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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예또 Mar 12. 2022

20. 혼나는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7월 한여름의 햇살은 정수리 위로 따갑게 내리쬐고 있었다. 나는 손등까지 덮는 검은색 쿨토시를 끼고 헬스장 회원을 위한 회원용 운동복을 입고 있었다. 한여름에 바깥에서 건물 계단을 오르내리며 전단지를 돌리는 일은 나를 금방 땀으로 흠뻑 젖어버리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하루에도 옷을 한두 번은 갈아입어야 했는데 이사님이 회원용 운동복을 여러 번 바꿔 입는 일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전단지를 돌리던 어느 날, 나는 건물 입구에서 열심히 비밀번호를 찾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비밀번호라 함은 공동현관에 장착된 보안장치의 출입 비밀번호를 의미했다. 내가 근무하던 센터 주변은 사회초년생들이 많이 자취하고 있는 원룸촌이었는데, 세입자가 자주 바뀌는 탓이었는지 택배기사들의 편의를 위해서였는지 건물 입구에 아는 사람만 알아볼 수 있도록 비밀번호를 써두는 일이 많았다. 물론 떳떳한 일은 아니었지만 전단지를 돌리는 게 핵심 홍보 전략이었던 센터에서는 이 방법을 알려주며 우리에게 업무를 지시하였고 나는 거절할 방도 없이 그저 따를 수밖에 없었다.


 몰래 비밀번호를 찾아내 입력하고 들어가거나 세입자인척 출입하는 사람 따라 자연스레 들어가서 전단지를 붙이는 일이 나도 결코 마음에 썩 들진 않았다. 이런 일에 익숙지 않았던 탓에 나는 항상 사람들이 나를 의심할까 가슴을 졸여야 했고 마치 스릴러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처럼 건물을 빠져나올 때까지 날뛰는 심장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우리 집 대문에 붙어있는 전단지를 떼는 일도 성가신데, 나조차도 기피하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해야만 했던 내 심정은 자세히 묘사하진 못해도 상당히 처참한건 확실했다.

 

 나와 함께 전단지를 돌리던 S군은 나에게 많은 팁들을 전수해 주었다. 비밀번호를 잘 찾는 방법, 테이프를 빠르게 떼는 방법, 그리고 전단지를 한 번에 두 장씩 붙이면 일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다는 꼼수까지도. 그는 항상 건물에 들어가면 가장 위층부터 붙이고 밑으로 내려오면서 작업한다고 했지만 나는 초반에 힘들지라도 전단지를 다 붙인 후 위에서부터 한 번에 내려오는 편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건물에 들어가면 아래층부터 작업을 시작했다.


 그때도 아래층 작업을 마치고 위층으로 올라가던 중이었다. 계단을 오르는데 위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들키지 않으려고 잠시 기다렸다가 숨을 참고 발자국 소리를 줄이며 조심스레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계단에서 뗀 시선을 위로 올리자 그곳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가 펼쳐졌다. 팔짱을 낀 채 잔뜩 화난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던 중년의 남성이 그곳에 있었던 것이었다.


 "아가씨,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

 "..."

 "말 안 해? 말해. 여기 비밀번호 어떻게 알고 들어왔냐고."

 "..."

 "당신들 전단지 붙이지 말라고 건물 앞에 써 놓은 거 못 봤어?"

 "..."

 "지금 이러고 있는 거 불법인 거 알아? 그렇게 이기적으로 살면 돼?"


 그가 나에게 분노를 터뜨리며 쏟아내는 말들 중에서 틀린 말은 하나도 없어서 나는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어깨를 잔뜩 웅크릴 수밖에 없었다. 수분 간 여러 비난 섞인 폭언을 날리던 그는 이내 내가 불쌍하게 느껴져서였는지 더 이상의 말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이 되었는지 다시는 이 건물에 발 붙일 생각 하지 말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나를 내쫓았다.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도망치듯 그 건물을 빠져나왔다.


 나는 무작정 발길이 닿는 대로 길을 걸었다. 한참을 걷다가 그 건물이 시야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을 무렵 그늘진 곳을 찾아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리고 내게 방금 일어난 일을 다시 되짚어봤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내가 기억하는 이래로 누군가에게 이렇게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이 일방적으로 혼난 경험은 처음인 것 같았다. 항상 나도 억울한 점이 있었고 상대의 잘못도 있었는데 방금 그 상황은 일방적인 나의 잘못이어서 나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가 없었다. 애써 억누르고 있던 회의감이 진하게 나를 덮쳐왔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울고 싶은 심정이어서 나는 그냥 멍한 상태로 한동안 오도카니 있었다.


 그러다 나는 이렇게 계속 시간만 보낼 수도 없고 이 작업을 계속하는 것도 못하겠어서 S군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저 지금 너무 힘들어서 그런데 조금만 쉴 수 있을까요.]


 그러자 그가 [왜요?]라고 답했다. 나는 [제가 방금 전단지 붙이다가 집주인한테 걸려서 한 10분 동안 욕만 먹었거든요. 그래서 지금 아무 생각이 안 나요. 전단지 돌리는 거 못하겠어요.]라고 보냈다. 나는 메시지를 보내고 핸드폰을 손에 쥔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르른 맑은 하늘에는 흰 구름이 평화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별안간 핸드폰에서 다시 진동이 울렸다. 나는 S군이 보낸 메시지를 읽어보았다.


욕도 많이 먹으면 적응돼요. 10분 쉬고 다시 해요.


 싸구려 위로라도 바랬던 것일까. 냉정하다 못해 딱딱한 그의 대답에 일순간 퍽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곧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먹고사는   이런 거지. 내가 무슨 드라마의 주인공도 아닌데  바랐던 거야.나는  자리에 앉아서 흘러가는 구름을 조금  감상하며 머리를 비워냈다. 그렇게 5분쯤 지났을까. 나는 긴 한숨을 내쉬고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건물의 반대쪽으로 걷기 시작했. 다시  전단지를 붙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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