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급휴직을 받은 이후 시간이 갈수록 생계의 그림자가 나를 옥죄어 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쫓기듯 시작한 독서논술 과외에서, 의외의 희열을 맛보았다. 초등학교 5학년 아이가 생각하는 수준이 이렇게나 높을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고, 아이와 논쟁하는 과정에서 나 또한 '나의 관점'에 갇혀가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번 글은 아이와 내가 '의사가 되려고요'를 읽고 논의했던 주제들을 자유롭게 정리한 것으로 갈음하고자 한다.
첫 번째 독서 교환일기 시간에는 ‘의사가 되려고요’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아이와 나 모두 이 책을 읽으며 공통으로 느낀 것은, 막상 나도 병원에 가면 초보 의사를 원하지 않는데, 그렇다면 ‘의사는 어떻게 경험을 쌓아야 하는가’ 라는 딜레마였다.
먼저, 아이가 인상 깊게 읽었던 구절을 듣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p.13 “이게 우리 인생과 똑같단다. 상처를 입고, 그것을 치료하고 난 다음엔 지금보다 더 나은 인생을 생각하는 것. 내가 하는 일이 우리 삶과 같다고 느낀단다.
아이는 이 문장을 보고 사람이 마음에 상처를 입든, 힘든 일을 겪든 그런 경험을 통해서 성장하는 부분이 인생과 닮아 있는 것 같아 멋진 문장이라고 이야기했다. 그 외에도 인턴 의사에게 치료를 받기 싫으니 전문의를 불러오라는 환자의 사례나, 마치 엄마 같던 환자의 보호자가 의사에게 고마웠다고 이야기를 하고 떠난 이야기 등이 인상깊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하지만 아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은 ‘조금 더 구체적인 의료현장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다음 주에 같이 읽고 감상을 나눌 책으로 『만약은 없다(남궁인)』을 추천해 주었고, ‘철로 위의 두 다리’ Episode를 읽어보라고 권했다. 이 책의 경우 너무 두껍기 때문에 모두 읽는 것은 무리일 수 있으니 인상 깊은 몇몇 파트를 골라서 발췌독한 후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다.
아이의 또다른 궁금증은 ‘응급의학과에서 임시 처치를 하고 나면 그 다음의 수술 등의 치료는 누가 담당하는가’ 라는 점이었다. 이에 따라 외상외과 의사인 이국종 선생님의 『골든아워(이국종)』을 세 번째 책으로 읽은 후 이야기를 나누어 보기로 했다.
인상 깊었던 내용들
1. 죽음의 기준은 심폐사인가, 뇌사인가?
내가 생각하는 죽음의 기준은 뇌사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차피 화장한 뒤 없어질 몸이라면 기증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고 장기, 조직 기증 서약을 해 둔 상태다. 그런데 아이에게 죽음의 기준을 물어봤을 때에는 심폐사가 기준이 되어야 할 것 같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2. 그렇다면 장기기증을 위해 장기를 적출하는 의사는 살인자인가?
만약 심폐사를 죽음의 기준으로 정의한다면, 사람을 살리기 위해 애써야 할 의무가 있는 의사는 장기 적출을 위해 심장과 폐 등의 주요 장기를 적출한 사람이기 때문에 살인자가 되는 것이 아닐까? 이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3. 뇌 은행 이야기
뇌도 기증할 수 있음을 이야기했다. 실제로 인간에게 나타나는 다양한 정신질환 중에는 실제로 뇌에 문제가 생겨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아이가 예로 든 것에는 뇌졸중, 뇌출혈 등이 있었고 나는 조현병과 알츠하이머를 예로 들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을 연구하기 위해 뇌은행 이라는 기관이 만들어져 뇌를 기증받기도 함을 이야기했다. 나 또한 사후 뇌를 기증할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뇌 연구가 흥미롭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해 보았다. 그리고 뇌는 아직 인체에서 밝혀진 부분이 거의 없는 영역이므로, 뇌를 치료하는 신경외과의 이야기도 함께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의 사생활(김정욱)』은 신경외과 의사의 그림일기인데, 이 책을 같이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4. 소아 장기기증 이야기
어린 아이가 죽게 되면 그 아이의 장기를 기증할 것인가 여부는 부모가 결정하게 된다. 어린 아이를 떠나보내는 부모의 마음도 너무나 아플 것이고, 그런 아이의 장기를 적출하여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려야 하는 의사의 삶도 잔인하고 기쁠 수만은 없다는 것을 함께 고민해 보았다.
5. 정신과 이야기
유퀴즈에 나온 정신과 의사 선생님의 유투브 영상을 보았다. 영상에서 선생님은 우울증을 ‘비가 쏟아지는 날이 2주 이상 계속되는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자신을 부르는 환자의 콜이 그 사람에게는 정말 절박한 부름일 수 있음을 인지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과 의사에 대한 편견이 속상하기도 하고 환자를 잃었을 때의 기분은 너무나 우울하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아이는 이를 보면서 정신과라는 곳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정신과 의사가 된다면 주변 가족들이 힘들 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여기에서 나는 "언니는 친오빠에게 세세한 연애 이야기나 회사 이야기를 할 수 없을 것 같아." 라고 답했다. 아이는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6. 카데바 이야기
의과대학에서 해부실습을 위해 사용하는 시신들을 ’카데바‘라고 부른다. 이러한 카데바들은 누군가 후학 양성을 위해 기증한 것이 대부분인데, 이전에 카데바에서 적출한 장기를 들고 의대생들이 기념사진을 찍어 문제가 된 사건이 있었다. 이렇듯 누군가가 깊은 마음으로 기증한 소중한 신체라면, 숭고하게 다루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이와 나 모두 느꼈다.
7. DNR 이야기
DNR은 Do Not Resusciate의 줄임말이다. 이는 소생술 포기, 종말기 의료에서 본인 또는 가족의 의사결정에 따라 심폐소생술을 시행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이와 죽음의 기준에 대해 고민하면서, DNR을 보는 관점 또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