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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망 Nov 10. 2020

과연 인생 책

책 읽어주는 남자

일과삶님이 진행하는 ‘서평으로 시작하는 글쓰기’의 선정도서로 만나게 되었다.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몇몇 사람들에게 인생 책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꽤 기대했는데 15세 소년과 36세 여인의 사랑 이야기에는 큰 감동이랄 것이 없었다. 굳이 파격적인 나이 차이가 나는 연인으로 설정할 필요가 있었을까. 무언가가 더 있겠지.. 빠르게 2부로 넘어갔다.


열다섯 살 미하엘과 서른여섯 한나는 우연한 일로 비밀 연인이 된다. 사랑을 나누기 전 미하엘이 한나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은 둘만의 의식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한나가 갑자기 사라진다. 둘의 연애는 짧았지만 미하엘은 첫사랑으로 인해 이후 이성과의 관계에서 삐그덕 댄다. 8년 뒤 법학생이 된 미하엘은 나치 전범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한나를 만난다.


말도 없이 자신을 떠난 한나를, 나치 친위대에서 수용소 감시원으로 일한 한나를, 미하엘은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다. 미워할 수도 없다. 하지만 미하엘이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은 ‘문맹’ 임을 숨기기 위해 모든 죄를 혼자 뒤집어쓰는 한나의 선택이다.


“하지만 어른들의 경우에는 내가 그들에게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들 스스로가 좋다고 여기고 있는 것보다 더 우위에 두려고 하면 절대 안 된다.”

“나중에 가서 그들 스스로가 그로 인해 행복해질 수 있는 경우에도 말인가요?”

아버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는 지금 행복이 아니라 품위와 자유에 대해서 말하고 있어. 넌 아주 꼬마였을 때부터 그 차이를 잘 알았잖니. 엄마의 말이 늘 옳은 것이 네겐 별로 마음이 편치 않았잖아.”

책 읽어주는 남자 p.180  


미하엘이나 독자의 판단에는 문맹임을 밝히고 형을 감면받는 것이 한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 옳은 일이다. 하지만 한나에게는 문맹임을 숨기는 것이 그 당시 자신의 품위와 자유를 지키는 일이었을까. 미하엘과 아버지의 대화는 행복과 개인의 품위, 자유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어쩌면 우리는 개인의 품위나 자유는 제쳐두고 행복만을 정답이라고 믿는 것은 아닌지. 어린아이의 경우 부모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아도 스스로의 선택, 결정, 행동을 고집하는 경우가 많다. 아이가 행복해질 것이라는 예상, 믿음으로 아이의 선택과 행동을 제한하며 아이의 삶에 개입할 수 있을까.


너무나 지연되고 실패한 그녀의 인생이 불쌍했고, 그녀 인생 전체의 지연과 실패가 가엾게 여겨졌다. 어느 누가 제때를 놓쳤을 경우, 어느 누가 무엇을 너무 오랫동안 거부했을 경우, 그것이 나중에 가서 설사 힘차게 시작되고 또 환희에 찬 영접을 받는다고 해도, 나는 그것은 이미 때가 너무 늦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너무 늦은’이라는 것은 없고 ‘늦은’이라는 것만 있는 것인가. ‘늦은’것이 ‘결코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것인가? 나는 모르겠다.  

책 읽어주는 남자 p.236


한나가 ‘늦은 것’은 맞지만 ‘결코 없는’것은 아니다. 종신형을 받은 한나의 선택이 감옥에서 글을 배우고, 자신의 행동과 삶을 되돌아보고, 사죄할 기회를 마련한 시간이 되었다. 한나에게 모든 죄를 적극적으로 뒤집어씌워 종신형에서 벗어난 감시원들은 오히려 자신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기회를 놓친 ‘결코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나가 문맹에 대한 수치심에서 보다 빨리 벗어나 좀 더 일찍, 미하엘을 만났을 때부터 글을 배웠더라면 인생이 달라졌을 것이다. 문맹을 숨기기 위해 전차회사에서 간부로 승진할 기회를 박차고 나올 필요도 없었을 테고, 수용소 감시원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수치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직면하고 수치심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문맹을 밝히는 것이 종신형을 받는 것보다 훨씬 나은 선택으로 보이더라도 종신형을 선택한 한나처럼 말이다.


한나의 ‘문맹’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자신만의 수치심이 있을 것이다. 타인이 보기에는 별 것 아닌 것, 계발하면 해결될 일인 것 같은데 당사자에게는 너무 큰 문제라서 숨기기에 급급한 무언가가 있다. 나의 ‘문맹’은 무엇일까?


“가면 증후군(사기꾼 증후군)”

자신의 성공이 노력이 아니라 순전히 운으로 얻어졌다 생각하고 지금껏 주변 사람들을 속여 왔다고 생각하면서 불안해하는 심리. 심리학자 폴린 클랜스와 수잔 임스가 처음 사용한 용어. 스스로가 똑똑하지 않고, 사람들이 자신을 과대평가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운으로 성공했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지나친 성실성과 근면함을 보인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인생의 중요한 선택 앞에서 -관계가 깊어지거나 직장에서 나에 대한 기대가 커졌을 때- 도망친 적이 있다. 승진 제안. 스카웃 제의를 받았을 때 나를 과대평가한다는 생각과 진짜 실력을 들킬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거절했다. 그리고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했다. <사기꾼 증후군>이라는 책에서는 ‘진정성 -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며 자존감을 키우는 것’을 중요한 치료법으로 꼽는다. 독서토론에서 한나가 ‘문맹’에 수치심을 갖는 것은 자존감이 낮았기 때문일 수 있다는 멤버의 말이 깊이 와 닿는다.


파격적인 연인의 사랑을 시작으로 전쟁이라는 시대적 상황, 그 안에서 개인의 선택, 전쟁 전후 세대 간의 이해 차이, 독일인의 과거에 대한 분노와 수치심, 개인의 수치심, 자존감 등이 얽혀 책장을 덮은 뒤에도 자꾸 생각에 잠기게 한다. 불편하게 느꼈던 ‘소년과 여인의 사랑이라는 장치’는 전쟁을 온몸으로 겪은 세대와 겪지 않은, 청산해야 할 과거사로 여기는 세대의 밀접함과 간극을 표현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과연 한번 읽고 덮어버릴 수 없는 인생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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