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끗 차이
우리 집 아이들이 매일 해야 하는 일이 하나 있다. 학원 가기도 수학 공부도 아닌 글쓰기이다. 하루의 끝에서 일기를 쓰는 것! 어떤 날은 상상일기를 쓰거나 소설을 쓰기도 한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생각을 하고 몰입하며 이야기에 빠져드는 순간이 중요하기에 우리는 매일 그 시간을 꽤 소중히 다룬다. 오래전부터 가지던 루틴인지라 이젠 양치하듯 습관이 잡혀있다. 그리고 내가 지켜왔던 (앞으로도 지켜나갈) 규칙은 '돈터치! 렛잇비!'
아이가 쓰는 글의 맞춤법과 내용을 지적하거나 고치지 않는다. 아무리 말하고 싶더라도 꾹꾹 삼킨다. 아이의 글을 통해 마음을 보려 한다. 마음은 지적받거나 고치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아야 더 넓고 깊어질 수 있는 곳이기에 감히 지우개를 들이밀지 않는다. (가르쳐주고 싶은 부분이 있으면 메모해두었다가 며칠 뒤에 국어공부를 할 때 메모장을 꺼내어 티 안 나게 슬쩍 알려주기도 한다.) 글쓰기가 국어공부가 되면 부담감이 생기지 않으리 만무하고, 틀리지 않는 글을 쓰기 위한 아이의 마음은 숨이 차오르고 말아서 마음을 툭 내려놓고 쓰기 어려워진다. 점수가 있는 글 대신 마음이 있는 글을 쓰도록 그저 렛잇비!
샤워를 하고 나와서 개운한 기분으로 주스 한잔을 들고 아이들은 책상에 앉는다. 알려주지 않았지만 쓰다 보니 아이들은 절로 알게 된 것 같다. 마음이 평온하고 기분이 좋을 때 생각이 뭉게뭉게 피어나고 좋은 글이 나온다는 것을. 마음을 정리하며 느끼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감을. 오늘의 내가 소중해지는 진귀한 경험을.
"있지. 나중에 너희가 더 자라면 말이야. 기분이 좋지 않을 때나 무언가를 실패해서 아무하고도 말하고 싶지 않을 때 말이야. 반대로 그럴 때 글을 쓰면 마음이 평온해지며 정리되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단다. 글을 쓰며 마음이 치유되었으니 이미 좋은 글이 되었을 거야. 그러니 매일 얼굴을 세수하며 매만지듯이 마음도 정리하며 매만졌으면 좋겠어."
허락받고 올리는 일기들.
정제되지 않은 보석 같은 문장들이 널뛴다. 책을 읽으며 좋은 구절들에 인덱스를 붙이거나 필사를 하는 것처럼, 아이들의 글을 모은다. 어떤 날은 가만히 적어보기도 하고, 또 다른 날은 몇 번이고 천천히 되뇌어 보기도 한다. 아이의 글에는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어서 갓 구운 빵처럼 기분 좋은 냄새와 따뜻함이 피어난다.
dana 3월 25일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부를 때는 읽을 때 혀가 꼬일 뻔했다. 오늘 열심히 공부한 내가 너무 자랑스럽다.
dana 3월 28일
벚꽃이 분홍빛으로 물들여져 있어서 마치 딸기 팝콘 같았다.
dana 4월 7일
주말은 비행기를 타고 오나 보다. 5일 동안 오지 않았잖아. 토요일아 일요일아 우리 집에 두밤만 자고 가니? 평일이처럼 다섯 밤 자면 안 될까?
dana 4월 15일
우리 모두 코로나 방역수칙 잘 지키고 마스크 꼭 착용하고 손소독제 하고 잘 지키기. 그러면 좀비 바이러스가 와도 잘 살 수 있다.
dana 4월 17일
이천장을 자른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해서 무섭다. 하지만 잘 견딜 수 있을 것이다. 도전하면 되는데 뭐가 대수야? 그냥 바로 끝내버리자. 엄마는 우리도 낳았는데! 도! 전!
dana 4월 22일
오늘은 지구의 날이다. 나는 지구를 사랑하기 때문에 불을 끄고 있었다. 지구가 아프지 않고 건강하고 깨끗하면 좋겠다.
dana 4월 26일
오늘은 글쓰기 대회에 나간다. 두근대는 마음을 안고 글을 적는 것은 꽤 재미있다.
dana 4월 27일
깜짝 놀랐지만 일단 마음을 침착 모드로 바꾸고 엄마에게 톡을 보냈다.
dana 5월 9일
곰탕집에 갔다. 문이 완전히 활짝 열려 있어서 시원했다. 고기는 부들부들하고, 짭짤하고, 담백하게 맛있었다.
dana 5월 10일
오늘은 내가 엄마에게 혼이 났다. 나는 반성하고 잘못했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냥 말 안 해야겠다. 그 이유는 비밀이다.
dana 5월 15일
은색깔 기다란 스틱으로 이를 아프게 했지만 나는 마음을 꽉 묶고 참았다.
dana 5월 24일
슈팅스타를 손에 들자 신비한 힘들이 내 몸속으로 잔잔히 퍼지는 느낌이 들었다.
dana 5월 26일
데일라? 나는 오늘 참 좋은 친구를 사귀었는데 너는 친구가 있어? 아! 넌 친구가 있지! 바로 나. 나는 너에게 어떤 비밀도 털어놓을 수 있어. 나는 네가 정말 좋아!
( *데일라는 딸아이의 일기장 이름으로 아이가 지어서 부르며 적는다. 아이는 일기를 그만큼이나 아낀다. )
dana 5월 30일
이준이는 우리에게 가지 말라고 울었지. 나도 가기 싫었지만 의젓한 초등학생이니까 웃으면서 이별을 맞이했지. 담엔 더 재미있게 놀아야지.
dana 6월 17일
데일라, 오늘은 할머니가 수술하는 날이야. 너무 떨려. 수술이 잘 되었으면 좋겠어. 나는 오늘 느낀 게 많아. 병실에는 아픈 사람이 너무 많았어. 어떤 한 생명이라도 정말 소중한데, 그 생명이 모래처럼 사라져 가는 게 너무 안타까워. 모두 빨리 나으면 좋겠어.
dana 7월 4일
날씨: 비가 온다. 달팽이 생일인가?
sion 4월 26일
오늘은 내가 공부를 열심히 했다. 열심히 하니까 공부가 재미있어졌다.
sion 4월 29일
오늘을 기억에 남게 하기 위해서 일기를 쓰는 거다. 나의 오늘은 정말 좋았다. 엄마 아빠 사랑합니다.
sion 5월 1일
할머니가 두밤을 자고 가면 좋겠다. 나는 하하 웃고 누나는 씨익 웃을 텐데...
sion 6월 6일
오늘은 현충일이다. 우리들을 위해 싸워주셨던 군인들께 고마운 마음이 든다.
sion 6월 12일
오늘은 비가 왔다. 주르륵주르륵 흐르는 비는 뱀이 기어가는 것 같았다. 내일은 비가 안 오면 좋겠다. 왜냐하면 그래야 산책하러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sion 6월 15일
할머니 수술 잘 이겨내고 오래오래 살고 건강하면 좋겠다.
sion 6월 23일
오늘은 할머니가 가셨다. 너무나 허전하고 슬펐다. 또 할머니가 많이 자고 가면 좋겠다.
sion 7월 9일
오늘은 내 팽이 런처가 왔다. 런처의 손잡이 색깔은 파란색이고 안에 색깔은 투명색이다. 해골 모양이고 좌회전 팽이를 끼울 수 있는 런처다. 팽이 대결은 최고로 스릴이 넘친다.
아직 마냥 귀엽기만 한 초딩의 일기 ^^
너의 오늘이 좋아. 그렇게 하루하루 차곡차곡 마음을 정성스레 모으면 내면이 단단한 사람이 될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