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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lla Dec 31. 2020

4년의 대학생활이 끝났다

12월 29일 아침, 대학의 마지막 성적이 나왔다. 8과목, 22학점, 올 A. 4년 간의 대학생활이 주마등처럼 스친 순간이었다. 7학기 안에 졸업을 하기 위해 버둥거렸고 그 결과 나는 한 학기 휴학을 하고도 제때 학업을 마칠 수 있게 되었다. 138학점을 이수했다.


위에서 내가 이야기한 것은 숫자의 향연이다. 4년, 7학기 조기졸업, 138학점. 4년의 대학 생활을 끝마치며 내가 받는 질문들은 이런 말들로 대변되는 것들이어서 씁쓸하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아이가 어른들에게 새로 사귄 친구 이야기를 할 때면 그들은 가장 중요한 것은 묻지 않는다. 그 친구의 목소리는 어떤지, 그 애는 무슨 놀이를 좋아하는지, 나비를 수집하는지 등을 절대 묻지 않는다.

다만, 나이가 몇인지, 형제는 몇이나 있는지, 체중은 몇이나 나가는지, 아버지 수입은 얼마나 되는지 등만 묻는다. 그래야 어른들은 그 애를 잘 알게 됐다고 생각한다.


어린 왕자에 나오는 아주 유명한 구절이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시절 담임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13살의 너희가 읽는 어린 왕자와 10년이 지나 20대 중반에 읽는 어린 왕자, 그리고 또 10년이 지나 30대 중반에 읽는 어린 왕자는 완연히 다른 느낌일 거다. 그러니 꼭 10년 주기로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20대 중반이 된 내게 저 구절은 유난히 뼈아프게 다가온다. 당장의 나 또한 내가 대학 생활 동안 이룬 성과들을 계산하며 '이 정도면 헛살진 않았잖아.'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이 앞서는 사람이 되어버린 탓이다.



너희 부모님은 취직하라고 안 하시니?


기쁜 마음으로 대학원 합격 소식을 전했을 때, 친구는 이런 질문을 했다.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아, 취직을 해야 하는구나, 학창 시절 내내 공부만 하고, 고3 때의 의료사고를 견뎌내고, 재수까지 해서 사람들이 말하는 괜찮은 대학에 들어왔다 하더라도 그 상황에서 또다시 쉬지 않고 달려야 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틀에 짜 맞춘 듯 획일화된 삶은 누가 정한 것일까?


글쎄, 솔직히 말하면 지금의 나는 아직 사회로 나갈 준비가 되지 않았다. 모두들 똑같이 두렵고 불안하고 자신이 사회인이 되어도 좋을지 고민된다고 이야기하지만 내가 말하는 준비는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소위 말하는 평범한 대학생활을 할 수 없었다는 박탈감에 기인한 연유가 더 크다. 19살 때의 의료사고 이후 삶의 대부분은 아픔과 씨름하거나 좌절하거나 슬퍼했던 기억들과 좀 더 가깝다.


평범한 고3이었던 19살 때 받은 수술로 내 인생은 그 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병력을 이야기하면 의사들, 혹은 응급실 간호사들은 "수술을 1주일 간격으로 두 번 받은 거예요? 첫 수술이 잘못됐나요? 같은 부위를 두 번 수술했다고요?" 등의 이야기를 한다. 내게는 지겨운 레퍼토리지만 처치를 앞두고 과거력을 이야기하는 것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절차기에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고서야 통증을 호소할 수 있다. 설명 뒤에 따라붙는 저런 반응을 볼 때마다 종종 자각한다. 나는 과거력이 있는 환자 취급을 받는구나.


저런 반응은 올해 10월에 받은 수술에서도 마찬가지여서 "과거력이 있는 환자라 수술이 더 까다로웠다."라는 설명이 따라붙었다. 음, 다시 정리하자면 19살 이후의 나는 '과거력이 있고 수술을 세 차례 받았고 응급실 내원 기록이 많은 사람'쯤이 되겠다. 어쨌든 나의 과거력은 대학 생활을 하는 4년 동안에도 지독히도 나를 쫓아다녔다. 재수 때를 기점으로 후유증은 끝이 날 거라는 희망을 품기도 했으나 그런 종류의 희망들은 대체로 나의 바람 정도에서 끝나는 것이었다.


나의 아픔과 무관하게, 매 계절이 아름다웠던 캠퍼스

1학년 때도, 2학년 때도, 3학년 때도, 4학년 때도 나는 아팠다. 1학년이었던 나는, 모든 신입생들이 송도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는 우리 학교의 독특한 제도 때문에 강제로 기숙사에 거주해야 했다. 여러 차례 응급실에 들락거렸다. 아직도 생생한 것은 새벽이라고 문을 열어주지 않아 말도 못 하게 아픈데도 경비아저씨께 '난 정말 아픈 게 맞고 술 마시러 나가는 게 아니니 제발 출입문을 열어달라'고 울면서 빌었던 기억. 2학년의 나는 돌발성 난청이 발병해 절망 속에 빠진 하반기를 보냈다. 하루하루 청력이 돌아오지 않을까 봐 초조했고 장애등급은 나오지 않는 애매한 상태임에도 보청기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3학년의 나는 돌발성 난청이 재발했었고 4학년의 나는 복막염이 재발해 또 수술을 받았다.



졸업
졸업사진을 찍던 날의 학교


대학 생활을 하는 내내 나의 간절한 목표는 졸업하기였다. 졸업 이후의 삶을 대비할 만한 여유도 없었다는 생각도 해 본다. 조기졸업 요건을 넘겼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엄마는 내가 대학에 합격했을 때보다 기뻐했다. 그래도 네가 졸업은 하는구나, 그런 느낌이었다. 나도 엄마와 똑같이 기쁘다. 대학에 다니면서 숱한 건강 문제가 되풀이될 때마다 휴학을 할까 여러 차례 고민했었다. 그때마다 휴학했더라면 아마 아직도 나는 2학년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남들에게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는 학사 졸업장이 내게는 무척이나 값지다. 아픔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학업을 지속하려 애를 쓴 끝에 얻은 성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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