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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망 Sep 11. 2020

선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글을 잘 쓴다는 것은 자기 글을 믿고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다. 위험을 감수하고, 남들과 달라지려 하고 스스로를 부단히 연마하는 것이다. - 윌리엄 진서


1.

글을 쓰면서 마음이 차분해졌다. 산만하던 머릿속이 한결 정돈됐다. 100일 동안 ‘매일 글쓰기’를 하면서 글 근육을 단련한 뒤 홀로 쓰기 시작했다. 감사 일기에 쓸 에피소드 중 하나를 정해서 글쓰기 연습을 한다고 생각하며 글량을 늘려가고 있다.


어지러운 생각들을 글로 풀어놓다 보면 조만간 녀석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얌전히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닌 것 같다. 그저 내가 ‘생각’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매일 확인한다. 그들을 무시하고 억누르느라 큰 에너지를 쓰며 살아왔다는 것도.


2.

최근 온전하게 받아들인 사실은, 나는 ‘생각’이 쏟아지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나로 시작한 생각이 열 개가 되고 백개가 되어 금세 울창한 숲이 된다. 20대까지는 한 가지 일에 꽂히면 밤새 생각하느라 잠을 설치는 일이 허다했다. 타인의 말이나 외부 상황에 대한 고민이 지나쳐서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라는 소리도 종종 들었다.


한마디 말에 꽂혀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다. 심리학 서적을 뒤적이며 ‘다른 사람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 내가 고민하고 있는 타인의 말을 정작 당사자는 잊고 있을 확률이 높다.’ 등 타인의 시선에 무심할 수 있는 문장들을 찾아 마음에 새기면서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을 줄여 나갔다.


타인의 말에 신경 쓰지 않고 쿨하게 대응하기.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어도 재빨리 잊어버리기. 말의 의미를 곱씹어보지 않고 직접 물어보기. 상상을 덧붙여 소설 쓰지 않기.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효과가 있었다. 사소한 말로 고민하는 시간, 특정 상황을 놓고 밤새 잠을 설치며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남의 말에 신경 쓰지 않는 사람’으로 보였는지 가끔 어떻게 하면 그렇게 쿨할 수 있냐며 조언을 구하는 사람도 생겼다.


하지만 노력을 통해 변했다고 생각했던 그 모습은 진짜 내가 아닌 나의 페르소나였다. 그렇게 가면을 쓰고 지내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억눌렀다. ‘생각 많음’이 괴로움을 불러온다고 판단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생각을 하지 않으면, 작은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생각 숲을 짓는 일을 멈출 수 있다면, 외부의 환경에 구속받지 않고 쿨하게 사는 단단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3.

최근 글쓰기를 하면서 마음이 안정되고 머릿속이 차분해졌지만 생각이 줄어든 건 아니다. 놀랍게도 오히려 더 많아졌다. 억눌러왔던 생각들이 구석구석 숨어 있다가 ‘기회는 이때다!’ 싶어 신나게 튀어나오는 것 같다. 미움, 근심, 자책, 불안, 질투.. 대체 어디에 숨어 있었던 건지 모를 엄청난 양의 생각들이 ‘실은 나 여기 있었다’며 인사를 한다.


두툼한 나무판자를 덧대어 단단히 못질해 놓았던 머릿속 상자들을 뜯어보니 세상에.. 난장판이 따로 없다. 당황스럽고, 반가웠다. 이게 '나'구나 싶어서. 그동안 생각을 억누르며 다른 사람으로 사느라 너무 고생했다. 이것을 알아차린 뒤부터 자주 눈물이 난다. 지난 몇 년 동안 크게 아플 때 말고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최근에는 명상을 하다가 이유 없이 울컥했다.


날뛰는 생각들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모닝 페이지를 쓰면서 종이에 자리를 내어준다. 어떤 녀석은 한 번에 잠잠히 자리를 잡기도 하지만 어떤 녀석은 다음 날 다시 나타나서 더 넓은 자리를 내어 달라고 떼를 쓴다. 그렇게 며칠 동안 같은 녀석을 상대하다 보면 그의 본심을 알게 된다. 그 녀석을 통해 억누르고 있던 진심을 만나게 된다. 진심을 알아차리면 날뛰던 녀석은 이내 잠잠해진다.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4.

글을 쓰면 복잡한 생각들과 이별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쏟아내면 쏟아낼수록 더 많아졌다. 신기하게도 퐁퐁 솟아나는 생각들을 억누르지 않고 글로 옮기면 속이 시원하다. 감당하지 못할 어지러운 것들이라고 여겨서 밀어내기 바빴는데, 요즘엔 그 안에서 똘똘한 녀석을 골라 글감으로 삼는 여유도 생겼다.


글을 쓰기 시작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생각’이라는 단어를 많이 쓴다는 것을 알고 의식적으로 다른 단어를 썼다. 그때는 그저 같은 단어를 자주 쓴다고 여겼는데, 실은 나는 ‘생각’이 많은 사람이었던 거다. 만약 누군가가 자주 쓰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친구일지도 모른다. 다른 단어로 대체하려고 하기 전에 그 단어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곱씹어보는 것이 필요하다. 어쩌면 나처럼 새로운 친구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5.

나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이유 없이 싫어하고 부끄러워했던 나를 마주하면서 자주 놀란다. 별 일 아닌 일로 어찌나 구박을 했는지. 미안하다. 내가 아니기를 바라면서 살아온 시간이 얼마나 헛되고 허망한 시간이었는지를 깨닫는다.


생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나를 믿고 부단히 연마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 글이 내게 준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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