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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망 Nov 25. 2020

오늘, 내일

'미움받을 용기'를 읽고 / 픽션입니다.

딸랑~

목요일 오후 5시. 어김없이 지민이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월요일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월요일에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조용히 들어오더니 오늘은 살랑거리는 치마를 입고 눈을 맞추며 활짝 웃는다.


지민이는 ‘오늘’을 오픈하고 아이들을 위한 무료 수업을 시작했을 때부터 함께 하는 아이다. ‘부모님이 바빠서,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등 방과 후에 섬세한 케어를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모아서 수업을 시작했다. 수업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민망한 것이, 1시간 동안 각자 책을 읽고 1시간 동안 글을 쓴 뒤에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다. 이름하여 ‘나를 위한 One+One’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자유다. 글만 쓰고 귀가하는 아이들도 있다. 글에 대해서는 다음 모임 때 간단한 피드백을 적어 선물하는데 피드백이 궁금해서 주중에 ‘오늘’을 찾는 아이들이 종종 있다.  


처음 수업을 오픈했을 때는 ‘오늘’이 자리 잡지 못한 상태라서 오랫동안 문의조차 없었다. 동네 손님이 많아지면서 글쓰기 수업에 대한 관심이 피어오르더니 3개월 뒤에는 정원 5명이 꽉 차고 대기자가 생겼다. 현재는 두 반을 운영 중이다.


지민이는 세 번째 멤버다. 엄마들의 적극적인 의지로 참여하게 된 두 아이와 달리 지민이는 스스로 찾아왔다. 낡은 소매, 회색빛이 도는 흰색 운동화, 축 처진 어깨, 방황하는 시선.. 처음 지민이를 만났을 때는 왜 그 아이가 이 공간에 들어와 있는지 전혀 예상할 수가 없었다.


“저.. 여기서 책을 읽을 수 있다던데.. 맞나요?”


어렵게 입을 뗀 지민이가 의외의 말을 했다.


“네, 맞아요. 매주 월요일 오후 5시에 모임이 있어요. 책을 좋아해요?”


“아니요..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어요. 그래도.. 괜찮나요?


그렇게 세 번째 멤버가 된 지민이는 한 주도 빠짐없이 모임에 나왔다.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 꼭 남아 있었지만 늘 조용히 듣기만 했다. 지민이의 글은, 글을 통해 만나는 지민이는 단단한 호두 같았다. 속내는 고소하고 부드러울 것 같은데 껍질이 너무나 단단해서 깨지지 않는 호두. 6개월이 넘도록 호두 껍질은 깨질 줄을 몰랐다.


이상하게도 그 날은 4명의 아이들이 모두 글만 쓰고 돌아갔다. 지민이만 남게 되었는데 갑자기 지민이가 마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이 없다는 호두의 속살 이야기. 2시간이 넘도록 듣기만 했다. 침묵 속에 앉아 있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문을 열고 나가던 지민이가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저.. 혹시 다른 날 혼자 와도 돼요? 오래 있지 않을게요.”


그렇게 해서 목요일 5시, 둘만을 위한 모임이 시작되었다. ‘내일’. 지민이가 지은 모임 이름이다.





“기분 좋은 일이 있나 봐”


“네. 저 학급 문고를 관리하기로 했어요!”


3년 전 처음 만났을 때는 책을 읽어본 적도 없는 아이였는데. 학급 문고만 관리하는 게 아니라 친구들과 글 쓰는 모임을 만든 모양이다. 그 모임 이름도 ‘내일’이라면서 반짝인다.  


“선생님이 저 꾸준히 쓴다고 정말 멋지대요. 계속 써보라고 용기를 주셨어요. ‘내가 모임을 이끌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는데 용기 내보려고요.”




깨지지 않을 것 같았던 단단한 껍질을 깨고 글을 쓰기 시작한 지민이는 날이 갈수록 놀라운 모습을 보여줬다. 엄마에 대한 원망과 자책, 우울한 성격의 근원이 아빠의 부재라는 믿음, 이런 환경에서는 결코 변화할 수 없을 거라는 무기력한 확신. 지민이의 왜곡된 신념이 바뀌는데 큰 영향을 준 책은 단연코 ‘미움받을 용기’다.


2년 전, 아이들과 함께 ‘미움받을 용기’를 읽었다. 그때 지민이는 말도 안 되는 이론이라며 화를 담은 글을 썼다. 특히 방에 틀어박혀 있는 아이는 ‘부모를 괴롭히기 위한 목적’을 위해 ‘방에 있는 것을 선택’했다는 대목에 꽂혀서 ‘나의 목적은 엄마를 괴롭히기 위함이 아니다. 나는 괴롭다. 나는 이렇게 길러졌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행동하는 거다’라는 요지의 글.


한동안 목요 모임 ‘내일’에서 ‘미움받을 용기’에 대한 이야기만 나누었다. 변하고 싶지만 변하지 않는 자신, 칭찬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 바쁜 엄마를 이해하려는 노력, 엄마도 엄마의 삶이 있다는 것 등등. 지민이는 매일 글을 써서 편지처럼 들고 왔다. 자신에게 쓴 듯한, 하지만 같이 읽고 싶다며 들고 온 마음을 함께 읽으면서 또 다른 이야기를 나눴다. 그 시기의 나는 우연히 호두 속에 들어가 눌러앉게 된 무언가였다.   


몇 달 뒤 지민이가 직접 만든 책갈피를 가져왔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 해석’이라는 말이 이해가 돼요. 과거는 바꿀 수 없는데 과거에 일어난 일로 저를 못 살게 굴고 있는 것 같아요.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로 시선을 옮겨 보려고요.”




그리고 오늘, 껍질을 깨고 나와 세상과 소통을 시작한 지민이의 도전이 시작되었다. 평소 입지 않던 치마와 낡을 대로 낡았지만 지민이가 사랑하는 연둣빛 티셔츠, 환한 미소.


딸랑~

살랑거리는 걸음으로 세상을 향해 나서는 지민이 뒤로 노을이 길게 들어왔다. 뒤를 돌아 한껏 들어 올린 손을 마구 흔드는 아이가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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