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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예또 Apr 04. 2023

인도남자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건.

 내가 여행에 대한 의욕을 잃은 게 먼저인지, 그를 좋아하게 된 것이 먼저인지 모르겠다. 내가 우울해진 게 먼저인지 외로워진 게 먼저인지도.


 그는 나에게 친구 이상의 호감 표현을 한다거나 나를 따로 더 챙겨주는 타입의 사람은 아니었지만 사람을 편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의 앞에선 굳이 광대처럼 여태까지 있었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늘어놔야 한다거나 미래에 대한 계획을 브리핑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없었다. 그는 나에게 언제까지 그의 집에서 머물 생각인지도 묻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그게 언제까지 머물러도 좋다는 뜻인지, 언제 가든 관심이 없다는 뜻인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나의 이름을 정확히 ‘송이’라고 불렀다. 다른 외국 친구들이 ‘쏜지’-Songyi라고 적으면 열에 아홉은 저렇게 읽는다-나 ‘쏘니’라고 발음하는 것과는 다르게. 막상 나는 내 이름을 어떻게 부르든 크게 상관을 않는데, 그의 친구들이 나의 이름을 부정확하게 발음하면 꼭 그가 나서서 ‘송이’라고 정정해 주었다.


 그는 나에게 많은 걸 물어보진 않았지만 나를 스쿠터 뒷자리에 태우고 친구 가족이 운영한다는 단골식당으로 데려갔다. 그러고는 비싸지만 맛있는 메뉴를 추천해 주고 생색 한 번 없이 본인이 결제했다. 고마워서 커피라도 살라치면 귀신같이 가로채서 내가 결제할 틈을 안 줬다. 나중엔 고집고집을 부려서 겨우 몇 번은 내가 낼 수 있었다.


 그의 집에 도착했던 이튿날, 난 오후 두 시가 되어서야 부스스 일어났다. 핸드폰엔 그에게 온 메시지가 있었다. ‘살아있지?’ 내가 문을 열고 나가자 그는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걱정은 되는데 차마 내가 혼자 자는 방을 함부로 열어볼 수 없어서 별일 없기만을 바랐다고 했다. 나는 사람 그렇게 쉽게 죽지 않는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밤이면 함께 드라이브를 갔다. 적당히 수분을 머금은 차가운 바람이 팔에 감기는 느낌이 좋아 나는 타이타닉의 케이트 윈슬릿처럼 양팔을 쫙 펼쳤다. 그것도 모자라 목청껏 소리도 질렀다. 그러면 그도 신난다는 듯 더 빠르게 달렸다. 분명히 혼자였으면 기분 나빴을 길가의 쓰레기 냄새들도 함께 있을 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주방에서 과일 준비를 하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득 가서 안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그는 영어발음도 알아듣기 힘든 인도인이고 게다가 무슬림인데? 어깨까지 내려오는 장발에 수북한 수염, 짙은 쌍꺼풀진 눈과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내가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스타일인데?


 그럼에도 자꾸 마음이 가는 걸 부정할 수가 없었다. 수많은 ‘그런데’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에 남는 건 ‘그래도’였다. 미리 말하지 않았는데도 내가 하늘색 원피스를 입는 날엔 그도 청바지를 입고 나왔고, 내가 갈색 상의를 입는 날엔 그도 베이지색 바지를 입고 나왔다. 어딘가 모르게 서로 닮은 분위기를 연출했다는 게 기분이 좋았다. 여러 장벽 앞에서 ‘그래도’ 우린 그렇게 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의 집에서 머문 지 9일 차. 의욕 없이 편한 환경에 안주하는 내 모습에 진저리가 나서 나는 결국 그의 집을 박차고 나왔다. 내가 떠난다고 했는데도 그는 아무런 감정의 동요가 없어 보였다. ‘내가 눈치 없게 너무 오래 있었나?’, ‘내가 간다는데 아쉽지 않은 건가?’ 싶은 생각이 들자 이내 서운했다. 하필 또 내가 떠나는 타이밍에 그가 일 때문에 갑자기 바빠져서 제대로 된 포옹 한 번 못 했다. 한 조각이 빠진듯한 그 작별인사가 못내 아쉬웠다.


 버스에 타자마자 눈물이 흘렀다. 그를 다시  만나는 것도, 이렇게 훌쩍 떠나야 하는 것도  너무 아쉬웠던 것이다. 못다  미련 담긴 말들을 다듬고 다듬어 그에게 보냈다. ‘ 마음이 그런  알았다면 진지하게 이야길 해볼걸. 우린  좋은 추억을 남길  있었을 텐데.’ 그랬구나, 그도 같은 마음이었구나.



 그의 집에 놀러 온 친구부부 때문에 3일을 같은 방에서 잤으면서도 서로 조심스러워 손도 한 번 못 잡아보고 끝난 풋풋한 사랑 이야기를 이 나이에 다시 쓰게 될 줄은 몰랐다. 내가 인도에 와서 인도 남자를 좋아하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고. ‘그래도’ 때로는 이루지 못한 사랑이 미련이 되어 더욱 강렬한 추억으로 남기에, 우리의 이런 마지막까지 나는 사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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