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는 실패했다.

아이의 감정일기

by 예담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저녁밥을 먹던 아이가 불현듯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는지 목소리를 드높였다.


요는 이렇다. 만들기 시간에 유리테이프를 다 써서 같은 모둠 친구에게 빌려달라고 했는데 싫다고 했단다. 친하지 않은 친구거나 장난기 많은 남자 친구였다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겼을 텐데. 이 친구는 예상을 빗나갔던 거다. 단호한 거절에 아마도 아이는 무안해졌을 테다. 식탁 앞에 앉아서 아이는 어느새 발그래진 볼로 삼켰던 억울함을 뱉어냈다. 억울함을 뱉어낸 자리에 따뜻한 밥을 한 움큼씩 입안 가득 넣고 오물거렸다. 나는 그저 귀여웠다. 감정의 삐죽거림이 사랑스러웠다.


"나는 @@한 테 색연필도 빌려주고 스티커도 주고 반짝이 펜도 빌려주고 그랬단 말이야. 근데 나는 테이프 빌려달라고 한 거 처음이었는데 왜 안 빌려줘? 지는 안 빌려줄 거면서 나한텐 맨날 빌리고! 나빠! 이상해!"



"많이 속상했겠다. 그래서 어떻게 만들기 완성했어? "


"다른 친구한테 빌렸지 내 단짝 소현이! "



그러다 또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어울려 놀고 삐지며 우애가 돈독해지는 것이 아이들인지라 다독여주고 넘겼었다. 엄마인 내가 친구를 타박하면 아이는 그 친구가 나쁘다고 생각해서 멀리할 수도 있기에 판단은 노코멘트하고 그저 상처 받은 아이의 감정만 토닥여주었다. 속상했던 마음을 동그랗게 문질러주었다.


며칠 뒤, 아이가 저녁 식탁에서 밥을 한수저 가득 퍼서 된장국에 비벼서 야무지게 먹으며 말을 꺼낸다. 우걱우걱 씹으며 덤덤하게 말한다.


" 엄마 있잖아! 사실 내가 복수하려다가 실패했어! 근데 괜찮아"



아이는 컸고 그만큼 마음도 깊어졌다. 나의 위로가 충분하다 느꼈던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엄마가 별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은 확실하다.


"응? 뭐라고?"



위로가 뒤지 못했던 위로가 문득 까무룩 했다.


"내가 예상했거든! 플러스펜을 통째로 들고 가면 분명히 파스텔 색깔을 빌려달라고 하거든! 그래서 들고 갔지! 복수하려고! 나도 안 빌려주려고! 근데... 빌려줬어... 연보라색! 복수 실패야. "


복수를 다짐하고 아이는 플러스펜을 가방에 넣었단다. 야심 차게 꺼내서 보란 듯이 그림을 그렸고, 아니나 다를까 그 친구는 빌려달라고 했는데... (꿀꺽, 내가 그럴 줄 알았지! )라고 통쾌해하며 입을 앙 다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단다.


작은 제스처를 알아보려면 결이 비슷해야 한다. 어른도 결이 비슷한 이들끼리는 작은 감정도 통한다. 그렇지 않은 이들은 큰 목소리와 손짓에도 모른다. 모른척하는 것이 아니라 살다보면 정말로 모르는 마음도 있더이. 성향이 다른 이들끼리는 이해가 힘들듯이.


아마도 결이 다른 친구였을 터. 절레절레 고개를 연신 흔드는 아이에게 그 친구가 연거푸 물었단다.

"연보라색 써도 돼? 응? 써도 되냐고요? 어? "


"으...응... 써도 돼! "



절레절레 힘을 다해 젓는 고갯질을 못 본 건지 못 본척 한 건지, 결국 아이는 "싫어"라는 한마디를 내뱉지 못했다. 복수하려고 어젯밤 야심 차게 가방에 넣은 파스텔색 플러스펜은 복수의 총알이 되지 못했다. 연보라색의 부드러움을 뽐내며 녹아버린 소프트 아이스크림처럼 사라져 버렸다.



"복수하려고 했는데 못했어. 싫어라고 말하면 @@이가 마음 아플 것 같아서 못했어. 나도 그 말 들으면 엄청 기분 나쁘거든. 그래서 말 안 했어. 그냥 빌려줬는데 괜찮아! 이제 "



아이의 말을 들으며 마음이 몽글몽글 해졌다. 속상한 마음에 벼르다가 이제 나도 안 빌려줄 거라 다짐했는데 막상 그 순간이 오자 속상했던 자신이 생각나서 친구에게 그 말을 내뱉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보다 친구의 마음이 먼저 읽혔다. 그래서 복수는 실패했다.



"그런데 괜찮아! 내가 만약에 진짜로 안 빌려줬으면 기분이 찝찝했을 것 같아! 엄마 나는 빌려주는 게 더 편해! "

아이는 괜찮다고 한다. 복수를 실패해서 다행이고 편하다고 한다. 스스로 상처를 마주하고 보듬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가 아닌, "그럴 수 있지."

예전에 하트시그널이란 프로그램을 보면서 인상 깊었던 말이다. 그럴 수 있지. 음. 그럴 수 있어.

오영주라는 출연자가 상대방에게 잘 썼던 말이었다. 상대방이 이성과 달리 움직이는 감정에 대해 토로하면 가만히 들어주다가 "음.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어."라고 응수했다. 가만히 들어주는 진지함도 좋았고 듣고 나서 "어떻게 그럴 수 있어?"가 아닌 "그럴 수 있지." 그녀의 이해와 공감은 진중하고 잔잔했다. 그래서 예뻤다.


너는 절대 그러면 안된다는 세상, 내가 손해 보면 큰일 난다는 세상 속에 나도 동화되려 할 때마다 멈칫한다.



그럴 수 있지. 우리는 로봇이 아니니까.

네가 하나를 받아도 다섯 개를 줄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열개를 주었는데 아무것도 못 받는다면 서운하지. 서운하지만 떳떳하잖아.

그럴 수도 있지. 복수하고 싶었던 마음도 서운했던 마음도 무안했던 마음도 그럴 수 있지.

열개를 줄 때 열개를 받으려고 주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주고 싶어서 주었는데 내 손엔 아무것도 없으면 또 막상 기분이 나빠. 그럴 수 있지. 아마 친구도 그럴 거야. 주곤 싶은데 줄게 많이 없을 수도 있어. 그래서 마음이 바스락 거릴 수도 있지 않을까.


공원에 가서 낙엽진 나무 근처에 툭 하고 앉으면, 바스락 거리며 낙엽이 소리를 낸다. 툭툭 털고 일어나서 낙엽들을 만져보면 덜 마른 낙엽들, 바스락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낙엽들 제각각이야. 그래도 다 이쁘잖아.



물론, 엄마는 언제나 네가 제일 예쁘지만 말이야.




관계가 어려운 너에게.

언제나 진실하고 너그럽게 행동할 것.
손해 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작은 약점들을 적당히 눈감아 줄 것.
사소한 약점 하나로 그 사람 전체를 파악하려고 하지 말 것.
마음을 넓게 갖고 자신을 위한 여지를 남겨놓을 것.

선량한 사람은 상대의 이익을 위해 잘해주고, 소인배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친절을 베푼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한 너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