 그 말은 인생을 독해할 때도 필요했다. 막상 어떤 상황에 부닥치면 눈앞의 나무에 급급할 수밖에 없지만 조금씩 나무 사이를 걷다 보면 어느새 눈앞에는 커다란 나무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숲을 이루고 산이 된 절경이 나타난다. 작은 벌레 하나에도 기겁하며 오르던 마음이 겸연쩍을 정도로 작게 보이는 세상은 평온해 보이기만 하다.
글을 쓸 때도 그렇다. 생각 없이 걷다 보면 소재가 방울방울 떠오르고, 쓰고 싶은 마음들이 글로 변해서 머릿속으로 흘러든 기분이 든다. 생각을 이어가며 서둘러 집으로 와서 노트북을 펼치면 문득 생각이 고요해진다. 넘실거렸던 글들은 잠잠해지고 꼬리를 물던 생각들은 어디로 갔는지 당최 보이지가 않는다. 시작과 끝을 쫓아가 보려 하지만 중간중간 뚝뚝 끊어져서 찰기라곤 없어져버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소중한 순간을 온전히 느끼고, 살피며, 기록하려 애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주 더디게 생각이 정리되어 마음이 잔잔해지면 그제야 조심스레 꺼내어서 펼쳐본다. 책사이에 끼워둔 낙엽처럼 바스락 거리는 마음들을.
새벽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감동한 첫 번째 마음들이 오롯이 떠오르지 않아도 괜찮아. 불현듯 다시 떠오를 때가 있을걸. 가령 네가 두 번째로 새벽의 그라데이션과 함께 깨었을 때 말이지. 그때 마음을 적어두고, 그라데이션이 황홀한 색감을 그리고, 글을 쓰렴. 또 시간이 모자라면 뭐 어때. 세 번째로 깨면 되지!
내 인생은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는 삶이었다. - 이어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