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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lla Jun 01. 2022

이토록 아름다운 계절

퇴사 한 달 차의 일상

퇴사 한 달 차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깨달은 것들이 있다. 나는 퇴근 후 보던 밤하늘보다는 낮의 햇살을 사랑한다는 것, 회사에 출퇴근하기 위해 보내던 7:50~19:30의 시간 사이에 놓치고 있었던 아름다움이 너무나 많았다는 것. 회사에 다니는 삶으로 다시는 돌아가기 힘들 수도 있겠다는 것.


뭐 그리 유이냐 할 수 있지만 나는 꽤 많이 죽을 뻔했다. 19살 때의 의료사고, 24살 때의 재수술, 25살 때의 원인 모를 화이자 부작용 등등. (그리고 심지어 4월 말에는 신호대기 중에 대형 버스가 뒤에서 들이받았다.) 내 삶은 그래서, 매번 어떤 방향으로 갈지 고민하는 시간들로 구성되어 있다. 언제 끝날 지 모르는 삶이니 최대한 즐기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퇴사 한 달 차에 접어드는 지금, 스스로에게 물었다.


"당장 내일 불의의 사고로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는가?"


온 힘을 다해서 후회하지 않는다고 대답할 수 있다. 월화수목금 일하고, 토일에 쉬고, 어쩌다 찾아오는 공휴일에 안도하는 삶 대신 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프리랜서의 삶이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다. 스스로의 가치를 끝없이 증명해야 하고 내가 아파버리면 누구도 내 자리를 보전해주지 않는다. 몸이 약한 내게 이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단점이 되겠지만, 거꾸로 생각해 보면 오히려 잘 된 일이다. 내 컨디션에 맞춰 가면서 일할 수 있게 되었고 입원이 필요하면 입원하면 된다. 아파서 회사에 못 가거나, 휴가가 줄어든다거나 하는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회사에 다닐 때에는 정말 한 번만 더 아프면 퇴사해야 한다는 불안감에 얽매여 살았다. 하지만 지금은 혹여나 내가 아프다고 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방법을 구축하고 있고, 이 과정이 '나만의' 경력이 될 것임을 알기 때문에 그다지 불안하지 않다.


connecting the dots


스티브 잡스의 연설에서 나왔던 매우 유명한 말. 인생은 순간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순간들을 잇는다면 하나의 방향성이 나온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나는 교육학을 전공했고, 컴퓨터과학을 공부했고, 회사에서는 데이터 교육을 하는 팀에 (잠깐) 있었고 지금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한다. 순간 속에 놓여 있을 때는 이 경험들이 어떤 도움이 될지 의문을 가졌었지만, 막상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그 경험들이 모여서 하나의 선을 만들어 가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회사에서 했던 업무들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회사 업무에서 배운 것


1. 예쁜 PPT 꾸미기도 중요하다

- 의미 없는 요식행위라고 생각했었는데 학원 일을 할 때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현재 프리랜서로 재직 중인 학원의 홍보기획에서 적지 않은 비중의 일을 하고 있는데, 전단지나 명함 디자인을 할 때에 회사에서 깨지면서(?) 배웠던 도형 위치 맞추는 기술이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디자인은 디자이너에게 넘기기 때문에 내가 잘 맞춰봤자 큰 의미는 없다)


2. 오타 교정도 실력이다

- 가장 도움이 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긴 보고서에서 단순하게 맞춤법 검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몇 번 더 읽어보고 프린트까지 해서 확인했던 습관이 교재를 만들 때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지금 가르치는 친구들을 위해서 직접 교재를 제작하고, 출강을 위해 기획안을 작성해서 보내기도 하는데 회사 일을 하던 습관이 든든한 밑천이 되어주고 있다.


3. 업무 메일 쓰기

- 교육기관 출강 요청이 들어오는 일이 많은데 자잘하게 배워둔 문서 양식 맞추는 기술을 요긴하게 써먹고 있다. 예를 들어서, 이력서를 쓸 때에는 경력을 최신순으로 써야 한다거나 읽는 사람의 편의를 위해서 중요한 부분들에 볼드 처리를 하고 형광펜 표시를 하는 것 등등.


최근의 일상 중 가장 마음에 드는 한 부분을 소개해 볼까 한다. 교육학이라는 전공을 살려서 교육업으로 돌아왔다. 두 곳의 고등학교에서 비정기적인 특강을 하고 있으며 문화센터, 사회복지시설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다. 내가 조금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칠 역량이 있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조금 먼저 살았던 입장에서, 8~10년 남짓 먼저 경험하면서 느꼈던 점들을 공유하고 그 나이대의 고민에 공감하는 일이다.


5월 26일에는 '내가 고등학생으로 돌아간다면?'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진행했다. 이 주제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11명의 지인들에게 질문을 던졌고 너무나 값진 이야기들을 얻었다. 그중 몇 가지를 공유하고자 한다.


(이 자리를 빌려 소중한 의견을 내주신 분들께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2030 선배들이 고등학생인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1. 서울대학교 수학교육과 선배

- 성인이 된다면 다양한 선택지를 고를 수 있다. 창업, 편입, 동아리(에서 어 쩌면 예술가 까지도), (공기업, 사기업 연구실 등). 그 외에도 인턴이나 국 내 교환학생, 해외 교환학생, 학점교류 등 배울 수 있는 기회와 방법은 너 무나 많다. 남학생이라면 각종 병역 해결 방법도 고민해 봤으면 좋겠다. 폭넓은 선 택지의 아르바이트, 대외활동, 사회공헌, 대학원 진학, 여행 크리에이터, 연 애, 취미활동 등의 선택지가 너무나 많다. 위에서 언급한 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대입이 중요한 이유는 선택지 종류의 질과 폭이 달라진다는 데에 있다. 하지만 대학에 간다고 해서 본질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없으니 주체적으로 사는 습관을 길렀으면 좋겠다.


2.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선배

- 어차피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돈 벌 기회는 많은 세상이니 학교 잘 갔다고 방심하지도 말고, 못 갔다고 낙심하지도 말았으면 좋겠다. 본인의 강점이나 특성을 잘 파악하고 도전하면서 기회를 잘 잡았으면 한다. 학위가 가지는 의미가 점점 퇴색되는 세상이니까. 특히 직업에 대해서는 선입견을 갖지 말고 다양한 업종에 도전해 봤으면 좋겠다. 보험을 팔아도, 핸드폰을 팔아도 사업을 해도 주변에서 학교를 좋은 곳을 나오지 않았어도 잘 사는 경우를 너무 많이 봤다. 학교가 그리 중요한지 가끔 회의감이 들 때도 있다. 이것저것 찌르다가 본인 적성에 맞는 것을 발견하면 학교 잘 가는 것보다 훨씬 잘 풀릴 때도 많다.


3. 00교육대학교 초등 사회교육과 선배

- 부모님들은 기성세대라 미래를 보지 못할 수 있다. 그들이 늘 옳다는 생 각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 ‘네가 되겠냐’, ‘촌구석에서 1등 한다고 저기 쓸 수 있냐’고 말하는 사람들은 무시해라. 주변의 말에 휩쓸리기 가장 좋은 시기가 고등학생 시절이다. 가스 라이팅 비슷하게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휘둘렸던 것 이 가장 후회되는 일이다. 고등학생 때에 빨리 다음의 직업을 정해야 하고 인생 로드맵을 짜야한다고 생각해서 힘들었던 것 같다. 최대한 다양한 인 프라가 있는 곳에서 20살 때부터 다시 생각할 수 있다는 생각을 그때는 못했었다. 고등학생이 모든 것을 결정할 필요는 없다. 20대 중반, 30대가 되어서도 꿈을 찾아가는 사람은 너무나 많다.


어쩌면, 나는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전하는 메신저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을 이끈다거나 지도한다고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너무 많다. 그냥 내 입을 빌어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앞에 놓인 다양한 선택지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너무나 다양하다. 단순히 국어를 가르치는 일에 국한될 수도 있고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는 '독서논술'의 과정을 통해 지속될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때에는 입시를 도와주는 컨설턴트로서의 역할을 겸하기도 한다.


그리고 아이들에게서 여전히,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배운다. 독서논술 수업 (개인적으로 책 읽기에 수업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다.)을 할 때면 생각보다 훨씬 속 깊은 아이들의 의견에 감탄할 때도 있고 국어 수업을 할 때에는 아이들이 노력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 비스무리한 것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가장 좋은 건

요즘 내 마음속을 들여다볼 시간이 늘었다. 원래는 정해진 알람에 맞추어 일어나서 빠르게 준비하고 나가느라 바빴다면, 최근의 일상은 상당히 여유로워졌다. 그 시간 속에서 나름대로 해야 할 일을 찾고 있고 강사로서의 입지도 다져나가는 중이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도 지속하고 있다.


지금의 일상이 즐거운 이유는 낮의 햇살을 받으면서, 내가 가장 생생한 순간일 때에 나를 위해 시간을 쏟을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그 대가로 저녁 시간을 반납했지만 벌이의 측면에서도, 삶의 질 측면에서도, 주도성 측면에서도 내 삶의 족적을 하나하나 맞춰나가고 있다는 충만감이 때때로 온몸을 감싸는 듯한 행복감에 휩싸이고는 한다.


나는 단순히 '퇴사'를 한다고 해서 행복해질 수는 없는 부류의 인간이다. 대신, 퇴사 이후에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고 나의 주도성을 가지고 계속해서 개척해 나가야 하는 사람이다. 어떻게 보면 사서 고생일 수 있겠다. 하지만 때때로 과외를 시작하기 한참 전 아파트 단지에 미리 도착해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듣거나, 오전의 카페에서 책을 읽거나, 지금과 같은 고요한 새벽이면 내일 일어나야 한다는 부담감 없이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 내 행복의 원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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