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한 겨울

소박한 새벽의 기쁨

by 예담


"거의 다 왔어. 이제 일어나."


멀미의 여파로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뜨면 창문에 서리가 맺혀있었다. 언제나 검지손가락으로 글씨를 쓰며 잠을 깨우곤 했다. 그림을 그렸다가, 이름을 쓰다가, 생각나는 단어를 쓰다가, 신호가 오래 걸린 어느 날에는 길게 마음을 써보기도 했다. 창문을 열고 맞은 차갑고 상쾌한 공기에 정신이 번뜩 들면 겁부터 더럭 났다. 큰아버지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때문이었다. (강아지를 귀여워하며 무서워했고, 여전히 좋아하면서도 두려워한다. 거슬러 올라가면 유치원시절 개에게 물릴 뻔했던 기억으로 시작되어 국민학교 등하굣길에서 마주치곤 했던 동네개들과 대치하며 느꼈던 트라우마랄까. 지름길 모퉁이에 강아지가 앉아있으면 다시 오던 길을 뱅뱅 돌아 먼 길을 택했다. 개들이 목줄 없이 활보하던 시절이었다.)


아무튼 초중고 유년시절, 추웠던 겨울의 기억은 설날과 함께 시작된다. 설렘과 어색함 사이에서 쭈뼛거리다 어느새 동화되어버렸던 마음. 두렵지만 다가가고 싶은 마음. 실감 나지 않는 새해의 시작은 흩날리는 눈발처럼 가볍고 자리 잡지 못한 마음들이 떠돌았다. 코끝이 시리고 추운 계절이 오면 의식과 무의식의 어느 경계에서 이 기억이 찰랑거린다.


겨울에 태어났으며 추운 계절을 애증 했다. 보드라운 니트와 예쁜 코트를 입을 수 있어서 , 쟁반 가득 귤을 담아와서 따뜻하게 책을 보는 시간이 아늑해서 좋아했고 춥고 고독한 풍경이 쓸쓸해서 싫어했다. 추위에 취약한 차가운 손을 비비며 발엔 두꺼운 양말을 신고 동동거리는 겨울의 나는 분주하다. 여러 겹의 옷을 껴입고 발걸음을 재촉하는 겨울의 거리는 머물지 않아 황량하지만, 그리하여 길 끝에 도착한 어느 곳에서 곱절의 따스함을 음미한다. 겨울은 고요하고도 소란하다. 춥기에 따뜻함을 느낄 수 있고, 마음이 고독해지기도 하고 충만함으로 가득 차오르기도 한다. 한 계절에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한해의 끝과 처음을 품고 있어 특별한 마음이 드는지도 모른다.


겨울이 되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한여름밤 벌컥벌컥 마시던 맥주의 풍미와 청량함은 접어두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뜨거운 차 한잔을 홀짝거린다. 남편과 겨울밤 따뜻한 사케를 즐겼던 날들이 언제였던가! 아이들이 새근새근 자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말똥 한 정신에 더 진하게 색을 입혀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애주가는 술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다. 취하지 않고도 (무언가에) 취할 수 있는 시간이 좋아졌달까. (하지만, 최상의 길티플레져인 여름밤의 맥주는 못 참지. )


조용히 다른 세계에 빠져들기 위해 책을 읽는다. 오늘을 정리하기 위해 다이어리를 끄적이며 내일을 준비하기도 한다. 사야 할 것들을 메모하다가 선택의 기로에서 비교분석을 하느라 시간을 허비할 기미가 보이면, 가차 없이 빠져나와 베이킹에 몰두한다. 넷플릭스를 켜두고 뜨개질을 하며 에너지를 충전한다. 그렇게 가득 충전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면 노프라브럼이 된다. 원래 사람이 가장 행복함을 느낄 때는 무언가에 흠뻑 빠져 몰입하는 순간이라 했다. 그렇다면 무엇이든 몰입할 수 있는 사람은 왕왕 행복감을 느낄 것이다. 작은 행복이 음악처럼 흐르고 있어 중간중간 툭 튀어나오는 소음에 이유를 물어 마음을 멈추고 싶지가 않다.


어둡고 찹찹한 겨울의 아침엔 보리와 옥수수, 작두콩차를 번갈아 섞어가며 끓인다. 주전자가 아닌 커다란 유리냄비에 끓이는 이유는 선명히 존재감을 드러내는 뜨거운 김과 보글보글 춤을 추는 동그라미의 소리가 좋아서이다. 하루동안 마실 물을 한가득 끓여 한 김 식혀서 각자의 보온병에 담아 넣어주고 남은 물은 유리병에 담아서 식탁에 올려둔다. 그리고 뜨거운 차에 냉수를 조금 부어 음양수를 마신다. (음양수는 대류현상이 일어나며 기운이 섞일 때 마시면 체내 순환을 도와주며 이로운 작용을 한다고 한다.)


히 잠들어 있는 사랑하는 이의 모습은 애틋하다. 다양한 모양으로 부스스한 이불을 가지런히 끌어당겨 덮어주며 괜히 머리를 쓰다듬어 본다. 손의 찬기운에 잠이 깰까 싶어 차마 얼굴은 만져보지 못하고 살금살금 10분이라도 더 재우려 조심스레 아침을 걷는다. 한기 속에 따뜻한 내음을 느끼며 잠에서 깬 남편과 아이들이 겨울아침의 한기 속에 아늑함을 느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은 겨울아침을 달게 한다.


겨울의 새벽은 소박하게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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