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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예또 Oct 07. 2023

15) 빨개진 건 내 뺨일까 너의 마음일까


 도르트문트에 있을 때 나는 워크캠프 측으로부터 최종 합격 연락을 받을 수가 있었다. 워크캠프가 진행되는 곳으로 가는 기차를 타러 가는 날, 나는 해가 뜨기도 전인 새벽부터 올리비아의 집을 나서야 했다. 오래되진 않았지만 그새 정이 많이 들었던 친구들과 덩치는 크지만 하는 짓은 영락없는 강아지 같던 개들이 깨지 않게 나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늦여름 새벽 이슬이 내려앉은 축축한 공기가 뺨에 닿자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졌다. 친절하게 대해줬던 친구들과 따뜻한 이부자리가 있던 올리비아의 집으로 자꾸만 돌아가고 싶었지만 내겐 아직 남은 여정이 있었다. 나는 한동안 그녀의 방 창문을 올려다보다가 아쉬움이 가득한 발걸음을 힘겹게 옮겼다.


 워크캠프가 진행되는 곳은 독일 북부에 위치한 귀스트로라는 작은 도시였다. 도르트문트에서는 기차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또 버스까지 타야만 갈 수 있는 곳이었는데,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 3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분명 내 도착예정 시간과 장소를 미리 전달해 두었는데 그곳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나를 데리러 오는 사람은 없었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너무 배가 고파서 어쩔 수 없이 옆에 있는 마트에서 스시롤과 우유를 하나 사서 벤치에 앉아 먹기 시작했다. 이 날 덕분에 나는 유럽 마트에서 파는 스시는 믿고 걸러야 한다는 뜻깊은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배가 고픈 상태인데도 차갑고 쪼그라든 밥알과 따로 노는 재료들이 차마 목구멍으로 넘어가지가 않았다.


 한참을 기다려서 겨우 도착한 캠핑장은 생각보다 크고 깨끗했다. 텐트도 여유롭게 있어서 우리는 2인이서 한 텐트를 사용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주방과 화장실은 실내에 있어서 새벽에 사용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우리는 첫날 간단한 규칙들을 전달받고 당번을 정해 식사를 준비했다. 저녁을 먹은 다음에는 맥주를 마시며 간단한 게임을 하다가 다음 날 아침에 일을 하러 가야 하니 일찍 자리를 파하고 각자의 텐트로 흩어졌다. 낮에는 몰랐는데 밤에는 텐트 안이 꽤나 썰렁했다. 나는 침낭을 따로 준비하지 않았어서 가지고 있던 옷을 다 껴입고도 벌벌 떨며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우리는 오전 업무를 마치고 다 같이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캠프에는 나까지 총 9명이 참가를 했는데 나이는 내가 제일 많았다. 국적은 멕시코가 5명으로 가장 많았고 그 외에는 벨기에, 독일, 일본, 한국에서 각 한 명씩 참가한 거였다. 멕시코에서 온 친구들은 하나같이 서글서글하고 화끈한 게 각자 캐릭터가 아주 확실했다. 벨기에에서 온 디아나는 우리 캠프의 리더였는데 어딘가 쌀쌀하고 퉁명스러운 느낌이 있었다. 독일에서 온 앤디는 화보에서 볼법한 모델급 기럭지와 외모여서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었다. 일본에서 온 엣수시는 전형적인 온실 속 화초에서 자란 외동아들 스타일이어서 가까워지기가 어려웠다. 이렇게 접점 하나 찾기 어려워 보이는 이 조합으로 우리는 2주 동안 함께 일을 하고 밥을 먹는 한 배를 탄 동지가 되었다.


 나는 이곳에서 하는 일을 만만하게 생각했는데 막상 해보니 생각보다 노동의 강도가 약하지가 않았다. 우리는 덤불을 긁어모아 한 곳으로 옮기고, 잘린 나무를 나르고, 양들에게 예방접종을 하고, 기찻길에 떨어진 쓰레기들을 줍는 일을 했다. 운이 좋으면 일이 끝난 후에 근처의 박물관을 탐방하기도 하고 박쥐 보호구역에서 박쥐를 직접 만져보는 체험을 하기도 했으며 전쟁에 대비해 만들어 놓은 지하 벙커를 탐험하는 체험도 할 수가 있었다. 일이 끝나고 저녁을 먹기까지 시간이 남으면 우리 캠핑장 바로 옆에 위치한 사설 캠핑장에 있는 호수로 다 같이 놀러 갔다. 인당 1유로만 내면 들어갈 수가 있어서 우리는 그곳에서 물놀이를 하기도 하고 발리볼을 치기도 했다. 맑은 수면 위에 거울처럼 풍경이 데칼코마니 된 호수의 모습은 자연이 주는 위대한 선물 같아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처음의 서로 서먹했던 분위기는 저녁식사 후에 술게임을 몇 번 하고 나니 금세 사라졌다. 열정이 넘치던 멕시코친구들은 맥주 가지고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마트에서 데낄라와 위스키를 잔뜩 사 와서 하루에 한 병씩 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영화 이름 맞추기, 인물 이름 맞추기 같은 게임을 하던 우리는 어느새 점점 게임의 수위를 높이기 시작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밤과 술과 이성이 있는 한 얌전한 놀이만 할 수는 없는 거였다.


 서로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이 끝난 우리는 진실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개인에 대한 질문들을 주고받다가 분위기는 어느새 이 안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지를 물어보고 커플로 밀어주려는 분위기로 바뀌었고 결국은 그 질문을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받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나이도 제일 많고 소수의 동양인이었던 나는 애초에 누군가와의 가능성 자체를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벽을 쳐버리면 술자리의 재미가 떨어질 것 같아 나는 애매모호하게 중립 기어를 넣었다. 이런 나의 태도에 희망을 얻은 것인지 그날 그 자리에서 나는 두 명에게 대시를 받을 수가 있었는데 한 명은 멕시칸 에밀리오였고 다른 한 명은 독일인 앤디였다. 특히 나는 앤디가 나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저 키 크고 잘생기고 3개 국어까지 유창하게 구사하는 나보다 5살이나 어린 앤디가 나를 좋아한다니?


 나는 그도 나처럼 게임의 재미를 위해 대충 아무나 고른 거라고 생각하며 괜히 김칫국을 마시지 않으려고 애써 덤덤한 척을 했다. 그런데 얄궂은 친구들은 나와 앤디가 서로를 지목하자 홀로 상처받을 에밀리오는 안중에도 없이 계속 우리를 밀어주려고 하는 거였다. 미션은 점점 높은 수위로 올라가기 시작했고 그럴 때마다 앤디는 부끄러워하면서도 술을 마시지 않고 친구들이 시킨 미션을 수행했다. 나는 그의 마음이 진심인지 장난인지 혼란스럽기 시작했다. 술 때문인지 앤디가 뽀뽀를 했기 때문인지 발갛게 달아오른 내 뺨은 다시 돌아올 줄을 몰랐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우리는 친구들이 잠든 새벽에 몰래 만나 종종 비밀데이트를 즐겼다. 나와 가깝게 있을 때면 미친 듯 뛰는 그의 심장소리와 벌벌 떨리는 그의 손이 느껴져서 나는 그게 너무 귀엽게 느껴졌다. '이렇게 잘생긴 애가 여태껏 연애 경험이 없었나?' 싶다가도 '독일이랑 우리나라가 미의 기준이 다른가?' 싶은 생각까지 들게 되는 거였다. 그가 너무 긴장을 한 게 느껴질 때면 나는 내 품에 그를 안고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알싸한 느낌이 드는 외국인 특유의 체취를 싫어하는데도 그게 그의 그의 것이면 싫지가 않았다. 9월 초의 어느 늦여름 밤 독일의 어느 시골마을에서 나의 풋풋한 사랑은 그렇게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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