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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망 Sep 17. 2020

고전이 이런 거라면

호밀밭의 파수꾼

글쓰기 모임(미작)에서 ‘호밀밭의 파수꾼’이 선정되었을 때 긴장했다. 소설, 고전.. 친하지 않은 상대다. 깨달음이나 감동을 얻어야 한다는, 무언가 찾아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책에 빠져들지 못하고 헤맨다. 게다가 읽고 글을 써야 한다니.. 읽기 전에 크게 심호흡을 했다. 꼭 무언가를 얻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그저 ‘재미있다 또는 재미없다’라고 느끼는 책도 있을 수 있으니 일단은 읽자. 마음을 내려놓았다.


16세인 주인공 콜필드는 네 번이나 퇴학을 당한다. 마지막 학교에서 쫓겨난 뒤 사흘 동안 뉴욕 거리를 헤매면서 일어나는 일을 다룬 소설이다. 부유한 부모 덕분에 거리를 헤매면서도 경제적 어려움은 조금도 겪지 않는다. 오히려 호텔에서 지내면서 술을 마시고 흥청망청 돈을 쓴다. 돈 없이 거리를 헤매는 사람들에게는 전부인 생존을 고민하는 대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정신적인 괴로움과 마주한다. 거리를 방황하던 그는 문득 순진무구한 여동생 피비를 보고 싶어서 몰래 집으로 들어갔다가, 피비와 대화하면서 영원한 가출 계획을 접게 된다.


줄거리는 간단하지만 꽤 재미있었다. 책을 읽다가 30분 정도 되면 산만해져서 다른 일을 하게 되는데 이 책은 읽다가 문득 시간을 보니 1시간이 지났다. ‘정말이다, 사람 죽이는 글이다,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당신은 정말 춤을 잘 추십니다, 정말 죽고 싶은 짓이었다, 홀든 비타민 콜필드가 내 본질이지 뭔가’ 등 주인공 콜필드의 솔직하고 투명한 말투에 웃음이 났다. 까칠한 척,  척 하지만 실은 여리고 사랑스러웠던 학원 아이들이 생각나서 흐뭇해졌다.


하지만 콜필드는 마냥 순진하지만은 않다. 순진한 말투 뒤에 세상의 부조리를 꿰뚫어 보는 날카로운 시선, 위선으로 가득 찬 사람들로 인해 괴로워하는 그가 있다.


“인생은 게임이야. 누구든 규칙을 따라야 해.”
“그렇습니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게임 좋아하네. 굉장한 게임이로군! 만약 우수한 놈들이 모두 끼여 있는 쪽에 속한다면 인생은 게임일 것이다. 그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우수한 놈이라곤 하나도 없는 쪽에 속한다면 그게 어떻게 게임이 되겠는가? 게임이고 뭐고 아무것도 아니다.

(호밀밭의 파수꾼 p.18)



방황하면서 만나는 사람들 - 교장, 기숙사의 룸메이트들, 영화배우, 유명한 피아니스트, 택시 기사, 호텔 벨보이, 창녀, 추잡한 낙서 등 - 을 통해 부조리한 세상과 위선에 가득 찬 인간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가출한 청소년이지만 펑펑 써도 좋을 만큼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다는 설정 때문에 이러한 시선이 가능한 게 아닐까 싶다.


콜필드에게 따뜻하고 정직하고 진실된 사람은 거리에서 만난 두 명의 수녀,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자살한 친구, 엔톨리니 선생과 두 여동생(앨리, 피비)인 모양이다. 자신을 믿고 사랑하는 순진무구한 피비를 만난 뒤 피비에게 회전목마를 태워주면서 집에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콜필드가 보는 세상은 어둡고 지저분하다. 그런 세상에서 ‘아득한 낭떠러지에 떨어질 것 같은 아이들을 지켜주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p.256)’는 그의 소원은 당연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콜필드에게는 호밀밭의 파수꾼만큼 작가도 잘 어울릴 것 같다.


일단 거짓말을 시작했다 하면 나는 몇 시간이라도 계속할 수 있다.
이건 농담이 아니다. 정말 몇 시간이고 문제없다. (p.92)


거짓말을 시작했다 하면 몇 시간이라도 계속할 수 있는 그는 소설을 쓰면 제격이겠다. 직장생활이 지루할 때마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보냈다는 예비 소설가 글쓰기 멤버가 생각나서 웃음이 났다. 작품 해설을 통해 작가 J.D. 샐린저의 생애를 알게 되면서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었던 것은 ‘말수가 적고 정중하며 고독한 소년(p.316)’이었던 작가 자신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하고나 같이 있지 않아. 나와 나 자신과 나뿐이야.”(p.225) 콜필드가 자라서 샐린저가 됐구나.


*

청소년들도 많이 읽는다던데 어렸을 때 이 책을 만났다면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고전이라고 하면 책장을 펼치기도 전에 겁이 나서 피하게 되지만 막상 읽으면 재밌다. 생생한 묘사 덕분에 선명한 이미지를 그리며 몰입하게 되고, 책을 덮은 뒤에도 문득문득 생각난다. 10년 뒤에 다시 읽으면 어떤 느낌일지도 궁금하다. 많은 사람들이 읽는 이유가 이와 비슷한 무엇 때문일까. 고전이 이런 거라면 좀 더 도전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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