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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망 Mar 05. 2022

저마다의 온도

<우리가 녹는 온도>를 읽고

<우리가 녹는 온도>는 2022년 3월 첫 주의 미작(글모임) 지정 책이다. '정이현'이라는 이름을 보고 그녀를 떠올리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책장 한편에 누렇게 변한 <사랑의 기초 - 연인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이현 작가는 <달콤한 나의 도시>로 만났다.


이후 2012년 알랭 드 보통과 정이현 작가가 공동 기획한 소설 <사랑의 기초>가 출간되자마자 구입했다. 알랭 드 보통의 팬으로 그의 신간이 나올 때마다 사 모으던 때였다. <사랑의 기초>는 알랭 드 보통의 소설 '한 남자'와 정이현의 소설 '연인들'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흡족하게 '한 남자'를 읽고 '연인들'을 펼쳐 들었다가 실망감을 가득 안고 완독하지 못한 기억이 있다. 지난주 모임 책이었던 <책에서 한 달 살기>를 읽으면서 '책에 대한 기대나 고정관념'을 갖지 말자고 다짐했다. 작가와의 옛 만남이 떠오르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이미 기억난 걸 어찌할 수는 없었다. 다만 작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편견과 기대를 내려놓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가 녹는 온도>에 실린 열 개의 단편은 모두 '그들은,'과 '나는,'이라는 제목의 두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 편 모두 소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은,'은 소설이고 '나는,'은 작가의 에세이다. 어느 순간 무엇이 소설이고 에세이인지 구분하지 않게 되었고, 그런 구분은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블로그나 브런치에 주로 에세이를 쓰다가 동화나 소설도 쓰게 되었는데, 여러 장르의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다. 오로지 상상만으로 탄생하는 이야기는 없으며 사실로만 이루어진 에세이도 없다는 것을. 경험과 상상이 뒤섞여 소설이 되고, 허무맹랑한 상상이 에세이에 녹아들기도 한다.


열 편 중 '여행의 기초'와 '커피 두 잔'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여행의 기초'는 여행 취향이 전혀 다른 '윤'과 '선'의 이야기다. '윤'은 내키는 대로 움직이는 여행자인 반면 '선'은 철저하게 계획하고 떠나는 타입이다. 과거의 나는 '선'이었지만 지금은 '윤'에 가깝다. 둘의 조합일지도 모르겠다. 문득 친구들과 함께 했던 여행이 떠올랐다. 어떤 친구에게 나는 '선'이었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윤'이었다. 돌아보면 어떤 타입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성향이 다른 두 사람이 함께 낯선 공간을 탐험했고, 그 과정에서 조금씩 서로에게 물들어 지금의 내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커피 두 잔'은 한겨울에도 차가운 커피를 마시는 남자와 한여름에도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여자의 이야기다. 그들의 만남은 이혼이라는 선택지 앞에 선다. 사랑이 시작될 때는 다름을 받아들이고 서로에게 녹아들기 위해 노력하지만, 상대가 선호하는 미묘한 온도에 무심해지면서 관계에도 균열이 생긴다. 내편의 미묘한 온도는 얼마였더라. 그 온도를 잊지 않기 위해 관심을 기울여야겠다고 다짐한다.


나는 요즘 꽤 자주, 그 사소한, 커피의 온도에 대해 생각한다. 사람마다 혀끝의 온도가 다 다르다는 것에 대해. 한 사람을 순식간에 무장해제시키고 위안을 주는 온도가 제각각이라면, 이 넓고 넓은 세상에서 나 말고 단 한 사람쯤은 나만의 그 온도를 기억해 주면 좋겠다고. <우리가 녹는 온도> p.126


가벼운 마음으로 술술 읽기 좋은 책이다. 호흡이 짧은 단편들이라 대부분 특정 상황을 잠깐 보여준다. 때문에 독자가 상상할 여지가 많다. '나는,'을 읽기 전에 잠시 '그들'의 어제와 지금, 내일을 상상해 보는 게 재밌다. '나는,'에서 작가가 하는 말을 들으며 또 다른 상황을 그려보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었다. 책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랑의 기초 - 연인들>의 문을 다시 한번 두드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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