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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예또 Mar 11. 2023

잘 먹고사는 당신은 지금 행복하신가요?

 이집트에 온 지 약 2주가 지났다. 사실 이집트에 오기 전 기대했던 건 딱 두 가지뿐이었다. 피라미드와 다합. 피라미드나 내 눈으로 보고 풍경 좋고 물가 저렴하다는 다합에서 요양 좀 하며 비자기간이 끝날 때까지 엉덩이나 뭉개고 있을 작정이었다. 그러다 카이로에서 만난 호스트에게 가볼 만한 곳으로 ‘시와’를 추천받았고, 검색해서 알아보다가 사막 안에 있는 오아시스와 소금호수에 퍽 흥미가 생겨버렸다. 그렇게 나는 장장 13시간의 야간버스를 타고 이집트 서쪽 끝에 위치한 시와로 왔던 것이다.


 시와에서 만난 호스트는 나에게 꽤 친절했다. 내가 시와에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직접 차를 몰고 나를 데리러 와주었고, 손수 계란을 부치고 빵을 구워서 아침을 차려주었다. 카이로에 개인사업을 운영 중이라던 그는 시간여유가 꽤 많아 보였는데 남는 시간에는 그림을 그리거나 텃밭을 가꾼다고 했다. 그러더니 그는 나에게 이곳저곳을 다 데려다줄 수 있다며 시와에 대한 여러 정보들을 마구 소개해 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참 괜찮은 사람이었다.


 겉보기로는 나이가 50대 정도 되어 보였는데 그는 혼자 이곳에 집을 짓고 살면서도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스몰톡 끝에 할 이야기가 떨어지자 나는 넌지시 결혼을 했냐고 물어보았고 그러자 그는 자신이 이혼했음을 밝혔다. 아이 이야기도 물어봐야 대답하는 걸로 봐선 잘은 몰라도 가족과 좋은 관계를 유지 중인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이 세상 사람 수만큼 다양한 가족관계가 있는 것이니 내가 거기까지 뭐라고 할 순 없어 다른 대화 주제를 찾아야겠다고 판단이 드려던 찰나, 이번엔 그가 나에게 물었다.


 결혼은 했는지, 남자친구는 있는지. 거기까진 내가 먼저 물어본 게 있으니 이해할 수 있는 반문이었다. 그런데 그는 갑자기 느닷없이 엑셀을 밟더니 이상형은 어떤지, 성관계에 대한 가치관은 어떤지, 여태껏 몇 명이랑 잤는지 등등 선을 넘는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 사람이 순수한 외국 문화에 대한 호기심으로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건지 새카만 속내를 드러내려고 간을 보는 것인지 판단하기가 애매해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렇게 찜찜한 첫날밤이 지나갔다.


 두 번째 날 그는 나를 데리고 소금호수로 향했다. 이곳 시와에서 5년 정도를 살았다는 그는 현지인만 아는 특별한 스팟이 있다고 했다. 그렇게 그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확실히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내가 사진으로 봤던 곳보다도 훨씬 더. 호수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는 다 마쳤지만 문제는 내가 심각한 맥주병이라는 거였다. 수영을 못해도 몸이 뜰만큼 염도가 높은 곳이라 아무나 다 들어갈 수 있다고는 하지만 소금기를 잔뜩 머금고 고여있는 호수의 물은 너무 맑고 차가웠다.


 내가 막상 호수에 풍덩 빠지지 못하고 들어가는 걸 주저하자 그가 다가와 나를 도와주겠다고 했다. 여기까지 와서 호수에 몸 담은 사진 하나 남기지 못하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아 결국 나는 내키진 않았지만 그의 손을 잡고 천천히 호수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호수 표면에 만들어진 하얀 소금결정들은 맨눈으로 보기에 눈이 부실만큼 하얗고 예쁘게 반짝였지만 표면은 상당히 날카로워서 맨발로 걷는 것조차 발바닥이 상당히 고통스러웠다. 게다가 호수는 바다처럼 천천히 경사가 진 게 아니라 바닥이 갑자기 푹 꺼져버리는 형태여서 맑은 물 아래에 저 멀리 보이는 깊은 바닥은 수영을 못하는 나에게 더 공포스럽게 다가왔다.


 결국 나는 조심스럽게 한발 한발 내딛다가 앉을만한 깊이에서 엉덩이부터 푹 담가버렸다. 그러자 그가 내 다리 사이로 몸을 움직이더니 나와 마주 보고 양쪽 허리에 내 두 다리를 각각 끼워 나를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자세도, 태도도 너무 불쾌해 나는 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표현했다. 그러자 그는 나를 도와주려고 그런 거라며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지었다. 생각보다 물 온도가 차가워 내가 벌벌 떨고 있자 이번에는 그가 내 상체에 물을 끼얹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왼쪽팔, 그다음엔 오른쪽팔, 그리고 등에 물을 차례로 끼얹더니 당연하다는 듯 내 가슴 쪽에도 손을 가져다 댔다. 그제야 나는 확실히 깨달은 것이다. 이 변태새끼의 손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걸.


 집으로 돌아와 나는 바로 호스텔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무런 티를 내지 않고 저녁까지 잘 먹은 다음에 오늘은 피곤해 일찍 자야겠다며 바로 내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까지 늦잠을 잤고, 점심을 먹고 나서 내 친구가 여기로 오기로 해서 오늘은 호스텔로 가야겠다는 말을 전했다. 그의 집은 시내에서 꽤 외진 곳에 있었던 터라 그가 차로 데려다주지 않으면 택시기사를 부르기도 꽤 난감해 마지막 목적을 이룰 때까지 나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야 했다. 그는 내가 자기에게 나쁜 평가를 남길까 봐 두려웠는지 내 눈치를 슬쩍 보더니 나를 호스텔까지 무사히 데려다주었다.

 

 2인 1실에 넓은 킹베드를 쓸 수 있는 호스텔이 한화로 고작 13,000원이었다. 호스텔 숙박비조차 부담스러워 유럽에서부터 시작했던 카우치서핑이 이젠 습관이 되어버렸던 탓에 이곳에서도 호스텔보단 무료로 나를 재워주는 호스트를 찾기에 급급했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온 호스텔은 너무나도 편안했고 변태 같은 호스트의 비위를 맞춰줄 필요도, 억지로 대화상대가 되어줄 필요도 없는 온전한 나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게 새삼 너무 행복했다.


 밥시간이 되어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간단한 재료를 사서 직접 만들어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호스텔 근처 작은 구멍가게에서 쌀과 계란, 그리고 몇 가지 채소들을 구할 수 있었다. 능숙하게 냄비에 밥을 짓고 계란과 토마토를 볶아 반찬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다음 끼니는 계란과 양파, 그 다다음 끼니는 감자와 양파, 그 다다다음 끼니는 다시 계란과 토마토... 아쉽게도 사막에 위치한 이 외진 동네에선 구할 수 있는 재료가 마땅치가 않았다.


 계란, 채소, 그리고 쌀로만 배를 때운 지 어느새 5일 차. 안 그래도 그리운 한식이 이제는 정말 가슴이 사무치도록 그립다. 김치만 있어도 너무 좋을 것 같지만 사실 육식파인 나는 고기가 너무 그리웠다. 이곳에 고기를 파는 곳이 없는 건 아니지만 냉장고도 아닌 바깥에 걸어두고 칼로 숭덩숭덩 파는 고기는 어떻게 사는지, 또 어떻게 먹는지 도저히 도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닭이라곤 살아있는 닭을 파는 곳 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다시 돌고 돌아 감자, 고추, 양파, 당근 따위를 손에 걸고 돌아왔다.


 그러다 문득 서울에서 혼자 자취하며 차려먹었던 수많은 밥상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 당시에는 배달음식을 시켜 먹는 돈이 아까워 직접 밥을 해 먹으면서도 간혹 가다 이렇게까지 돈을 아끼는 내가 참 궁상맞다 싶었는데,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그게 얼마나 복에 겨운 소리였던가. 그때의 나는 적어도 ‘내가 먹고 싶은 걸 해 먹을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있었다. 김치찌개든 훠궈든 파스타든 손쉽게 재료를 구할 수 있는 곳들이 도처에 널려있었다. 적어도 배가 고파서 먹기 싫은 걸 억지로 먹었던 적은 없었다.


 남들의 휘황찬란한 여행기를 보며 초라한 등산용 배낭가방을 이고 매일 호스텔을 전전해야 하는 내 처지가 가엽게 느껴졌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변태 같은 호스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도착한 호스텔에서 나는 천국에 온 것 같은 해방감을 느꼈다. 매일 맛있는 것을 먹으며 살면서도 비싼 음식을 산처럼 쌓아놓고 먹는 먹방 유튜버들을 부러워하면서 ‘내 인생 참 구차하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바보 같은 나는 진짜로 풀만 뜯어먹고 사는 환경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때의 내가 행복했음을 깨달은 것이다.


 나의 행복을 찾아 떠난 이 여행길에서 갈수록 처절히 느끼는 것은 행복은 결코 타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닌, 나의 마음으로부터 결정된다는 것이다. 내가 무얼 먹고, 무얼 입고, 어디서 자든지 내게 주어진 것들에 감사할 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처럼 말이다. 남들보다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옷이 주는 효용감은 영원하지 않다. 오로지 남들보다 더 나은 것을 가지기 위해 나의 건강과 정신까지 해쳐가며 일을 해야만 한다면, 그렇게까지 해서 얻는 그 좋은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나 싶기도 하다. 가끔은 나보다 많은 것들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을 보며 스스로를 비관하는 것 말고, 나만큼의 기회조차 가지지 못한 누군가도 있음을 기억하며 내 삶과 나의 행복에 더욱 충실해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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