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보내야 할까?

And smile

by 예담



확진자수가 연일 증가하고, 세상은 암흑에 빠진 것만 같다. 파스텔빛 희망을 품고 있다가 절망이 스멀스멀 올라와 회색빛으로 마음을 물들인다. '슬픈 영혼은 병균보다 더 빨리 목숨을 빼앗아간다.'라고 했던가. 끝이 없을 것만 같은 답답함을 뒤로하고 찬바람을 맞으며 걷는다.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서둘러 마음을 환기시킨다. 겨울의 좋은 점은 이거지! 마음까지 시릴 만큼 차가운 바람이 정체되었던 정신을 일깨워 준다는 것.




아이의 학교는 전면 등교를 하고 있다. 작년에는 밀집화를 줄이기 위하여 일주일에 2번 등교를 했지만, 학년이 돌아가며 일주일에 두 번씩 등교를 했기 때문에 목적은 허울이 되었다. 같은 학년은 모두 함께 등교를 하는 셈이니 한층과 한 반에 아이들이 몰려 있는 것은 매한가지다. 다만 등교나 하교 시에 아이들이 몰리지 않을 뿐인데, 그것 또한 저학년과 고학년은 마치는 시간이 다르니 크게 효과가 있을까. 그저 말장난일 뿐.


현장에서 교사의 고충을 위한 거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선생님이 하루에 두세 번 나누어 수업하기는 힘들 터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회의를 통해 다른 안을 만들 수는 없는 걸까? 이를테면 반 아이들을 3그룹으로 나누어 등교와 온라인을 병행시키는 것. 그것이 어렵다면, 같은 학년을 몇 반씩 나누어 등교를 시켜 한층의 인원을 줄이는 것. (왜 한층의 인원을 줄여야 하냐면, 화장실에서 아이들은 만난다. 특히나 여자 아이들은 화장실에서 속닥거리기를 즐긴다. 식사 후 양치도 하지 못하게 하는 상황에서 쉬는 시간마다 화장실에서 밀접 접촉이 이루어지고, 확진자가 나온 반만 pcr검사를 하게 하면 무슨 소용인가. 다음날엔 다른 반인데.)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적절히 분배하고 숙제와 수업을 체크해나가려면 그것도 말이 쉽지. 업무가 어마무시할 것이다. 입장을 바꿔 곰곰이 생각해보자면 학교의 입장이 백번 이해된다. 내 입장이 먼저여서 늘 문제지...


해는 바뀌었지만 별로 새로울 게 없는 교육부의 계획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지만 딱히 기대가 없어서인지, 아님 내성이 생긴 건지 그러려니 한다. 얼마 전에 발표된 새 학기 일주일에 두 번 자가 키트 검사는 정말이지 어메이징 했다.




12월에 겨울방학을 했고, 1월에 개학을 한 아이는 영어교실에서의 밀접 접촉으로 인해 두 번의 검사와 한 번의 자가격리를 했다. 보건소에서 길고 긴 줄을 서서 검사를 받으며 아이들은 인내했다. 몹시 추웠고 두 시간 정도를 기다려야 했지만 아이들은 불평하지 않았다. 힘들지 않아서 짜증 내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인지하였기 때문이다. 아이는 불안해했다. 긴 기다림이나 코로나 검사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길어진 줄에 민감해진 어른들의 짜증과 번호표를 뽑는 것을 잊은 채 줄을 섰다가 다시 뒤로 돌아가게 된 어른들의 고성, 보건소 직원의 차가운 말투, 새치기한 어른들의 말다툼과 욕.

그 모든 것들이 뒤섞인 보건소의 공기는 겨울보다 매섭고 텁텁했다. 욕의 의미는 몰라도 느낌으로 짐작하며 움찔하던 아이들을 보며 미안했다. 검사를 마치고 오는 차 안에서 아이들은 뿔이 솟아있던 어른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바빴고, 그제야 너무 무서웠다는 말을 꺼냈다.


" 왜 어른들은 기다려야 되면 화를 내지? "


기다림은 모두를 지치게 하지만 같은 감정을 드러내진 않는다. 아이들은 기꺼이 기다리며 자리를 뜨지 않고 (그렇지만 한자리에서 파닥거리며) 규칙을 준수했다.


어른은 아이의 인내심을 지레 의심하며 노 키즈존을 만들지만 정작 어른이 참지 못한다는 것을 알까. 두려운 순간이 닥치면 최약의 본성이 드러난다. 어쩌면 그런 순간에 아이들은 어른보다 강하기도 하다.


[모기 뒤에 숨은 코끼리]라는 책이 떠오른다. 누군가에게는 모기, 누군가에게는 코끼리라는 문구와 함께.

모기를 코끼리로 만들면, 감정적으로도 힘들겠지만 현실과 연결 짓지 못한 채 불쾌한 감정 속에 빠져든다. 나아지길 바란다고 나아지는 게 아니라 현실을 살아야지. 이것이 현실이 아니길 바라지만 말고, 화를 낼 대상을 찾아 헤매지도 말고 나의 에너지를 모기에 쏟지 않도록 귀히 여겨가며 삶을 이어가고 싶다.



검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학교 친구들이 줄의 끝에 서 있는 걸 보고 서로 웃어주기도 한다.

"너희들은 왜 웃는 거야?"

"웃기잖아. 푸하하. 진짜 오래 기다려야겠다. "

"그럼 쟤는 왜 웃어?"

"웃기잖아. 우리 다 자가 격리당해서 크크크크크크크"


뭐가 그리 웃기는지 빵 터져서 웃어댄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코를 부여잡고 눈물을 글썽이더니.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우리의 기억과, 기억하는 방식이라는 글을 읽고 다이어리에 급히 적어둔 적이 있다. 그렇지. 같은 일을 두고도 우리의 기억은 모두 다르니까. 큰 행복을 껴안고도 모른 채 또 다른 행복을 꿈꾸며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을 스치는 이는 행복과 하이파이브하는 법을 모른다. 고난 속에서 경직된 마음을 살살 달래 가며 풀다 보면 유머가 나온다. 유연한 마음은 어쩌면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의 벗이 되어주기도 한다.


인생이 엄숙하면 할수록 웃음은 필요하다. [빅토르 위고]



And smile.


워킹데드에서 모든 것을 잃어가며 길의 끝에 서 있는 한 주인공의 대사이다. 죽음의 공포를 목도하고 두려움에 떠는 이들에게 그는 말한다. 나는 슬프지만 걸어갈 것이고, 웃는다.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지만 숨지 않고 나설 것이다. 우리는 이기고 함께 웃을 것이다. 삶의 의미를 함께 찾을 것이다. 앤드 스마일!

극한의 상황이 불러오는 두려움은 이기심을 키우고 도덕성을 약화시키지만 자신의 내면과 싸워가며 삶의 의미를 찾아간다.


아이들이 배워야 할 사회성과 도덕성은 아마도 지금 이 시기에 확립되고 있을지 모른다. 두려움 앞에서 당당하고 서로를 다독이며 마음의 평정심을 찾는 과정, 불안함에 잠식당하지 않고 기쁨을 찾아내며 복합된 감정들 속에서 나누는 대화들이 얼마나 찬란한지. 팬데믹으로 인한 학습부진을 염려하고 있을 때도 아이는 성장하고 있다. 인내를 통해 배우는 무수한 부산물들은 비단 당장의 학습에 비할바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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