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준비하며

알음알음 깨닫게 된 사소함들

by 예담

이사 준비로 설렘과 긴장의 어느 중간쯤에서, 달콤한 노곤함과 씁쓸한 피로감을 동시에 맛보고 있다.

선택해야 할 것들이 수없이 많은 시작점에서 주저앉아버리고 싶은 순간이 더러 있었다. 아. 차라리 엄마 잔소리를 들으며 뒤따라가던 시절이 좋았었나 싶기도 하고.

어른이라 선택의 자유를 가졌고, 그 자유에 책임을 져야 하는 계급을 달았다. 아이스크림 31개 중에 하나 고르는 일과는 차원이 다른 어른의 선택이란,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어른에겐 때때로 버겁다.

난! 자모카 아몬드 훠지! 이러고 말고 싶은데 말이지.


이사를 준비하며 시나브로 깨닫게 된 사소함 들을 가만히 기록해본다.


1. 되도록 해가 잘 드는 시간에 집을 보여주고, 집을 고를 때도 나의 생활패턴을 고려해서 방향을 정할 것.


정남향은 해가 쨍하게 드는 맑은 날이면 아무래도 상관이 없겠지만, 남동향은 오전, 남서향은 늦은 오후 해가 넘어갈 때 쯔음! 요즘은 거의 대부분의 아파트가 타워형으로 남동 남서가 많다. 앞이 다른 동으로 막혀있거나 뷰가 그다지 좋지 않으면 블라인드를 반 정도만 오픈해 놓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집 보러 오는 시각이 대부분 오후인 것을 감안하면 정남향, 남서향이 밝아 보여서 호감이 되는 것.


우리 집은 정남향에서 약간 동향 쪽으로 기울었기에 오전이 해가 쨍했고, 집을 보러 오는 시간은 대부분 오후 해가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아! 마지막에 집을 사신 분은 오전에 안방 침대로 햇살이 쏟아질 때 오셨던 분.)


아침형인 사람은 이른 아침에 뜨는 해가 눈이 부신 남동향(동남향)이 좋을 것이고, 늦은 오후에 거실에서 머무는 시간이 긴 사람은 지는 노을이 비추며 늦은 오후에 깊숙이 해가 들어오는 남서향(서남향)이 좋을 것이다.


지는 노을을 황홀해하는 나는 남서향을 선호하지만, 아쉽게도 이사 갈 집은 남동향이다. 뜨는 해에 감사하는 아침형 인간이 되어보기로!



2. 무례한 사람에 대한 스트레스는 접어둘 것.


그런 사람이 있다. 몇 번은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감정을 이입시켜보았지만 정말이지 이해가 안 되는 그런 사람. 기본적인 시간 약속이나 예의를 지키지 않아 묘하게 기분 나쁜 사람을 마주할 때면 시간이 지난 뒤에 화가 치밀곤 했다. 내향인인 나의 에너지를 아끼기 위하여 설렁설렁 대하기 시작했다. 넘는 선을 침범하지 말라며 버럭 하는 대신에 시선을 거두어 버리는 것이었다. 어차피 다시 만날 인연이 아니므로.



3. 작은 호의를 늘 지닐 것.


챙겨야 할 자잘한 일들 속에 사소한 마음들마저 매몰되지 않도록 귀를 기울이려 했다. 끝이 있어 시작이 있고, 순간이 있어 삶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작고 부서지는 순간들은 더없이 찬란하다.

시간이 흘렀을 때 조금 더 선명한 삶의 결은 언제나 선의가 있었던 순간이었다.


나의 방이 처음 생겼던 유년시절을 생각해본다. 엄마가 처음 사준 동그란 거울이 달린 화장대에 입꼬리가 연신 올라가 내려올 줄 몰랐던! 마냥 들뜬 나의 분홍빛 얼굴 뒤에 엄마의 노고가 이제야 보인다. 내가 얻게 된 그 모든 설렘과 기쁨을 예단하고 종종거렸을 엄마의 고단함을 어린 나는 알지 못했다.

많은 날들이 지나고, 당연함은 애틋함이 되어간다.


그렇게 낡고 빛바랜 순간들을 추억하고 보듬는다. 잘 닦여진 순간들은 도자기처럼 빛이 나 대대로 물려 전해질 지도 모르니까. 내가 물려주고 싶은 다정한 순간들을 떠올려보며, 되려 설렘을 선물 받는다.

어쩌면 지금도 내가 알지 못하고 받고 있을 어떤 마음이 있겠지. 뒤늦게 알게 되는 마음은 잡을 수 없어 더 소중하고 슬프다. 끝과 시작이 주는 작은 긴장감은 아마도 그런 것일까.


자잘한 마음들을 기억해야지. 먼저 선의를 가지도록 애써야지. 아무튼 사랑하기 좋은 계절이라서 다행이다.



4. 이해관계의 홍수 속에 균형을 잡을 것.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집. 돈줄이 되어주는 집. 삶의 위로가 되어주는 따스하고 편안한 집. 보여주고 어깨를 으쓱하기 위한 집. 손님이 많은 집. 감추는 게 많은 집. 깜깜한 밤이 되면 나를 보듬어 주는 집. 환한 아침이 되면 나의 민낯을 그대로 비추어 주는 집. 투명한 펜스를 치고 비밀번호를 누르라며 눈을 치켜세우는 아파트. 누구든 함께 어울리자 하며 눈꼬리를 내리며 순하게 웃는 아파트.


어떤 집에 살고 싶나요? 어떤 집에 살고 있나요?


사람들은 입주민 카페에서 득과 실을 따지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하자가 있었다. (새 아파트가 으레 그렇듯.) 처음에는 시공사에 대한 불만으로 한입을 맞추었던 입주민들은 점점 갈라지기 시작했다. 조용히 해결하길 원하는 사람들, 빨리 해결해주길 원하는 사람들, 불편함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 불편함을 참고 재산을 지키려는 사람들, 미적지근한 답변에 참다못한 입주민이 지역신문에 터뜨리고 말았고, 아파트의 가치를 지키며 올리고 싶은 입주민들은 분노했다. 이기적인 처사라고 입주민 카페에서 화를 내고 비아냥거리며, 기사를 내리기를 재촉한다. 삼삼오오 우리 집은 하자가 전혀 없다는 반전의 댓글이 넘쳐난다.


이사 준비로 설렜던 마음에 찬물을 뒤집어썼다. 시작도 안 했는데 머리가 지끈해왔다.

지켜야 할 것들이 많아서 고달픈 사람들, 그 속에 온전히 행복한 순간은 얼마나 될까.

나의 가치보다 집의 가치를 지키고 돌보는 사람들을 보면 '워킹데드'가 떠오르곤 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며, 지키기 위해 공격할 수밖에 없었던, 불안이 잠식된 마음으로 무너져갔던 사람들, 그리고 그럼에도 절망 속에 희망을 품던 사람들. 결국은 마음먹기 나름이다. 우리는 워킹데드가 아니니까, 조금은 너그러웠으면.



우리의 삶을 추억할 수 있음은 결국 작은 빈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서로의 말을 들어주고 끄덕여줄 때 빈틈 속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우리는 완벽하지 못함 속에서도 오롯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마치 여행 같은 청량한 두근거림을 가득 안고, 방울방울 맺힌 긴장과 불안을 톡톡 터뜨려가며 이사를 준비하며, 다시 노프라브럼!





인생과 여행은 그래서 신비롭다. 설령 우리가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하고, 예상치 못한 실패와 시련, 좌절을 겪는다 해도, 우리가 그 안에서 얼마든지 기쁨을 찾아내고 행복을 누리며 깊은 깨달음을 얻기 때문이다. [여행의 이유]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여행의 이유]


뜻을 이루기 위해 길을 찾는 것도 훌륭하지만, 이 길에서 뜻을 찾는 것도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하고 말이죠. 그 이후로 비로소 남들의 길이 아니라 내 안의 길에서 뜻을 찾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때부터 길은 조금씩 고분고분해집니다. 꽃으로 수를 놓아 향기를 더하기도 하고, 그늘을 드리워 땀을 식혀주기도 합니다.

끝이 있는 잣대로 감히 끝이 없는 것을 재어가며 떨던 건방이 멈춰지자, 그제야 비로소 내가 길을 만든 게 아니라 길이 나를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감이 익을 무렵이거든요.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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