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아. 만약에 너희 형제 중에 부모님 돈 다 가지고 가서 펑펑 쓰고 거지가 되었다고 상상해봐. 그리고 다시 집에 온다면 어떨 것 같아?
"쫓아버려야 해요." "욕해요." "화가 나요"
바른 대답은 예상하지 안 했지만 정말 리얼하게 솔직한 대답이었다.
나도 화가 날 것 같다. 돌아온 탕자를 용서한 다는 건 아이들 입장에서도 어른인 나의 입장에서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왜 집에 돌아가야 하죠? 그냥 돼지고기 먹으면서 살면 되잖아요(그림 속에는 탕자가 돼지 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럼 주인이 경찰에 신고할 거야." "그럼 주인도 죽여야지요." 헐 그냥 말도 안 되는 말을 쏟아낸다. 아이들은 상황에 몰입하기보다는 공기보다 가볍게 말장난하는 것을 더 열을 올린다. 아이들 말에 때론 놀라기도 하지만 재미있다. 사람을 마음대로 죽였다 살렸다 하는 공포스러운 상황도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상황을 잘 견디면 아이들은 또다시 차분해지고 집중한다.
이 모든 것을 아는 나에게도 중요한 사실은 나도 이런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공기처럼 가볍고 하늘의 구름처럼 부풀려져 언젠가는 빵 하고 터질지 모르지만 함부로 공상하고 열심히 상상하며 살았던 날들. 현실과 상상의 날들의 세계를 넘나들었던 그 어린 시절이 있었다.
예배를 마치고 두 어머니를 모시고 짬뽕을 먹으러 갔다.
우리가 들어갔을 때에는 한 테이블만 사람이 있었는데 들어가고 얼마 안 되자 사람들이 꽉 차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음식이 나올 때 우리는 나오지 않았고 급기야는 옆 테이블 사람들이 "이거 저기 것 아닌가요? 이거 주세요" 하지만 이미 그 사람들 앞으로 나왔고 먹지는 않았지만 젓가락을 국물에 넣은 상태였다. "아니 괜찮아요. 드세요." 우리 쪽을 바라보고 얘기하고 있는 분에게 대답하였다.
우리를 뒤따라 들어온 다른 분들은 화가 나서 나가버렸다. 참다못해 아르바이트생을 불렀다. 그리고 한마디 했다." 저기 저희가 먼저 왔는데요?" "알았어요. 죄송해요. 금방 나와요." 또 몇 분이 지나는 찰나에 어머님이 "다 나가네. 우리는 왜 안 줘?" 하셔서 다시 한번 의자 너머로 얘기를 했다. "저기요. 아직 멀었나요?" "알겠습니다."
내 옆에 앉아 있던 사춘기 아들이 내 옆구리를 꾹 찔렀다. "그만해 아르바이트생도 힘들다고." 아차 싶었다.
침묵이 능사는 아니지만 때론 참는 것도 미덕이다라는 말이 약간 억울하지만 생각났다. "알겠어. 그래도 화를 내지는 않았잖아. 그래도 그만해야 했는데 두 번이나 얘기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아이인 아들이 어른인 나에게 충고한다.
계속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엄마가 갑자기 "너희 아빠라면 진즉 화내고 나갔을 거다." 그렇다. 이런 상황에서 아버지가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 어릴 때 간간히 봤었다. 그래서 엄마가 침묵을 지킨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엄마는 늦더라도 먹고 가야 했으며 지난날 아버지 때문에 긴장감을 갖는 것 자체가 싫었던 것이다.
나는 아버지와 다르다. 아이인 나는 커서 아버지와 다르게 행동한 것이다. 만약 내가 화를 냈고 먹지 않고 일어섰다면 나는 아버지와 같은 행동을 한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본 사춘기 아들도 언젠가는 불평과 화를 내도 아무렇지도 않다. 당연한 상황에서 당연히 습득된다.
더 이상 아이가 아니다. 아이를 좋아하지만 나는 아이 같은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간혹 오늘처럼 어른스럽지 않은 행동을 보여 어린 아들에게 한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어른도 완벽하게 어른이 되기는 어려우니깐. 그렇다면 아이들이 아무렇게나 말하거나 아이들이 온갖 거짓이 난무하는 말을 해도 이해해야 한다. 그게 또 어른스러운 행동이니깐.
무슨 얘기인지 쓰려는 맥락 없이 뒤죽박죽 되었지만 크게 문제 되지는 않는다. 읽는 화자의 마음이아이처럼 마구 아무렇게나 섞어지면 좋겠다. 옳고 그름이 아니고 좋고 싫고도 아닌, 잘나거나 못나거나, 잘생기거나 못 생기거나 등 이분법적 사고가 난무하는 이 세상에 이렇듯 마구 섞여 있는 마음만은 언제나 아이 같길 소망한다.