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오란 개나리를 시작으로 새하얀 벚꽃, 진분홍빛 철쭉, 화려한 목련들이 참 아름답다. 저마다의 특색을 자랑하는 꽃을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없는 감동이 차오른다. 하지만 가장 내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마른 가지에 파릇파릇하게 피어나는 연둣빛 물결이다. 진한 녹색이 되기 전, 이제 막 돋아나서 작디작은 잎들이 온 나무를 가득 채운 모습을 볼 때면 저절로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가던 길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꽃과 나무에 눈길을 주기 시작한 것은 최근 일이다. 겨우내 잠들어 있던 생명들이 축제를 벌이는 4월이 하필 중간고사 기간이기 때문에 강사로 일할 때는 축제에 함께 할 여유가 없었다. 햇살이 따사로운 오후에 출근하면서도 지천에 널려있는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답고 감사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 시험 때문에 벚꽃 구경도 못하고 속상하다고 말하면서도 집 앞에 피어있는 꽃을 들여다볼 여유는 없었다. 전쟁 같은 시험을 치르고 겨우 숨을 돌리면 다시 기말고사 준비가 시작됐다. 계절도 없고 나도 없었다.
왜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을까. 나를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움, 감동을 보지 못하고 월급과 커피 한 잔에 의존해 버티고 버텼다. 물론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은 즐거웠다. 나로 인해 수학을 좋아하게 되고 성적이 오르는 아이들을 보면서 큰 보람을 느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정신없이’ 일을 하다가 체력이 바닥났다. 그 좁은 세상에서 눈 감고 귀 닫고 아등바등 살았던 내가 안쓰럽다.
임신 준비로 일을 그만두었던 첫해에는 쉬면서도 쉬지 못했다. 1~2분까지 쪼개어 수업을 하던 내게, 할 일이 없는 24시간은 지루함 그 자체였다. 바쁠 때는 그렇게 재미있던 책이 한 줄도 읽히지 않았다. 이렇게 놀아도 되나. 쓸모없는 존재가 되는 건 아닐까. 빨리 아이를 갖고 다시 사회로 복귀해야지. 오랫동안 답이 없는 고민에 빠졌다. 몸은 쉬지만 머리는 쉬지 못하는 날들이 계속됐다. 머릿속이 복잡하니 하는 일이 없는데도 바빴고 시간 부자가 됐는데도 마음에는 여유가 없었다. 임신에만 매달려 살았다. 그렇다고 운동을 열심히 하고 좋은 음식을 챙겨 먹은 것도 아니다. 무기력한 상태로 병원만 오가는 기간이 길어졌다. 세상 모든 고민을 떠안은 사람처럼 내 안에 고여 있는 잿빛 우울에 빠져 시간을 죽였다.
시험관 1차에서 기적처럼 임신이 되었다가 7주에 유산되었다. 두 번째 유산이었다. 아이를 갖지 못하는 내가, 아이를 준비하느라 일을 할 수도 없는 내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쓸모없는 존재가 된 것 같아서 자존감이 바닥을 기었다.
두 달 정도 몸을 추스르고 독서모임에 나갔다. 외출을 하기에는 무리였지만 이렇게 살다가는 나 자신이 방바닥에 붙어서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더 이상 아기에만 매달려 살고 싶지 않았다. 임신에 모든 것을 걸고 있던 나에게서 빠져나와 또 다른 나도 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었다. 책을 읽고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차츰차츰 나를 가두었던 늪에서 빠져나왔다.
외출하는 길에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던 어느 날. 하늘이 이렇게 파랬던가. 구름이 저렇게 예뻤던가. 바람이 이렇게 부드러웠었나. 그 순간 빡빡했던 마음 사이로 조그마한 여유가 비집고 들어와 자리 잡았음을 알게 되었다.
정확히 어떤 활동이 나를 건져 올려주었는지는 모르겠다. 마음을 울리는 책을 읽고 소통하는 과정에서, 감사 일기를 쓰면서 일상을 세심하게 관찰하는 연습을 통해서, 나다움 코칭을 받고 자신감을 다지는 시각화 일기를 쓰면서, 자아탐색을 주제로 4주 동안 글을 쓰는 과정에서, 매주 두 편의 글을 쓰고 나누는 미작 모임을 통해서 나는 아주 조금씩 변화했던 것 같다.
이제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떨 때 행복한지 안다. - 햇살을 받으며 책을 읽고 맛있는 커피를 마실 때. 가족들과 편안하게 밥을 먹고 함께 보드게임을 할 때. 영어 과제를 제출하고 매일 성공하는 기분을 누릴 때. 배우고 싶은 것이 생기면 주저하지 않고 도전할 때. 결이 맞는 사람들과 진심을 나누며 소통할 때.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마음껏 사랑을 주고 마음을 표현할 때. - 거창한 무언가가 되기 위해 손에 잡히지도 않는 기회 찾기를 그만두고 하루하루를 좋아하는 것들로 채우려고 한다.
‘봄이 좋아요, 예쁜 꽃이 좋아요’가 아니라 ‘마른 나뭇가지에서 막 피어나는, 진한 녹색이 되기 전의 연둣빛 물결이 좋다’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된 지금이 참 좋다. 벅찬 기분을 선명하게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쉽지만, 내 마음을 온전히 표현하는 것 또한 차츰 배워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